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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야 Jun 07. 2023

내 남편의 여자(2)

애착, 떼려야 뗄 수 없는.



 이혼을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정보가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법은 나쁜 놈들 편이고, 특히나 외도나 성매매 등을 밝히는데 가장 중요한 증거들을 수집하는데 뭐 그리 불법이 많은지. 법을 다 지키며 증거를 수집하자면 그놈들이 스스로 영수증이니 문자니 통화내역 다 들고 자수를 해야만 가능한 정도이다. 잘못한 놈 보호하자고 법을 만든 것 같아 헛웃음이 나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정보 수집을 위해 포털 카페나 변호사들이 상담을 해주는 사이트를 여럿 돌아다니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사연들을 접하게 되었다. 뭐 이리 비슷한 종류의 슬픈 여자들이 많은지 씁쓸했고, 동질감을 느끼는 나 자신도 슬펐다. 이혼이 아무리 흔하다지만 그들의 사연을 몇 개만 읽어봐도 평범한 가정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여간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시가에 관련해서는 무슨 공식처럼 정해진 스토리들이 기본에 깔려있는 것이 황당하기도 했다. 나의 시어머니였던 그녀에게 또 다른 며느리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떤 사건은 아예 똑같아 무서울 정도였다. 초 단위로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우리 시어머니들의, 그 시어머니의 시어머니들이, 결국 조상들의 가부장 문화의 부정적인 부분만 대대로 내려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빅 엿을 선사하고 있는 것 같다.

 욕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이래서 있나 보다.


 물론 이 시리즈의 서두에 밝힌 것처럼, 언제까지나 이 글은 '내 입장에서 쓴' 것이다. 그 커뮤니티의 글들도 마찬가지이다. 모두가 자신이 겪은 일이 가장 힘들고, 내가 가장 억울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제를 두고 객관적으로 보려 하더라도 경험해 본 자는 그 맘을 이해하기에 그것이 왜곡되었건 부풀려졌건 나를 투영하고 눈물짓는다.



애착 관계가 강할수록 강한 투사가 일어난다
<가족이라는 착각, 이호선, 2022, P.104>


 나는 저 남자랑 살았는데 그의 가족, 특히 어머니랑 더 오래 산 것 같은 피로가 밀려온다. 아마도 이러한 기분의 근본적 원인은 내가 그에게서 자꾸 그의 어머니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죽하면 심리상담을 할 때 나는 그녀의 끝없는 영향력에 대해 마치 내가 그녀의 정서적 남편을 빼앗은 기분이라고 설명했었다.

 그는 절대적으로 이를 부정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사고방식을 계속 그에게 주입했고, '너를 이해하는 건 원가족뿐'이라는 명제 하에 그의 잘못된 행동을 지지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개별화'가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무언가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아들에게 '너만 내 맘을 알아주면 나는 행복하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고, 내 앞에서 자꾸만 '너무 잘 생긴, 잘난 우리 아들'이라는 말을 하는 것도 듣기가 묘했다. 그를 사이에 두고 나와 애정의 크기를 경쟁하는 느낌이었달까.

 그가 내게 어머니의 상을 투사할 때는 더 힘겨웠다. 애착관계가 강할수록 강한 투사가 일어난다는데, 그가 익숙한 어머니의 돌봄을 내게 요구하면서도 내게서 그녀와 비슷한 부분을 발견하면 극심하게 비난하는 이원화가 일어났다. 

  

애는 지우든지 말든지


 임신 4개월 즈음 우리는 또 시댁 문제로 크게 싸웠다. 시댁 행사 관련한 일로 시작된 싸움이었고, 그는 임산부인 나를 두고 가출을 했다. 왠지 시댁에 갔을 것 같아 시어머니에게 연락했더니 모른다고 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찾아간 시댁에서 오손도손 밥을 차려먹던 모자를 마주했다.

 집으로 가자는 내게 ‘남의 편’은 이혼하자며 아이는 지우든지 말든지 하라는 끔찍한 말을 내뱉었다. 옆에 있던 그의 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았고, 오히려 어디서 남편한테 허리에 손을 올리고 그 따위로 째려보냐며 타박을 해댔다. 하도 미친 소리들이 난무하니 제대로 판단이 되지 않았다.


 그 어머니는 자신이 두 아이를 낳고 계속 임신이 되어 두 번인가 낙태를 했었다는 사실을, 무려 상견례 때 이야기했다. 그들 가족은 아무렇지 않게 넘겨 듣는 저 말에 나와 내 부모만 당황했었다. 물론 내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일은 아니다. 그녀의 몸이고 그녀의 선택이고 그녀의 인생이니까.

