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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야 Jun 19. 2023

미움받을 용기

지금, 여기, 이혼


 분노와 허탈함만 남은 조정기일 참석 겸 오랜만에 서울 집에 들렀다. 한동안 비어있던 집을 환기시키고, 그새 처리하지 못한 공과금 등을 해결한 후 장롱 깊숙이 넣어두었던 결혼앨범을 꺼내 다시 시골로 돌아왔다. 집안에 그와 관련한 모든 물건은 이미 다 내다 버렸으나 앨범은 처리가 곤란해서 여태껏 그냥 두었던 것이다. 일반 쓰레기로 버리기엔 애매하고, 그렇다고 그놈 얼굴만 오려서 버릴 수도 없어 처치 곤란이었다.

 결국 가져온 앨범은 나의 시골 안식처 아궁이 속에 던져 넣었다. 막상 번쩍이는 가죽으로 곱게 포장된 저 몹쓸 종이뭉치를 어떻게 태우는지를 몰라, 인터넷에 '앨범 태우는 법, 앨범 불태우는 법, 앨범 처리방법' 따위를 검색했다. 조만간 바람 없는 밤, 앨범을 장작 삼아 지난 시간들을 태울 예정이다.





 그가 집에 와서 짐을 모두 싸가는 그날까지 나는 집안 물건을 모두 그대로 두었다. 어느 누군가는 짐을 싹 다 빼버리고 옷가지조차 주지 말라했지만 굳이 그런 수고를 들일 가치도 못 느꼈다. 한편으로는 셋이서 단란하게 살았던 이 집에서 네 스스로가 빠져나가는 과정을 겪게 해주고 싶기도 했다. 가족사진 아래 있던 서랍을 열고, 널브러진 아이 장난감 사이를 비집고 짐을 쌌을 것이다. 만약 나였더라면, 그 언젠가 삶에서 그 장면이 한 번쯤은 생각이 날 것 같았다. 그것이 결코 자유롭고 유쾌한 심정은 아닐 테니.

 물론 나와 그는 생각 구조 자체가 다르고, 지금 보니 그는 일말의 양심은커녕 최소한의 책임감도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내 기대와는 다르게 기억하게 될 것 같지만, 뭐 그렇다 해도 상관없다. 그와 관계없이 내가 아이와 내 공간을 의연히 지키고 있었다는 것은 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생활하다 보니 이제 여기가 내 집 같고, 예전 집은 불편한 공간이 되었다. 가끔 집에 들르면 가족사진이 사라지고 옷장 한 구석이  빈 것 이외에는 거의 변함없는 공간이 굉장히 어색한 느낌이 든다. 거와 현재의 빈 틈을 실제적으로 드러내는 빈 구석에 현실감이 떨어지는 기분이랄까.

 이런 때면 자꾸 과거에 대한 분노가 내 발걸음을 잡고, 오지 않은 미래의 걱정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런 기분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강하게 들 때면, 내가 마음을 다잡기 위한 일절의 노력이나 글을 쓰는 것조차 모두 부질없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날엔 물을 가득 받아 얼굴까지 푹 담근 채 오로지 호흡에만 집중하며 시끄러운 생각이 가라앉길 기다린다. 마지막 순간에 파하-! 하고 토해내듯 숨을 뱉으면 그제야 나는 살아있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든다. 오롯이 지금 현재에 집중하며 다신 돌아오지 않을 매 초의 숨에 주의를 기울인다. 침체된 거울 속 얼굴에게 '지나고 나면 별거 아냐'라고 한 마디를 건네며 이 기억이 언젠가는 희미해질 것 임을, 소나기처럼 문득 쏟아져 내리더라도 곧 해가 쨍쨍한 요즘 날씨처럼 곧 나는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반드시 과거를 남겨두고 떠나갈 것이다. 모든 사람은 불운과 행운을 반복하며 겪는다. 인생이 내게만 가혹한 것이 아닐뿐더러, 그 불운이 나를 망가뜨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겨낼 것이다.

 


인간은 변할 수 있다, 세계는 단순하다,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게. p.9>


 <미움받을 용기, 2014>로 국내에도 이미 잘 알려진 기시미 이치로는 아들러의 심리학을 토대로 인생을 조명하는 새로운 방식을 전한다. "인간은 변할 수 있다, 세계는 단순하다,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p.9)".

