짐을 내려놓자마자 읍내에 가서 국밥을 먹었음에도 이상하게 계속 배가 고팠다. 허탈감 때문인지 이유 모를 안도감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속이 허했고, 결국 국밥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라면 물을 올렸다.
나는 라면 물을 정말 못 맞춘다. 다른 요리들은 꽤 척척 해내는 편인데 희한하게 한국인의 기본 소양인 라면 끓이기엔 젬병이다. 아니나 다를까 부족한 물 양에 한껏 졸아붙은 짜디 짠 라면을 먹다 보니 왠지 양은냄비가 아니어서 맛이 이 모양인 것 같았다. 솜씨가 부족하면 도구탓을 하기 마련이다.
어쨌든 그동안 흘린 눈물이 많으니 염분 보충하는 셈 치고 국물까지 야무지게 비웠다. 이 정도로는 그간 흘린 눈물의 1%도 채워지지 않을 것이니까.
고작 물 조절 실패로 망한 그날의 라면이 내게 왜 중요하냐면, 그 몇 달간 처음으로 식욕이 일었던 음식이기 때문이다. 서울 집에서 모래 씹듯 삼켰던 끼니와 달리 맵고 짜고를 다 느끼며 한 그릇을 후루룩 비웠다.
사실 내게 라면이란 한 달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한, 말 그대로 비상식량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이곳에 와서는 라면을 종종 끓여 먹는다. 너무 친환경적인 음식만 먹어서 몸이 반항을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가끔씩 라면이 그렇게 당긴다. 그것도 야식으로.
신선한 재료가 넘쳐나는 시골에서 무슨 라면이냐 한다면, 시골이기 때문에 라면이 더 맛있는 것이라고 답한다. 시원한 시골의 저녁 공기에 킥(kick)을 날리는 라면 냄새를 맡아본 적 있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개구리 소리를 BGM 삼아 후루룩 하는 그 순간을 글로 다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한 그릇을 다 비운 후 집 밖으로 나가면 풀냄새 섞인 밤공기가 짠 내를 씻어낸다. 조금 욕심을 내서 거기에 맥주 한 캔까지 들이키면 나는 당장 죽어도 때깔만큼은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양은냄비와 가스불의 완벽한 조화
내 느린 시골생활의 기념비적인 첫 끼니인, 가장 빠른 음식 '라면'. 오늘만은 부디 완벽한 면발이 되길 바라며 타이머까지 가동한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한 그릇'을 위해 구비한 양은 냄비도 마음에 든다. 끓는 시간을 고려하여 계란을 넣을 최적의 타이밍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 순간에는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오로지 보글보글 끓는 물에 표면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음식에는 힘이 있다. 마음이 힘든 사람들에게 잘 먹으라고 권하고 싶다. 이왕이면 몸에 좋은 음식이면 좋겠지만, 그것이 고작 라면이건 뻥튀기 나부랭이건 상관없이 그 음식에서 위안을 얻는다면 그 무엇이라도 좋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 이혼을 결정하던 그 시기에 정말 제대로 먹질 못했어서 시든 나뭇가지 같은 몰골이었고, 먹는 즐거움이 사라지니 인생이 더 고달팠다. 마음이 힘들면 혀가 기능을 상실하는 경우가 있는데, 인생의 즐거움이 먹는 것에도 크게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어쨌든 잘 먹어야 마음의 회복도 빠르다는 걸 체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