 그러나 자신이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자식들에게, 내가 너희를 키우느라 힘이 들어 낙태를 했다고 말하는 것은 백만 천만번 생각해도 사실 내 상식으로는 이해 불가다.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만약 잉태된 순서가 달랐다면 그렇게 '너도' 지워질 수 있었다는 말 아닌가?


 그걸 듣고 자란 아들이 자신의 아내에게 '애를 지우든지 말든지'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은 생명도 아니라는, 내 새끼는 귀하지만 네 새끼는 안 귀한 것을 그 어머니가 몸소 가르친 것이므로. 그것을 합리화시키며 자신의 아들이, 심지어 자신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에 동조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비뚤어진 모성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 사건으로 인해 나는 그들에 대한 아주 근본적인 경멸감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건 이후에도 어찌어찌 화해를 하고 쭉 살았다. 그러나 이번에 그의 부정행위 증거를 수집하며 보게 된 그 당시 그들의 메시지에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가 내 뱃속에 있는 아이에 대한 포기선언이나 마찬가지인 발언을 한 얼마 후, 나와의 싸움에서의 고충을 토로하자 그녀는 아들에게 ‘그러게. 유산해서 헤어졌으면 좋겠다.’라는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다.


 나는 지금 아이 전에 유산을 했었다. 결혼 3개월 만에 임신을 했고, 임신 7주 차에 아이를 잃었다. 계류유산이라 태아는 보이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 당시 내 아이가 떠났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마음 아파했었다.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온 아이라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기쁨보다 당황함이 더 컸고, 내가 행복하게 반기지 않아 아이가 떠난 것 같아 죄책감에 정말 힘들었다. 유산은 엄마 잘못이 아니라고 하지만, 혹시라도 이를 겪어본 사람이라면 내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이다.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감이 밀려온다.

 내가 유산으로 이토록 힘들어했던 것을 아는 사람들이 이따위 말을 해댄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니 극심한 경멸감과 분노가 밀려들었다. 정말 인간 같지도 않았다. 짐승 같다고 해야 할지, 짐승보다 못하다 해야 할지, 더 하다 해야 할지 표현 조차 되지 않았다.



애착문제는 결국 내면의 채워지지 않은 애정을 회복하려는 호소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 사랑이 컸던 건지 뭔진 모르겠지만 나는 저 가족이 내게 잘못을 해도 그에게는 유난히 관대했다. 똑같은 말을 했어도 그는 용서했지만 다른 이들은 용서하지 못했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그에 대해 미웠던 부분에 그 가족의 모습을 레이어링 시켰던 것 같다. 이때의 느낌을 이미지화 해서 설명하자면, 그가 가족을 등에 업은 모습이었다.

 반면 그들은 나라는 '공동의 적'을 설정하고 자신들 가족의 완전함을 자꾸 증명하려 했다. 그를 통해 대면하는 그 가족의 내재된 강압성과 자신들만 옳다는 사고방식이 나를 옭아매었다. 특히나 그가 자신의 어머니와 똑같이 '나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라고 이야기할 때면 나는 그 부모의 환청을 듣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아들에게 그 배우자인 나를 깎아내리며 자신의 사랑과 이해를 강조하고, 그와 동시에 그들 삶에서 채워지지 못한 애정을 아들과 나에게 요구했다. 특히 그 어머니가 그토록 강조한 '헌신'은 내겐 정서적 고문이었다. 아들을 사랑하는 만큼 그와, 그의 배우자인 나도 자신의 요구치에 맞춰 주어야 하는 비합리적인 요구.

 그녀는 남들에게 사랑받는 어머니로 비치길 바랐지만, 나는 내가 그녀 친구들 사이에 자랑거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이유를 끝내 찾지 못했다. 그도 어머니의 이런 부분을 어느 정도 알았다. 그래서인지 부부상담 당시 <가족의 두 얼굴>을 읽고 너무 심취했던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자신이 상담을 해보겠다고도 했다. 이래서 책 한 권 읽은 사람이 제일 무섭다.  