 이는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이론처럼 과거의 경험이나 내재된 상처를 통해 현실을 해석하는 것과 달리, 개인이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삶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원인론을 정면 돌파한다. 속 편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단순하고도 단순한 이론이며, 그럼에도 매우 수용과 실천이 어려운 철학이기도 하다.

 아들러의 철학을 삶에 반영하려면, 여태껏 살아온 날의 1/2의 시간이 더 걸린다고 한다. 내 나이가 마흔이라 치면 환갑은 되어야 그 정도 마음 가짐이 가져질까 말 까라는 것이다. 모든 문제에 있어 자신에게 초점을 두고, 스스로의 치유 능력을 믿으며 현실에 집중하는 것은 이토록 어렵다.


 인간은 그가 겪어온 바를 토대로 변화를 거부하는 특성이 있고, 두려워하는 것을 맞닥뜨리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방어기제를 설정한다. 앞선 글에서 간접적으로 언급했던 애착문제도 이와 결부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할 때 자신만의 동굴로 기어들어가거나, 남의 탓을 하는 등 '나'를 보호하기 위한 생존의 방식으로 행해지는 모든 심리적 반응들이 이에 속한다.

 특히나 부부나 연인 등 추상적인 감정이 우선적인 관계에서 이러한 문제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 같다. 우리의 부부싸움도 초반에는 서로 맞춰가고 이해하는 방향이었지만, 그 횟수가 더해지고 거기에 사실상 제삼자인 부모까지 끼어들며 각자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살아온 방식을 전부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처럼 깊고 깊은 자신의 우물 바닥까지 들어가는 것은 두렵고 거부감이 들기 마련이다. 물론 유흥업소며 성매매는 다른 문제니 이 부분은 논외로 하자.


 저자에 따르면 이는 '용기'의 심리학이자 동시의 '사용'의 심리학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바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변화의 유무가 결정된다고 이야기한다. 내 감정은 나의 것이니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 정제하느냐도 나의 몫이라는 것이다. 책에서 화자로 등장하는 청년의 질문은 모두 나의 질문이었다. 결국 모든 감정도, 그에 대한 대응도, 변화할 미래도 모두 내게 달려있다는 것인데 이 것을 완벽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가 이미 그럴 수 있었다면 여기서 이혼 얘기나 쓰는 것이 아닌 철학자나 상담사가 되어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대화체로 쉽게 구성된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점차 수긍할 부분들이 생기고, 내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철학자의 설명이 뇌리에 박힌다. 결국 모든 부분을 다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감정이 일어나는 구조와 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명확한 답을 얻게 된다.  

 

 특히 지금 과거와 미래 그 어느 지점 즈음에서 혼란과 허탈감에 맥이 빠져 있는 내 따귀를 갈기는 듯한 부분들이 있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는데 도움이 되었달까. 이 지지부진한 감정이 오래도록 지속될 것 같은, 앞으로 면접교섭을 이유로 어쨌든 마주쳐야 하는 그와의 그 불편함에 찬물을 쏴아- 부어버리는 느낌이었다.



꼬인 실타래를 더 이상 풀 수 없을 때,
가끔은 과감히 잘라버리는 것이 낫다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관계일지라도 마주하는 것을 회피하고 뒤로 미뤄서는 안 돼. 설령 끝내 가위로 끊어내더라도 일단은 마주 볼 것. 가장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 상황, '이대로'에 멈춰 서 있는 것이라네 (p.135)"


 인연을 설명할 때, 특히 연인의 경우 눈에 보이지 않는 붉은 실로 연결이 되어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누군가에겐 이러한 이야기가 로맨틱하게 들리겠지만 사랑에 대해 이미 시니컬할 대로 시니컬해진 내게는 귀찮게 이리저리 꼬인 실타래가 지겹게도 괴로울 뿐이다.

 엉킨 실을 푸는 것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차근차근 꼬인 부분을 찾아 한 줄씩 빼내지 않으면 더 이상 어쩌지 못할 정도로 더욱 꼬여버리기 마련이다. 우리의 관계가 그렇지 않았을까. 팽팽한 신경전으로 절대로 풀 수 없는 시뻘겋고 흉한 매듭의 응어리가 둘 사이에 놓인 느낌이었다. 그 매듭을 보기 두려워 외면하면 더없이 초라하게 먼지만 쌓일 뿐이니, 이제는 미련 없이 싹둑! 이 줄을 끊고 실뭉치가 데굴데굴 굴러가게 두어야 할 때다.

