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 조달이 시작되었다는 변호사의 연락을 받고 그에게 마지막 편지이자 통보를 보냈다. 나는 이혼을 준비하면서 그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써 놓았었다. 매일매일 바뀌는 감정과 생각을 따라 그 글도 몇십 번을 수정했다. 세 가족의 삶이 끝나가던 그 하루하루의 감정들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었다. 수신자는 그였으나 동시에 내 마음에게 보내는 작별인사이기도 했다. 주변인들은 그런 메시지를 보내는 관심조차 아깝다 했지만 나는 이걸 보내야 끝날 것 같았다.
최종적으로 그에게 보낸 내용에는 비난은 없다. 서두에 내가 이혼 소장을 보낸 사유를 밝혔다. ‘나는 네놈이 그동안 한 일을 다 알고 있다’를 최대한 완곡하게 썼다. 그럼에도 나는 가정을 지키고 싶었고, 유흥을 끊고 가정으로 돌아오길 기다렸다는 것. 그런데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이혼을 결정하였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너를 떠난다는 것. 남편으로써, 아빠로서 그에게 고마웠던 부분은 고맙다고 썼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아이에 대한 당부로 끝냈다.
이 글을 보낸 건 그가 소장을 받기 전이어서, 그는 내가 대체 어떤 증거를 지닌지도 모른 채 우선 잡아떼었다. 이혼이고 뭐고 다 알겠는데 자신은 유흥이며 창녀들이랑 어울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서 이러는진 모르겠지만, 마치 내가 자신을 매도한다는 사실이 우습다고도 했다. 내가 ‘감히’ 소장을 날렸다는 사실에 분개한 것이 그의 마지막 메시지이다.
이 날 새벽까지 잠이 오질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반응보다 훨씬 더 최악이었다. 그가 반성하지 않을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따위 반응에 화가 치밀었고, 뻔뻔하게 잡아떼는 것에 구역질이 났다. 차라리 욕이라도 써서 보낼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내 성질머리와 싸우느라 며칠간 애를 썼다. 내면의 싸움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고3 때 이후로 이렇게 초췌해진 적은 처음인 것 같다. 며칠간 잠만 잤던 것 같다. 제대로 먹지도 않고, 대충 어슬렁 거리다 또 잤다. 그러다가 동네 도서관에서 무심코 심리학 책을 읽기 시작하며 나는 내 내면을 풀어내기 위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상상력이 많으면 그 인생 고달파!
막연히 두려워했던 헤어짐, 버림받는 기분, 아이에 대한 무책임한 행동에 대한 분노. 이 모든 것들을 한 감정 단어로 정리하면 ‘불안’ 일 것이다.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고, 불안이 현실화될까 두려운 마음에 나는 그의 부당한 대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혼 과정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한 막연한 예측은 실제보다 가혹해서 상상 속 나는 온갖 불안을 다 떠안고 희망조차 없는 힘겨운 모습이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포기한다고 한다. 나는 그 마음을 정말 충분히 차고 넘치게 이해한다.
영화 타짜에 나온 아귀의 명대사가 떠오른다. “상상력이 많으면 그 인생 고달파!”
상상력이 많은 나는 진심으로 고달프다. 생각은 생각을 낳고 꽤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상상들을 더해가기 때문이다. 그의 부정행위를 안 이후 죽을 만큼 괴로웠던 것에 이 상상력이 한몫하기도 했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에도 생각의 톱니바퀴는 쉼 없이 돌아가며 반응을 이끌어낸다.
감정 또한 마찬가지이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불쑥 올라오는 감정은 파도와 같아서 순식간에 몰아치기도, 잠잠해지기도 한다. 감정의 민감성이 높을수록 이 파도의 고저는 더욱 심한 것 같다. 특히 힘들었던 기억이 올라올 때 이 민감성의 파도가 최대치로 치솟는다. 생각이 미래에 대한 걱정을 주로 담당한다면 감정은 주로 지나간 과거를 곱씹고 상처를 리마인드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 같다.
생각은 그 특성상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무게가 쏠려있다고 한다. 사실 이는 인간의 특성이기도 하다. 특히나 불투명한 미래에 관한 것에는 긍정보다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견해들이 다양한 형태로 밀려온다.
나의 경우에는 지난 관계의 악습들이 앞으로의 이혼과정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두려움이 올라왔다. 공격적으로 나오면 어쩌지, 일부러 나를 괴롭히려고 협의를 안 해주면 어쩌지, 생각만큼 재산분할이 안되면 아이랑 어떻게 먹고살지... 등 생각과 두려움이 밀려올 때면 또다시 우울의 강으로 마음을 내던지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이 상상이 너무 구체화되었을 때는 ‘이렇게 말해야지, 저렇게 말해야지’ 하면서 대사까지 생각했다. 특히 잠들기 전에 이런 현상이 심해졌는데, 어느 날엔 너무 사실적으로 상상하는 바람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그 대사를 혼자 중얼중얼 연습한 적도 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내 생각만으로 스스로를 이 정도로 괴롭힐 수 있는 것이다.
작고 소중한 나의 위안들
생각의 허상을 알아차리고 끊어낼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멈추는 방법은 몰라 오랫동안 고통받았다. 나중엔 진짜 이러다 미쳐버릴 것 같아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다 보니 약간의 요령이 생겼다. 생각은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특정 방향으로 그 키를 돌리면 조금은 통솔할 수 있다.
