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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야 Jun 01. 2023

부끄러움은 각자의 몫

나의 수치심에게

 



 높은 건물 하나 없는 이곳에서는 잠깐만 걸어 다녀도 금세 얼굴이 탄다. 어느새 나의 피부톤은 23호가 되었고 주근깨가 눈에 띄게 생겼지만 자연이 남긴 건강한 흔적이라 싫지 않다. 패션에 관심이 많고 멋내기를 그토록 좋아하던 내가 이곳에서는 매일 선캡을 쓰고 삼선 슬리퍼를 신고 다닌다. 캐리어에 담아 온 옷들을 꺼낼일도 없어 잠옷으로 가져온, 예전 같으면 집밖으로는 입고 나가지 않았을 옷들을 입고 산다.


 볼 사람이 없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고작 얼마 만에 이렇게 사람이 바뀐다는 것이 문득 우습다. 이만큼이나 나는 남들의 시선이 중요한 사람이었나 보다.


 나는 대체로 당당하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당당함이 사실 다른 이에게 비치는 내 모습을 꽤나 의식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인정욕구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내가 되고자 하는 모습, 내가 살고자 하는 삶, 내가 보이고자 하는 내 모습 등 설정 기준에 미달될 때 밀려오는 열등감이나 부끄러움, 자괴감은 결국 수치심이라는 감정으로 돌아온다.



 나의 수치심에게
 

 그의 유흥업소 출입을 묵인할 당시 가장 지배적인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잘못한  그였는데 부끄러움은  몫이었다. 여자로서, 아내 또한 엄마로서의  가치가 짓밟힌 기분에 치가 떨렸다. 수시 때때로 나 자신이 하찮아지는 기분을 견디기가 힘들었고, 이렇게 무력한 기분은 나를 자책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덴마크의 심리학자 일자 샌드는 그의  <나의 수치심에게, 최경은 옮김, 2021>에서 수치심은 자기 억압을 자아내고, 자신에 대한 회의감과 가치에 대한 의구심을 일으키며, 내면에 오랫동안 잠재되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말처럼 나는 내가 나약하게 느껴지고, 자존심도 매우 상했으며, 스스로에게 이 상황에 대한 통제력이 없다는 사실에 오랜 시간 절망했다. 정확히 설명되지 않는 분노보다도 계속 수치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끄러움보다 더 강렬하고 부정하고 싶은 수치심의 근원은 무엇일까. 힘들었던 결혼생활? 이혼한다는 것? 그가 나를 배신했다는 것? 정말 냉정하게 생각하면 저런 것들이 부끄러울 이유는 아니다. 그런데 왜 그토록 짙은 수치심에 한참을 괴로웠을까?

 

 일자샌드는 자존감과 자기감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우선 ‘자존감’이란 자신의 가치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이다. ‘자기감’이란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느끼는가에 대한 것이다(p.46). 이는 자신감과는 다르다. 자기감은 태어나서부터 경험하는 누군가의 ‘미러링’을 통해 형성된다고 한다. 자기감의 빈 틈은 미러링이 되지 않은 부분이며, 그 자리에는 ‘알 수 없음’ 혹은 ‘이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름’에서 오는 두려움이 자리하게 된다고 말한다.


 나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했다. 나라는 사람을 하나의 상자라고 가정한다. 안락한 엄마 뱃속에서 나온 순간 빈 상자가 주어지는 것이다. 처음 세상에 나와 느끼는 감정은 어쩌면 내가 있던 곳에서 배출된 것에서 오는 불안감일 것이다. 그 아무것도 없던 상자를 가득 채운 불안감은 엄마 젖을 먹고, 사랑을 받고 교감하며 하나둘씩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 왔을 것이다. 살아가며 마주하는 상황과 감정들이 상자를 점점 채워간다. 그러나 여기서, 채워져야 할 일정 부분들이 반응되지 않을 때 생긴 공백에는 불안이 그대로 자리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의 빈 틈을 메꾸기 위해 거짓 자기(방어기제)를 만들어 낸다.