 무언가 내게 자꾸만 이질감을 느끼게 했던 아들에 대한 그녀의 애착은 사실 그녀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카다 다카시의 <애착수업, 이정환 옮김, 2017>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한다. 애착에 관한 문제는 대체로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에도 정신의학 쪽에서는 ‘애착장애’등 을 그를 겪는 이에게 병명을 부여한다고 말이다. 덧붙여 저자는 애착에 원인을 두고 병증을 해결하는 치료법이 본격적으로 연구된 지는 반세기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나,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증명하듯 많은 관계 심리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이 여기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애착으로 인한 문제는 결국 관계에서 비롯된 ‘애정을 회복하려는 시도이자 호소’이며, 그렇기 때문에 문제 자체를 각 개인이 아닌, 기존에 제대로 된 애착을 주지 못한 관계를 통해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애착의 빈자리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일어난다. 영유아기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서도, 후천적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겪은 관계의 문제에서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어쩌면 그의 어머니는 강압적이고 지배적이며 아내보다 부모를 더 중요시했던 남편과, 힘겨웠던 장녀로서의 역할, 이러한 환경 속에서 희생을 자의적 타의적으로 스스로에게 강요했을 수 있다. 자식들을 성공시킴으로써 자신의 삶을 증명받길 원했던 것도 결국은 채워지지 못한 인정과 따뜻한 애정을 요구한 것일 수 있다. 그 아버지 역시 자신이 이끌어온 가족은 그 영향력 아래 있어야 하며, 그가 그랬듯 자식은 무조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당한 것이었다. 그 사이에서 자란 자식들은 부모가 위대하면서도 두렵고, 연민을 가져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애착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우리는 가장 가까운 이에게 나를 봐주기를 갈망한다. 단순히 관망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결핍된 애정과 돌봄을 바라기도, 요구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의 문제는 싸움의 이유보다 이러한 심리싸움이 주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녀와 나는 그를 두고 힘겨루기를 했다. 서로가 얼마나 영향력을 끼치는지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고, 그녀는 내게 순종을 나는 그녀에게 포기를 요구했다. 부모에게 늘 어린애 취급을 받아왔던 그는 그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 기싸움 속에서 자신의 주도권을 쟁취하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나나 그 어머니 각자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문제는 이 영향력이 파괴적인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택한 방식은 연락을 끊거나 가출을 하는 등 자신의 바운더리를 확보하기 위한 극단적인 거리 두기였다. 우리 모두 외로웠다는 것을 인정하는 지금에서야 이것이 얼마나 슬픈 싸움이었는지를 깨닫는다. 어느 누구도 승자가 없다.



비뚤어진 모성의 대가


  또다시 시댁 일로 싸운 이후 언젠가 그는 내게 각서를 써달라고 했다. 자신의 말에 '복종'하고, 시댁에 무조건 잘해야 하며, 부부사이의 어떠한 일에도 절대로 화내지 않는다는 내용을 요구했다. 말 같지도 않아 대응을 않았다. 마지막에 덧붙인 내용이 더 가관이었는데, 이 중 하나라도 어길 시 전 재산을 몰수하고 아이도 놓고 나가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미친 소리인가.

 나는 그 당시에 그가 화가 난 나머지 정신이 나가서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복종이니 무조건 적인 양보와 이해를 요구하는 그 각서는 불합리함의 결정체였다. 부부간에 오고 갈 언어들이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_이 것도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_ 이 각서는 그 어머니가 요구한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과 행동에는 늘 어머니가 있었다. 내가 알던 모르던.


 그녀는 이런 요구사항을 구구절절 메시지로 적어 그에게 보냈는데, 그 내용이 아주 상세했다. 시댁에 올 때 빈손으로 오지 않기, 시어머니 말에 대꾸하지 않기, 남편 말 잘 듣기, 2주에 한 번씩 시댁 방문, 명절에는 시조모댁에 방문 기타 등등이었다. 심지어 이를 어길 시 전재산 몰수라는 멍청한 소리부터, 양육권은 자신이 갖고 만약 내가 키울 경우 양육비를 안 주겠다는 내용을 써놓았다. 그리고 그는 그걸 내게 고대로 요구했다. 그나마 그가 간추려 쓴 게 저 모양이다. 


 내 혼인신고서를 노예계약서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이러한 싸움에서 끝까지 져주지 않던 나를 무너뜨린 최종 방식은 그가 모든 애정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유흥업소와 성매매이다. 우리 사이의 애정을 완벽히 거부함으로써 이 연결고리를 끊었으니 마냥 원망만 할 수도 없다. 그렇게 그는 이조차 포용하는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갔고, 그 비뚤어진 모성의 대가로 나는 이제야 그들과 완전한 이별을 하는 것이다.


  그는 부정행위에 대해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모든 부정행위도 그들 사이에서는 용납이 될 수 있다. 가족 내에 받아들여지기 때문인지 원인을 내게 돌리면 그들은 안전하기 때문에, 이 조차 탓할 대상이 필요할 것이다. 사실 그가 자신의 행위가 낱낱이 적힌 이혼소장을 가족들에게 보여줬는지도 확실치 않다. 과연 그의 잘못을 그대로 가족들에게 내보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 가족 내에 흐르는 에너지가 그러하다. 그는 첫 직장을 그만둔 후 부모가 실망할까 봐 회사를 다니는 척했었다고 했다. 그는 절대로 실망시켜서는 안 되는 존재이고, 그래서 나는 그도 불쌍했다.