생각은 기억의 녹음기나 마찬가지라,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끝없이 경우의 수를 되풀이하며 감정을 일으키고 과거를 불러내거나 미래를 걱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멈출 때 비로소 현재가 보인다.
나는 요즘에 자꾸 걱정이 밀려오면 내게 평온한 감정을 일으키는 특정 장면을 떠올린다. 나는 사실 언어보다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이 더 익숙한 사람이라 내게는 이 방법이 확실하다. 매일 걷는 산책길의 한 장면이나, 상추밭, 길가에 피어있는 꽃 무더기, 동네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빛 등. 내가 위로를 받았던 구체적인 장면을 떠올리면 생각이 끝없이 뻗어나가는 것을 차단하는데 도움이 된다.
일상의 소소한 장면들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엄청 소소한 것들이 위안을 준다. 시골생활의 장점이기도 한데, 자극적인 시청각 요소가 없으니 사소한 것들을 꼼꼼히 살펴보게 된다. 창문 앞의 버찌나무나 동네 고양이들, 어제보다 한 뼘은 더 자란 옥수수나무, 이웃집 아저씨가 준 상추, 산책길에 처음 본 꽃, 초록색 강이 된 논 밭... 단조로운 시골 생활에서 발견한 작고 소중한 위안들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겪어본 사람만 알 것이다.
이러한 일상의 작은 위안들을 하나하나 더 깊게 바라보게 한 책이 있다. 안셀름 그륀의 <위안이 된다는 것, 황미하 옮김, 2022>에는 일상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것들에서 위로를 받는 구체적인 묵상들이 들어있다. 특히 내가 매 끼니를 잘 먹게 된 것에 이 책의 영향이 상당히 크다. '음식'에 대한 부분(p.167~170)에서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건강한 식사가 어떻게 내면을 일으키는지에 대해 뼈 때리는 충고를 얻으며 나는 포동포동해 지기로 결심했다.
처음 여기 왔을 때 몸무게가 42kg이었다. 키가 160 정도인데 42킬로가 되면 말 그대로 해골이다. 내가 괜히 좀비 같았다고 표현한 게 아니다. 체질상 마른 편이긴 했지만, 이 정도의 몸무게는 인생 처음이었다. 얼마나 살이 빠졌었는지 의자에도 오래 앉아있질 못했다. 엉덩이 뼈가 아팠기 때문이다.
밥을 잘 챙겨 먹기 시작하면서 얼굴도 좋아지고 기존 옷들도 벨트 없이 입을 수 있었다. 산책도 회복에 큰 몫을 했다. 일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일부러 먼 거리의 카페까지 걸어갔다. 아이와 목장에 소들을 구경하러 가거나 동네를 어슬렁 거리면서 그 길에서 작고 작은 행복들을 쌓았다.
초반에는 그 길에서 혼자 울기도 했고, 친구와 통화를 하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언젠가부터 그 횟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이젠 그 길에서 꽃을 따고, 버찌나 보리수를 따먹고, 아이와 지나가는 차들을 구경하고, 동네 사람들을 만난다.
인생에 무언가가 가면, 다른 무언가로 채워진다. 이 길에서 흙투성이가 되어 해맑게 웃던 내 아이의 모습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완벽한 타인이 되는 길
나는 사실 꽤나 논리를 따지는 피곤한 스타일이지만, 이런 삶을 살다 보니 사람이 좀 변한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지만, 큰 일을 겪고 죽을 만큼 괴로우면 살기 위해 어떻게든 변한다. 가장 큰 변화는 내가 상당히 단순해졌다는 건데, 쉽게 말해 생각하는 것 자체를 많이 포기한 상태이다. 내겐 정말로 큰 진전이다.
사실 이 방법은 나도 누군가에게 배운 것인데, 이렇게 올바른 조언을 해주는 주변인들의 도움도 있지만 내 상황 자체가 진짜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저 스스로 위로하고 매 순간 조금씩 나아짐을 느끼는 것에 충실하고 있다.
나를 바꾸는 것 이외에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가 내게 협조하게 만들 수도 없고, 용서를 빌게 할 수는 더더욱 없다. 그렇다고 돈이나 뚝딱 만들어 '재산분할이고 나발이고 먹고 떨어져' 할 상황도 아닐뿐더러, 무엇보다 나는 이 이혼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도 모른다.
단지 나는 그저 조정기일이건 면접교섭이건 그 언젠가 그를 대면해야 할 때, 최대한 완벽한 타인이 되어 평화롭게 대면하고 싶다. 어차피 내가 내 행동을 계획해 봐야 맘대로 안될 테고, 그 계획이라 봐야 내 머릿속에서 나온 거니 딱히 신선하지도 않을 것 아닌가.
그러니 차라리 상황에 거리를 두고, 마음도 생각도 멀리 둔 채 공기 보듯 하는 것이 훨씬 이롭다. 어차피 내 인생에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사람 이니깐. 나는 지금 그것을 연습하는 중이다.
뭐든 처음이 어렵다. 그 처음을 잘 해내기 위해 나를 충분히 위로하고, 내면의 평화를 채울 방법을 하루에 한 가지씩은 시도해 보며 어제보다 한 발 더 과거에서 멀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