  저자 역시 미러링이 되지 못한 자기감이 구멍은 '두려움'이 되어, 때로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크게 부정적인 감정을 수반한다고 설명한다. 제대로 된 반응을 받지 못한 부분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지에 대한 롤 모델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가까운 관계일수록 내면의 진짜 욕구를 건들게 되는 경우가 많고, 이때마다 나의 거짓 자아가 발현되며 내가 직면하기 어려운 두려운 감정에 거리를 두고 숨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싸움을 되돌아보면 직접적으로 나를 욕되게 하는 말이 아니었더라도 말이나 상황의 뉘앙스가 내면을 건드려 폭발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서로를 화나게 할 의도가 없었어도 내면의 은밀한 공간에 갑자기 훅 들어와 미완적인 부분을 건드릴 때 날카롭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이 각자가 기억하지 못하는, 성장과정에서 일어난 내면아이의 상처이건 혹은 살면서 겪은 특정한 미해결 과제이건 간에 말이다. 우리를 서로 밀어내게 만든 그 빈틈은 무엇이었을지, 그리고 그 평화롭지 못했던 자기 방어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생각해 본다.


 사실 나를 들여다보는 것은 남을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특히나 내 안에 치유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상처들을 꺼내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수치심이 들면 대체로 그 일을 잊어버리고 애써 억누르고 싶어 진다. 나도 항상 안 좋은 감정이 드는 일을 겪으면 그 감정을 파악하기보다 기억 저 편으로 던져둔 채 그 감정을 내쫓는데 집중했던 것 같다. 결국 해결되지 못한 부정적인 감정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나를 가두는 벽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그와의 관계가 끝나도, 나는 앞으로도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더 이상은 또다시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고 수치심을 느끼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나의 그 빈 틈의 심연을 마주 보기로 했다.


 현재의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을 찾는 방법을 공유해 보려고 한다. 이 방법은 영성심리상담가의 조언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우선 종이와 펜을 준비하고, 이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때를 생각한다. 그리고 우선 그 사건을 생각나는 대로 상세히 기억한다. 어떤 상황이건 누군가의 말이었건, 기억나는 대로 쓴다. 그다음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을 모두 쓴다. 단순히 '화가 났다' 보다는 느낌을 최대한 상세히 쓴다. 모욕적이었다, 슬펐다, 부끄러웠다, 무기력했다, 짜증 난다, 애처로웠다 등 구체적인 감정 단어를 찾아 모조리 쓴다. 이 과정에서 내가 별 것 아니라고 애써 넘어갔던 일이 내게 엄청나게 큰 부정적 감정을 심어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느꼈던 감정 단어들을 쭉 써보니, 작은 사건 하나에도 어마어마한 감정의 강이 존재했다.

 그다음 단계는 그때의 내가 했었어야 하는 말, 혹은 하고 싶었던 말을 마구 쓴다. 어차피 나만 보는 거니 온갖 쌍욕을 쓰건 저주를 퍼붓건 상관이 없다. 이걸 쓰다가 감정이 치밀어 올라 종이에 구멍이 나게 마구 그은 적도 있다. 마지막으로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위로하는 말을 쓴다. 이때는 나에게서 한 발 떨어져, 그때의 나를 돌아보며 힘들었던 부분을 최대한 공감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내가 나 스스로의 아픈 부분을 보듬어주고 조언해 주며 스스로 '미러링' 해주는 것이다.


 나는 이 작업을 시작한 지 고작 몇 번만에 그와의 싸움에서 지배적이었던 내 빈틈을 발견했다. 가장 친했던 친구와 사소한 오해로 크게 틀어졌던 기억, 전 남자친구와의 잘못된 애착관계, 일방적으로 거부 당했거나 비웃음을 당했던 경험,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 부모에 대한 감정적 역전현상 등 내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에 대한 많은 상처가 나왔다. 그 당시 제대로 감정이 해결되지 않았고, 전혀 다른 관계들이었음에도 특정 문제가 닮은 모양으로 반복적으로 발생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그의 부정행위 부분에 대해서 나는, 아이에 대한 그의 무책임함이나 아이가 받을 상처에 대해 내 감정을 깊게 이입하여 몇 배의 분노와 수치심을 느꼈다. 앞선 글에서 다룬 가스라이팅이나 모욕감 등도 함께 작용하여 배신당하고 거부당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고, 그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나는 그의 부당한 대우에 적합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끊임없는 생각은 더 큰 불안을 낳는다. 이 작업은 내가 평생 해야 할 작업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감정이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도 깊다.