운명의 수레바퀴, 가족


 어쨌든 나는 더 이상 이러한 가족문제를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혼을 결심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희생'이라는 명목하에 묵인해 버리면 나는 내 아이를 똑바로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 엄마이기에 그녀의 비뚤어진 모성애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 것이다.


 엄마는 무조건 적인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존재임은 맞으나, 분명히 되고 안되고는 가르쳐야 한다. 특히나 그것이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라면 온몸으로 맞서 가르쳐야 한다. 부모의 연륜과 지혜가 세상의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이기에는 우리 모두가 그저 사람이기에 부족함이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나 역시 내 아이에게 무조건 올바른 모습만을 보이지 못하고, 또한 엄마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자식으로서 내 부모의 모든 가르침을 다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역시 존재하는 애착문제가 있다. 나는 완전히 나를 내맡기고 의지하는 것이 어렵다. 친정어머니는 몸이 아팠고, 그러다 보니 남들이 지나가듯 엄마를 잘 살펴드리라 한 말조차 내 사명처럼 느껴졌다. 마치 내가 보호자가 되어야 할 것처럼 받아들였던 것 같다. 정서적으로도 엄마는 매우 감성적이고 나는 이성적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엄마가 영육 간에 상처받기 쉬운 존재로 비추어졌다.

 내 이성과 논리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하나둘씩 늘어가면서, 부모님께 의지하기보단 내가 독립적으로 알아서 척척 해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때론 벅차고, 때론 외로울지언정 다른 이에게 기대는 것보다 나 스스로 결정하고 해 나가는 것이 더 편했던 것이다. 내가 치열하게 가꾼 이러한 '독립심'을 그는 '이기주의'라며 비판했고, 그 가족은 이러한 이 부분을 무기 삼아 나를 공격했다.


 나는 이제 그들과 굴리던 '가족'이라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멈춘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조심하지 않던, 가족이니 괜찮다는 말로 상처를 후벼 파는 치졸하고 비겁한 굴레를 벗어날 것이다. 글을 풀어낼수록 나는 그들과 함께 갈 수 없음을 깨달으며 마음이 정리되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소나무 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


 나는 아버지와 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심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와 이 정도로 깊은 내면의 이야기를 나눈 것은 거의 처음인 것 같다. 부모님이 상처받을까 봐 이야기하지 못했던 어린 마음을 꺼낸다는 것이 내게도 쉽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겪은 아픈 마음에 진심으로 공감하며 힘들었던 내 지난날을 눈물로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이것으로 지난 어려움과 상처들이 상당히 나아짐을 경험했다.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나는 앞으로 해결해야 할 내 가족의 두 얼굴을 나의 가족과 함께 대면할 것이다. 내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갈 길이 멀다. 모든 애착의 근원인 가족 내의 문제는 당사자들이 함께 해결해야 하는 것이니 나는 도움과 협조를 요청해야 할 것이다. 그 시작을 아버지와 함께 열었다. 우리가 외면했고, 각자 묻어두었던 날들을 꺼내 함께 애도하고 토닥이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저 괜찮을 것이다,라는 말로 위로하기에 우리의 인생은 길고 그만큼 쌓인 서로의 내면의 상처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지만, 나는 때가 되면 내 아이를 품에서 잘 떠나보내고 싶다. 진심으로 그렇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저 언제든지 저 아이가 기댈 곳이 필요할 때 나를 찾고, 내면의 애정을 충전할 수 있는 소나무 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 올바른 모성으로 아이를 내 뜻대로 다루지 않고 정서적인 자양분이 되어 저 아이가 끝내 혼자 꽃 피울 수 있도록, 내 삶을 잘 살아내고 싶다. 이 시간을 딛고 일어서며 나는 내 마음에 물도 주고, 빛도 충분히 쬐어가며 약한 뿌리부터 차근차근 힘을 얻도록 해보려고 한다. 나는 아직 너무나 부족하지만 꼭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온 마음을 다해 바란다.


 용서는 스스로를 위한 것이라고들 한다. 모든 심리학과, 심지어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이탈리아어로 '용서하다'는 'Perdonare', '자기 자신을 위해 선물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결국 용서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화의 잔재를 내 마음에 두는 것이 더 괴롭기 때문에 떠나보내라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현자가 되어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또한 내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이상 다짜고짜 '너의 죄를 사하노라'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나와 내 아이를 위해 용서라는 단어를 곱씹어 볼 만도 하다.

 아마도 가장 쉬운 방법은 우리 모두가 상처받은 영혼임을 인정하는 것 일테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나와 상관 없어질, 차마 내가 평가할 수 없는, 해서도 안 되는 그 가족의 역사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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