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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야 Jun 11. 2023

상실의 강

내 마음을 잘 떠나보내기, 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


  마당 한 편의 텃밭에 상추를 키우는 중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상추인지 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들어 있던 풀떼기들이 꼬박꼬박 물을 주고 시든 부분을 몇 차례 솎아내니 쭉쭉 자라난다. 비료도 없이 맨 땅에 키워서인지 한입에 쏙 들어가는, 손바닥 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초록잎이 매일 밥상에 오른다.

 노랗게 바랜 시든 잎을 떼어내다가 엄마가 말했다. 사람이던 식물이던 가지치기를 잘해야 잘 자라나는 법이라고. 시든 것들에 영양분을 빼앗기지 않도록 때가 되면 하나씩 쳐내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이 작은 상추들이 나와 같이 느껴져 왠지 모를 애정이 생긴다. 뙤약볕에 물도 없이 시들시들 해지다가 이제야 제때 물을 먹고 시든 잎도 쳐내며 조금씩 제 색을 찾아가는, 가운데 부분에 솟아나는 손톱만 한 새순을 보며 희망 비슷한 것도 느낀다.


 이렇게 여유로운 생활 중 가장 좋으면서 힘든 것은 생각할 시간이 많다는 것이다. 과연 아무 생각 없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멍 때리고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에도 하늘의 색이라던가, 구름의 움직임을 보다가도 문득 나도 모르게 어떤 생각들에 골똘히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마음과 달리 생각이 제멋대로 마구 뻗어나가는 만큼 기분 역시 들쑥날쑥 해지곤 한다. 한동안 괜찮다가도 문득 우울함이나 슬픔, 허망함 같은 감정이 밀려온다.

 그나마 내가 조금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예전만큼 애써 그 감정들을 쳐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대면하는 지금은 어쩌면 내가 잘 쉬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시간을 할애해서 낱낱이 들여다볼 기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니 요즘엔 그저 내 마음의 강가에 앉아 폭풍우 치며 떠내려가는 그 감정들과 그 속의 아픔을 본다. 언젠가는 바람이 멈추고 잔잔해질 것이라고 믿으며.



 

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

 처음 무언가를 잃을 위기에 직면하면 그 충격과 더불어 현실부정을 겪는다. 그 현실부정의 과정에서 고통과 분노가 발생한다. 대체로 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해 가며 내 일상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제야 비로소 상실의 영향력 안에 고스란히 들어가며 폭풍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이제 내가 잃어야 할 것들을 마주하며 현실을 바라보는 과정으로 진입한다. 여기서 내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등 후회나 자책을 하기도 하고, 두려움이나 걱정 등으로 고통받는다. 그러다가 이제 놓아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수용하는 단계에 접어든다.

 사람마다 이러한 과정을 겪는 기간은 모두 다르고, 단계별로 머무는 시간도 다르다. 나의 경우 현실을 직면하는 단계에서 가장 우울감이 심했고, 이제야 인정하는 단계의 초입에 접어든 것 같지만 완전히 그전 단계의 우울이 사라지진 않았다. 상처의 흔적은 여전하고 그래서인지 자주 그에 관한 꿈기도 한다.

 

 무언가를 잃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냐에 따라 회복에도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린다. 살면서 이런저런 상실을 겪어보았지만 이번만큼 힘들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내 평생의 베이스캠프가 될 것이라 믿었던 가정 깨어진 것이기 때문일까. 이혼은 교통사고처럼 한 순간에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그것을 겪는 과정은 거의 6개월 동안 매일같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과 같은 아픔과 충격을 겪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만큼 가정이 깨어지는 것은 받아들이기도, 회복해 나가기에도 힘겹다.


 심한 우울감과 무력감이 올라와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하고 앞으로의 삶만 걱정하고 있을 때 <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 채정호, 2014>를 읽었다. 상실한 사람들을 위한 애도 심리학이라는 따듯한 부제를 읽는 것 만으로 기분이 조금 나아져, 왠지 내 상실을 위로해 줄 따듯한 글귀 하나 찾을까 싶어 책을 펼쳤다.