 나의 지난 미해결과제에서 발현된 수치심은 나의 인정욕구와도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여기서의 부작용이 자아억제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내 부끄러움이나 부족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남들에게 좋아 보일만한 것들을 해내며 내면의 진짜 욕구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혼 중인 내 상황을 밝힐 때도 마찬가지이다. 얼마 전 재산분할 관련해서 미리 알아보다가 은행에 갔다. 부동산 분할에 관련한 부분을 창구 직원에게 문의하다가 대출 목적에 대해 이혼이라고 말하면서 괜히 낯 뜨겁고 기분이 나빴다. 그녀가 잠깐 멈칫하고 대답하던 그 몇 초간 온갖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나름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도 이런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마치 내가 인생에 실패한 것 같고, 동정받을까 봐, 혹은 그들이 나를 이상하게 볼까 봐 굳이 말을 하지 않거나 내 상황을 축소 혹은 과장해서 말한다. 사실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건 지금 이 글처럼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겪은 일, 나의 힘든 부분을 내 입장에서 가감 없이 알리고 어떤 것도 감출 것 없이 자유롭게 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차차 주변에 내 상황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그 과정에서 내 잘못도 털어놓고 조언도 듣고, 내적 지지도 받는다. 이혼의 터널을 지나 언젠가 끝이 날 때에는 불안과 걱정 없이 다른 이에게 내 이혼사실을 알리는 것이 심한 스트레스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수치심을 다룰 때 가장 중요한 건
반드시 그 위에 빛을 비춰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수치심에게, p.68>



 이제 나는 내 수치심과 그의 수치심을 구분해야 한다. 내가 집중해야 할, 그리고 해결해야 할 수치심은 그의 유흥업소 출입이나 이혼 그 자체가 아니다. 내가 정말 수치스러워 했던 것은 우리 관계에서 내가 받고싶던 인정이 묵살되었을 때, 원하는 만큼 애정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 버림받는 두려움에 휩싸이는 약 내 모습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 부분들에 대해 나를 제대로 방어할 줄을 몰랐고, 그로인해 내 자존심과 거짓자아가 만들어 낸 강경한 자기방어를 폭력적인 분노로 내뱉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겪은 모든 모욕감이나 수치심에서 자유로워 지기는 어렵다. 아무리 자신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 본다해도 절대로 정당화되지 않는 것들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받은 상처뿐만 아니라 내가 상대에게 준 상처도 해당된다. 단지 이제 나는 그 와의 관계를 떠나 심리적으로 자유로워지고 싶기에, 내가 해결할 나의 부분을 해결하며 그의 잔재로 부터 점점 멀어저 가려는 노력을 할 뿐이다. 이 노력은 또한 앞으로의 나를 위해 분명히 도움이 된다. 나는 언젠가 완전히 자유로워 질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인간은 영유아기부터 부모 혹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그를 통제하는 방법을 배워간다고 말한다. 결국 자기감이란 내게 중요한 부분을 누군가가 얼마나 공감해 주었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나조차도 아이에게 모든 부분에 있어 제대로 된 미러링을 해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낳았어도 아이는 완전히 다른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전자를 공유했을 뿐 욕구와 생각, 받아들이는 부분이 다르다. 이는 자기만의 자치국가를 형성하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가 바라는 부분이 나와 완전히 상호작용 되지 않는다. 특히나 자아의 대부분이 형성된다는 영유아기 때에는, 말이 안 통하니 더 어렵다. 지금껏 내가 묵살해 버린 아이에 감정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내 기준에 부합하지 않을 때 쉽게 아이의 감정을 가볍게 치부해 버린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제라도 항상 미러링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따듯한 반응을 해주려 노력할 뿐이다.


 자신의 모든 부분을 긍정으로 꽉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크건 작건 불안의 빈자리는 존재하기 마련일 것이다. 모든 면에 대해 적합한 미러링을 받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미 자아 발달 시기가 늦은 우리 같은 성인들은 그냥 포기해야 하나? 저자는,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심리학자와 상담가들은 이 부분에 대해 스스로가 '양육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감정에 한계가 없듯 그 시기에도 정해진 때는 없을 것이다. 따듯한 공감으로 자신의 두려움을 맞닥뜨려야만 내면의 빈자리에 압도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감정은 자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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