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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야 Jun 24. 2023

비밀은 없어

결코 감춰지지 않을 이혼의 전말


 '독서'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고 먼 그나 그의 가족이 내 글을 읽을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만약 그들이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어떤 얼굴일지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내 글의 주제는 이혼이지만 사실 아주 개인적인 감정의 흐름과 심리적 재활 과정을 기록한 에세이이며, 알게 모르게 부끄러운 각자의 치부가 글 곳곳에 드러난 내용증명이기도 하다. 익명으로 만천하에 공개한 너와 나와 우리의 이야기를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그의 답변서 때문인데, 조정기일이 다 되도록 그는 쥐 죽은 듯 가만히 있다가 조정일 바로 전 날, 5시가 넘어서야 나를 부들부들 떨게 한 답변서를 제출했다. 당연히 인정할리 만무했지만 '부정행위'라는 단어는 아예 기재조차 하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일관하는 그 글을 보다 보니, 방귀 뀐 놈이 성내다 못해 똥까지 싼 느낌이었다.

 이따위 답변을 받은 당시에는 분노와 허무함에 치를 떨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미 그는 그 단어를 답변서에서 제외함으로써 스스로의 유책을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말 결백하다면 나를 모욕죄로 기소를 하건, 명예훼손을 들고 나오던, 증거를 대라며 난동을 부렸을 만큼 구체적으로 기재한 유흥업소와 성매매 사건들에 대해 '그런 적 없다'라는 그 한 발뺌조차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평소의 그면 구구절절 반박하고도 남았을 텐데 사실이 현실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어떻게든 수면 아래로 감춰버렸다.


 갑자기 '더 글로리'의 문동은 대사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하나도 안 변해서, 그대로여서 정말 고마워". 만약 그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면 내가 이렇게 그와 그 가족에 대해 나불나불 글을 써재끼는 것에 약간 미안할 뻔했다.


사소할수록 더 생각나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내 브런치 글을 공개했다. 오히려 가까운 사람일수록 공개하는 것이 더 어다. 아무리 나를 잘 알 아는 사람이어도 아주 내면의 속 이야기_지질할 정도로 슬퍼한 것이라던가, 오락가락하는 감정상태 등_을 내 보이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혹여나 내 상황에 부담을 가질까 봐 조심스럽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쓸데없이 동정하지 않고, 오히려 내 마음을 그대로 읽어주며 적극적인 피드백을 주고 있으니 용기 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 글이 관계나 개인의 심리에 대한 고찰을 하는 것이다 보니 결혼여부와 관계없이 각자 다른 부분에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가족'이라는 명목 하에 용서되는 집착이나 비뚤어진 애착 등이 그러하다. 이전 글에 써 내려갔던 몇 가지 사건들을 통해 그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집착과 그 영향력에 대해 언급했는데, 관계의 형태가 달라도 비슷한 문제가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것임을 새삼 배우는 중이다.


 심리적 충격, 특히 외도나 가족 내의 착취적 관계에서 비롯된 문제는 그 후유증이 꽤나 오래가는 것 같다. 내 경우에는 PTSD를 걱정할 정도로 길거리에 널리고 깔린 유흥주점 간판만 봐도 속이 안 좋았고, 무례하고 우악스러운 사람을 마주치면 그 어머니가 떠오르면서 치밀어 오르는 경멸감과 분노에 시달렸다.

 큰 사건이 아니어도 잔잔바리로 장기간 나를 건드렸던 것들이 스멀스멀 생각나는 것은 더 고역이었다. 상황에 따라 딱히 말하기 애매한 사건들에 나는 소소하게 빡쳤다. 뒤끝은 오히려 사소한 것에서 잘 발생한다.


깻잎논쟁 응용 편


 본인은 결단코 부정했지만 나는 그녀의 질투를 상당히 자주 느껴왔는데, '아들에 대한 그리움, 사랑'으로 포장한 그 모든 의도가 나는 굉장히 불편했다. 그 애매한 미소를 띠며 하는 이상한 말과 행동에 '굳이? 여기서? 지금? 왜?'라는 생각만 잔뜩 들었던 것 같다.   


 아주 많고 많은 예시 중 하나로 쌈 싸주기 문제를 들어보겠다. 다 같이 고깃집에서 밥을 먹던 중, 내가 아이를 챙기느라 제대로 먹지 못하니 그가 쌈을 싸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두어 번 그가 싸준 쌈을 받아먹자 그의 어머니는 "엄마도 좀 싸줘!"라며 그 특유의 서운한 표정을 내보였다.

 내가 아이를 챙기며 먹을 수가 없으니 싸주는 것이라며 그가 대충 넘어가자 "엄마도 좀 싸달라니까, 와이프만 챙기니?" 라며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내 입맛을 뚝 떨어뜨렸다. 잎논쟁의 응용 편이랄까. 결국 아들이 곱게 싼 쌈을 받아먹고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그녀 앞에서 나는 체할 것만 같았다.

 평범한 관계 속에서라면 '뭐 엄마가 그럴 수도 있지' 싶을 일에 나는 왜 이렇게 예민했을까? 아마  사건 이에도 내게 하는 그의 행동, 선물, 심지어 친정부모에게 그가 선물한 작은 커피잔까지 크고 작은 모든 것이 그녀의 질투를 불러일으켰고, 그 화살을 받은 것은 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웃으며 하는 '서운해'에, 나도 웃으며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대응하지 못했다. 늘 그렇듯 아들이 나무라면 '그냥 한 말이지 뭘 그렇게 받아들이냐'는 핑곗거리를 장착한 그 표정. 나는 그 표정을 너무나 자주 보아서인지 되려 얼굴이 먼저 굳었던 것 같다.