 

 내 상처를 하염없이 곱씹다 보면 나는 결코 이 상태를 벗어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는 그의 성욕을 따라 유흥업소에 다니며 스스로의 선택으로 가정을 떠나 가출을 했고, 나는 내 선택에 따라 이혼을 결심했다. 갈등 상황에서 서로의 선택지가 달랐던 만큼 이 이혼도 서로에게 다르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우리는 현재를 수용하는 방식도 참 다르다. 그 변호사의 의견이었건 무엇이건 간에 그가 조정일 조차 회피했다. 우리는 이토록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완벽한 다름을 인정하면 할수록 그가 머릿속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그 자리에 내가 조금 더 들어선다.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 혼자서도 충만한 시간을 보내고, 가족들과 도란도란 한 식탁에서 밥을 먹고, 내 마음을 염려해 주는 친구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로 인해 크게 웃는다. 나는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따지고 보면 그렇지가 않다. 그를 내 인생에서 도려내는 중에도 이미 꽤 괜찮은 삶인 것이다.


 지금, 여기 내 이혼 과정의 또 하루를 보내며 나의 지금을 바라본다. 지금 이 순간도 내 마음과,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아이를 위해 나는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자문한다. 내 선택으로 어쩔 수 없이 사회적 시선의 짐을 지고, 그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근거 없는 미움을 사더라도 결국 그것이 진정한 나를 이루는 방향이라면 정말 괜찮다는 용기가 생긴다.


인생을 직시하는 용기


 아들러 심리학은 스포트라이트를 현재에 비추면,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삶을 살게 된다고 말한다. 흐릿한 빛 속에 과거에 대한 일을 곱씹을 필요도,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할 필요도 없이 뚜렷한 현재를 진지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통찰인 것이다. 이는 종교적인 관점과도 상당히 닮아있다.

 여러 학파의 심리학자들과 영성가 들은 '현재'에 포커스를 맞추길 조언한다. 결국 과거는 이미 지난 것이며 미래는 아직 겪지 못한 것이기에 그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동안 가장 중요한 지금 이 순간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지금이야 말로 곧 과거가 될 순간이며, 지난 시간에 내가 그토록 걱정하던 미래였으므로.


 인생은 영원하지 않다. 젊음은 더더욱 영원하지 않다. 결국 사람에게는 끝이 있고, 우리는 그때가 언제인지 모른다. 이는 결국 과거에 있었던 일들, 그 내러티브 속에서 원인을 분석하고 미래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과거 때문에 내가 변할 수 없고, 부정적인 환경 때문에 미래를 머뭇거리게 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 것이다. 아직 안 살아봤으니 모르는 것이니까. 한 순간순간을 '점'이라 가정할 때, 결국 우리의 인생은 그 점들의 연속인, 찰나가 모여 이루어 내는 유동적이고 리드미컬한 굴곡이므로 언제든지 그 점의 높낮이는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이 어디에서 멈출지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잠시나마 과거와 미래를 모두 잊는다면, '지금, 여기'는 의지로 바꿀 수 있다. 지금 과거를 곱씹으며 욕을 하건, 물속에 온몸을 담근 채 명상을 하건 이 모든 것은 지금의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당연히 올 것이라 믿는 내일이 존재한다면, 나는 과연 인생의 선이 어디로 향하길 바라는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 역시 내 마음대로 되진 않겠지만 결국에는 그 자유로운 선이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을 향해가길 바란다. 현재의 나를 받아들이고 인생의 문제를 직시하는 용기, 모든 이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때로는 미움받고 손가락질받더라도 내가 바라는 가치를 존중하는 용기가 그 길에 힘을 보태어 줄 것이다.

 내가 요구할 것은 당당히 요구하되, 내가 원하는 만큼 상응되지 않더라도 의연히 내 길을 가고 싶다. 내가 잃은 것보다 내게 남은 것을 소중히 세어보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고민하는 삶을 살 것이다. 인생은 소중하고, 나는 더욱더 소중하다. 이혼을 한다 해서 '사랑'이라는 가치가 내게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도 사랑할 것들이 너무나 많고, 오히려 그것들에 몰두할 용기가 더 필요함을 되뇌며 오늘 하루의 점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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