 


 상처를 떠나보내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관계에서 주고받는 상처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일종의 법칙 같은 것이 존재한다. 싸움의 구조가 비슷하다던지, 나나 상대의 반응에 반복되는 특성이 있다던지 감정이 누적되게 하는 공식 같은 것이 내재되어 있기 마련이다. 물론 한 번의 싸움으로 관계가 틀어지거나, 절대 용서 불가능한 행실들로 인해 상실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주로 관계 속에서는 서로 반복되는 어떠한 부분에 지쳐 서로를 포기하게 되기 마련이다.

 저자는 '상실과 애착에는 전염성이 있다(p.50)'고 말한다. 과거의 상실은 대물림된다. 기존의 어떤 상실을 잘 치유하지 못했을 때, 그러한 비슷한 구조로 상실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면에 해결되지 않은 부분들, 앞선 글들에서 다루었던 내면아이라던지 애착관계, 가족 안에서의 상처들이 정서적 결핍이 되어 반복적인 상실을 낳게 한다는 것이다. 서로가 바라던, 내면에 채워지길 원하는 부분을 아무리 요구해도 각자의 입장에서 이를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 부딪힘 속에서 서로가 충족되지 않을 때 '왜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라며 공격을 가하게 되는 것이다. 때로 부딪힘을 회피하는 사람은 혼자서 실망하고 혼자서 결단을 내리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역시 '나는 혼자야, 저 사람은 안 변해'등 성급한 일반화가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책은 담담한 어조로 상실이라는 큰 아픔을 어떻게 애도하며 떠나보내야 하는지 방향성을 제시한다. '슬픔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저자의 말에 매우 공감하며, 잘잘못을 떠나 어쨌든 가정이 깨어지고 나는 혼자가 되었다는 상실감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모든 감정은 내 의도와 다르게 일어나고, 머무는 기간과 드러나는 형태조차 내 마음대로 조절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애써 슬픔을 억누르거나 잊으려고 하는 것은 더 큰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다. 감정을 배출하지 못하고 쌓아놓게 되면 마음이 압력밥솥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것 같다. 그 상태에서 누군가가 의도치 않게 추를 건드리기만 해도 엄청난 김이 뿜어져 나오며 폭발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이건, 대화건 자신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풀어내며 충분히 표현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저자는 심리적 결핍을 무언가로 채우기 위해 사람들이 중독에 빠지기 쉬운 상태가 될 수 있음도 시사한다. 특히 술이나 게임(도박), 성중독 등이 가장 빈번할 것이다. 상처를 외면하고 애써 잊으려 하며 미해결 상태로 둘 때 올라오는 불안감을 잠재우려고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일시적 쾌락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마음의 힘이 약할수록 중독에 빠지기 쉬운 상태가 되기 쉽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마음이 너무 힘들 때 늦은 밤 자주 술을 마셨다. 아이를 재우고 혼자 있는 조용한 밤, 잠도 오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이를 떨쳐내고자 한 잔 마시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취할 정도로 퍼마신 것은 아니지만 맥주 한 캔을 습관처럼 마셨다. 사실 술을 마신다고 잠을 잘 자는 것도 아니고, 슬픔이 덜어지는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마음이 복잡하면 맥주캔을 땄다.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다 이야기할 수 없었을 때 술이라도 마시면 최소한 낮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감정을 풀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혼자만의 신세 한탄이건, 분노던 슬픔이건 간에 맥주캔이 경쾌하게 타악! 하고 따지는 소리에 숨이 조금 쉬어지는 것 같았다.


 고작 맥주 따위와 비할 것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 번은 유흥업소를 찾던 그 역시 나와의 관계에서 겪은 그 만의 상실과 불안을 그렇게 채우려고 했던 것일 수 있다. 그곳에 가면 뭐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다 받아들여지고, 그럼에도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니 그에게는 그만한 분출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서로를 완벽한 상실로 이끈 유혹이었다는 것을 그가 알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중독이라는 것은 감정의 해소는커녕 더 악화시키는 위험한 방법이다. 때로 한두 잔의 술은 막아두었던 감정댐을 열어주는데 도움이 될 수 있어도, 습관이 되어버리면 다른 방법을 찾지 않게 되고 더더욱 그에 빠져들게 된다. 유흥이건 술이건 도박이건, 어떠한 쾌락적인 행동들은 그 당시에는 그 감정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만 그 이후에는 죄책감이나 자기 파괴적인 합리화까지 더해져 감정의 무게를 싣게 된다.  