 비슷한 소소한 일들이 쌓이면 나름 정체가 분명한 스트레스가 된다. 귀청 떨어질 듯한 큰 목소리라던가, 옆에 앉은 나를 발이나 손으로 툭툭 치는 행동이라던가, 유통기한 다 되어가는 음식을 굳이 싸준다거나 하는 것들까지. 내 기준에 예의가 아닌 것들을 단지 어른이라는 이유로 '그럴 수도 있지'라 넘기기에 나는 예민보스 며느리가 되어갔다.

 친정 엄마는 단 한 번도 발로 나를 건드린 적이 없다. 아니, 어느 누구도 그러하다. 유통기한이 지나 초록색이 된 쌀을 받아본 적도 없고, 친구들 조차 나를 야! 너! 라며 우악스레 부르지 않기 때문일까. 나는 이 소소함들에 부들거렸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이렇게 사소한 것들이 점차 온도를 올려 보글보글 99 까지 끓다가 큰 사건을 마주하는 순간 바로 티핑포인트를 넘었다. 이제와 반성하자면, 펄펄 끓는 내 뜨거운 분노를 그에게 홀라당 부어버린 것은 내 잘못이 맞다. 때론 그가 불을 끄려 해도 '너도 닥쳐!' 하는 모양새로 김을 뿜어버렸으니 말이다.


 갈수록 나도 유치해졌다. 자꾸만 내 선을 넘어 들어오는 그 어머니에게 여지없이 경고를 보냈고, 때론 진짜 선의도 거절하며 가차 없이 굴었다. 그런다고 해서 기분이 좋아졌냐면,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나의 싸가지 없음에 자괴감만 들었다.

 그러니 혹시라도 이런 소소한 관계의 균열을 겪는 분들이 있다면 조심스러운 조언을 해드리고 싶다. 몰상식과 무례함에는 동공을 풀고 인자한 미소로 무시하라고 말이다. 나는 그걸 못해서 나만 더 괴로웠다.


 

감출수록 드러나는 것


  그의 어머니에게 나의 가정은 트로피 같은 존재였다. 아들과 며느리가 이름만 대면 알만한 큰 회사에 다닌다는 사실이나, 브랜드 선물 등을 '친구들에게 자랑했어'라는 말을 족히 열댓 번은 들은 것 같다.

 드러낼 것이 분명한 만큼 감추는 것도 많았다. 그녀의 직업을 그 가족이 20년간 모르는 것도 트로피 같은 직업이 아니기 아니기 때문이리라. 또한 다단계를 하는 시동생의 배우자 직업도 남이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이었다. 친척 및 지인들에게 그녀는 평범한 회사원이라 소개되었다.

 '나는 쿨하고 솔직한 사람이라~'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이 이토록 비밀이 많다는 것을 다른 이들이 정말 눈치채지 못할까? 글쎄다.


 어쨌든 그녀 때문에 나는 조기교육이나, 아이에게 올인하는 교육관에 회의적인 입장이 되었다. 그것이 사람의 '진짜 인생'에는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그들이 증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일찍이 깨닫게 해 준 것은 고맙다. 덕분에 올바른 부모의 역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아이 백일잔치 때, 유전자가 좋으니 애가 똑똑 것이라며 "한 번 작품을 만들어봐"라고 했던 말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작품이라는 것은 당연히 사회적 성공이었음은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남들의 시선 기준에서 자랑거리가 될 만한 것이건, 감추어야 할 것이건 그를 판단하는 것은 남이 아니라 그 자신이다. 내 아이의 사진을 카톡 프로필을 넘겨야만 볼 수 있는 곳에 두고는, 혹시 손주 없는 친구들이 보고 샘을 낼까 봐 그랬다고 하는 걸 봐선 이분과 나는 절대적으로 다른 기준을 갖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완벽하다 믿었던 아들의 결점을 알게 된다 해도, 그녀는 아마 숨기기에 바쁠 것이다. 인정조차 하지 않고 너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며, 자신이 믿는 것을 사실로 포장할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정말 영원히 감출 수 있을까?

 감출 수록 드러나기 쉽고, 진실이 밝혀졌을 때 더 치명적인 것들이 있다. 이 이혼의 전말이 그러할 것이다. 그 진실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알 뿐만 아니라 인성이라는 것은, 그 내재된 특질들은 어떻게든 드러나게 되어있다. 가 없다고 해서 그가 갑자기 유흥을 끊을 것도 아니고, 그 어머니의 무례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혼을 진행하며 왜 이리 세상이 불공평한 것인지 억울해 미칠 것 같았고, 특히나 사람을 보호해야 하는 법이 이토록 어쭙잖은 것에 실망했다. 결국 나는 억울함을 묻은 채 끝내 사이다 결말을 맞이하진 못하겠지만, 글을 통해서라도 한바탕 풀어내었으니 좀 낫다.

 또한 신의 시간은 인간의 것과 다르다. 우리는 그때를 아무도 모른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대가는 언젠가 그 무엇으로든 돌려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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