슬픔은 용수철과 같다


 나는 그래서 차라리 울기로 했다.

 나는 원체 눈물이 많기도 하지만 울고 나면 기분이 조금 나아졌기 때문이다. 사실 이혼의 초반부에 너무 울었다 보니 더 이상 울면 내가 지는 것만 같고, 울 가치도 없다는 생각에 최근에는 눈물을 참은 적이 많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슬퍼서 우는 것이니 애써 참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믿을만한 사람과 이야기하며 내 감정을 털어내고 엉엉 울었다. 때로는 산책을 하다가도 억울하고 슬프면 그냥 울었다. 눈물에는 힘이 있어서 이를 통해 감정을 내보내고 나면 확실히 조금씩 개운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내게는 우는 것이 내 슬픔을 잘 해결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슬픔은 용수철과 같아서 누를수록 언젠간 더 큰 힘으로 튀어 오른다는 저자의 말처럼 나는 내 감정을 억압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정서 표현을 두려워하는 '정서공포증(P.146)'은 내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자각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다 보면 감정은 더욱더 정체를 모르게 되고, 억눌러 놓았던 감정이 언제 어디서 생뚱맞게 튀어나올지 모를 사실이다. 이것은 상실이 전염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눈물은 확실히 치유의 효과가 있다.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출발점은 지금 내 상태를 자각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내 상태를 바라보자. 우선 나는 이혼을 하는 중이고,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다. 배신감이 크고 결혼생활을 실패했다는 느낌에 일종의 패배감을 느낀다. 이 상처가 평생 지속될 것 같은 불필요한 믿음도 있고, 내가 바라던 삶이 무너졌다는 것에 큰 상실감을 느낀다. 화가 나면서도 외롭고 쓸쓸하기도 한, 이것이 지금 내 마음상태인 것이다. 이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다. 나부터 나를 위로해야 제대로 슬픔의 바닥을 보고 이를 흘려보낼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사람이 상실을 겪은 후 6개월간을 '급성 애도기간'이라 하며 집중적으로 슬픔과 좌절이 몰려오는 시기라고 한다(P.172). 감정이 요동치고 나아지다 말았다를 반복하는데, 이때 재활이 되지 않으면 영구적인 심적 장애를 갖게 될 수도 있다. 흔히 이것을 트라우마라고 한다. 사람마다 겪는 깊이와 기간이 다르니 이 시기는 더 길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과 관계없이 방향은 정확해야 한다. 목적과 목표가 분명하다면 올바른 방식으로 이 슬픔을 떠나보내고 평화를 찾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목적은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고, 목표는 이 아픔을 기회삼아 나 스스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며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이다.

 언젠가 산에 가서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힘이 들어 내려왔던 적이 있다. 죽죽 미끄러지는 산길이 너무 힘들었고, 정상이 어디인지 보이지도 않았다. 이만큼 했으면 됐지 하고 돌아내려왔는데, 알고 보니 몇 미터 앞 코너만 돌면 정상의 초입이었다. 그때의 아쉬움이란. 그만큼 힘들게 올라갔으면서도 몇 미터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내려왔던 것은 정상이 한참 남았을 것이라는 나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지금 이때의 일을 복기하는 것은, 아마 내가 겪는 지금 이 감정의 단계가 정상에 도달하기 전 가장 숨 막히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그 시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슬픔에 잠식되어 머물러버리면 나는 끝내 자유롭지 못하다. 이 상실의 강에 몰아치는 폭풍에 나를 내맡기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지금, 방향키를 어디로 돌리느냐에 따라 이 강에 빠져버리느냐, 무사히 건너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비록 그 풍파에 배가 부서져 나뭇조각 하나 붙들고 목적지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그때는 맑개 갠 하늘 아래서 다시 항해할 새로운 배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때는 이 경험을 토대로 지금보다는 더 튼튼하고 쉽게 부서지지 않을 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이 폭풍을 건너는 항해일지가 되어 그날의 나에게 귀중한 자산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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