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야 Jun 28. 2023

결혼은 둘이, 이혼은 혼자

그러나 내게 남은 또 다른 충만한 것들에 대하여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지난번 내게 엄청난 허무함과 자괴감을 선사했던 조정기일에서 대략적으로 잡은 안으로 이혼을 하기로. 물론 또 모르는 일이다. 막상 다음 조정에 그가 뒤집어엎을 수도 있으니 사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제발 이제 이쯤에서 젠틀하게 마무리되길 바랄 뿐이다.

 

 그는 지난 조정기일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끝까지 자신의 부정행위와 그 어머니의 심히 부당한 폭언에 대해 인정하지 않았다. 당연히 사과도 없었다. 그들은 절대로 사과하지 않을 것임을 진작 알고 있었고, 대략 틀이 잡힌 조정안은 내 주장에 조금은 못 미치더라도 현실적으로 꽤 괜찮은 방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고 또 억울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결혼은 둘이 했는데 마무리에 그는 없었다. 결정적인 잘못은 그가 했는데 끝에는 나 혼자였다. 내 오랜 심적 고통에 비해 한 시간도 안 되어 정해지는 그 조정안이 야속했고, 무엇보다 그의 유책 사유 단 한 단어조차 기재되지 않을 문서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상대 변호사는 어떻게든 조정으로 마무리하려고 그를 통화로 설득하려 했다. 결혼 생활 내내 그에게 의견을 피력하고 행동을 요구하던 어머니의 역할을, 이제는 그의 변호사가 하고 있었다. 조정위원도 내 쪽에 당장 현실적으로 적합해 보이는 조정안이니 되도록 그렇게 해보라고 했다. 아이가 있어 면접교섭이라는, 그 불편한 마주침이 반복되어야 할테니 서로 감정 덜 상하게 마무리하자는 취지이기도 했다.

 나는 분명 이혼을 원하고, 그 무엇보다도 나와 아이가 더 크게 상처받지 않길 바란다. 그럼에도 생각보다 쉽게 OK가 안 나왔다. 결혼은 둘이 했는데 이혼 자리에는 나만 왔다는 사실에 더 억울함이 밀려와 판단이 잘 되지 않았다.


 급작스러운 마무리 과정에서 말을 잃은 나를 내 변호사가 잠시 불러내었다.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눈물을 글썽이는 내게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하라고, 소송으로 진행해도 된다고 했다. 현실적으로 나쁘지 않은 조건이어도 내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되니, 내가 후회하지 않도록 다시 조정을 요청하여 두 가지 방안에 대해 심사숙고할 시간을 벌어보겠다고 했다. 일로써 만난, 스쳐 지나갈 의뢰인임에도 내 상황과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주려는 마음이 느껴져서 참 고마웠다.


마라맛 인생


 짧은 시간 극도의 스트레스를 겪고 눈부시게 쨍쨍한 거리로 나왔을 때, 우습게도 배가 고팠다. 마침 점심시간이었고, 근처에서 근무하는 내 이혼 과정을 잘 알고 있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었다. 나의 고민과 감정을 털어놓으며 우리는 함께 현실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미 자녀가 둘인 친구와 아직은 미혼인 친구, 그 중간 어디쯤일 곧 싱글맘인 나의 대화는 앞에 놓인 마라탕보다 더 맵고 짠 현실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친구 J도 시간을 내어 역 근처까지 마중을 나와주었다. 그녀를 만나니 괜히 긴장이 풀리며 멍한 상태가 되었다. 안전지대로 느끼는 사람을 만나면 견고하게 세워둔 외면의 내가 가라앉고 뭉실뭉실한 감정 덩어리가 튀어나온다. 우리는 근처 카페에서 차가운 음료를 마시며, 이혼 후 생각보다 근사할 나의 삶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어떠한 부탁도 하지 않았음에도 내 아이를 함께 챙겨주며 잘해주겠다는 그녀의 말에 또 TPO 못 가리고 빼꼼 내미는 눈물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어느 정도 결단을 내렸다. 괘씸한 그를 법정에 세우고 모든 증거를 들이밀고 싶었지만, 그걸 위해 1년이 훨씬 더 걸릴 소송을 진행하며 말라비틀어질 나를 생각하면 잃는 것이 더 많았다. 그깟 위자료 몇 천에, 잘못을 눈곱만치도 인정 안 하는 그에게 법적 판결로 '유책배우자' 딱지 하나 붙인다 한들, 어차피 나는 쟤랑 안 살 건데 내 에너지와 시간 쏟아 깨달음을 줄 필요도 없었다. 

 언니들이 말하던 '결혼은 신중하게, 이혼은 신속하게'가 괜히 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


 집에 돌아와 아이를 한껏 안았다. 어느새 이렇게 커서 벅차게 한 품을 차지하는 아이를 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면접교섭에 대한 조건을 고민하며 '만약 내가 비양육자라면'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한 달에 끽해야 두 번, 고작 몇 시간의 만남만을 고대하며 살아갈 그 많은 날들을 나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머지 조건이 어떠한들 아이가 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것들은 확실히 상쇄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인생이 마라맛이면 좀 어떤가. 어쨌든 알싸한 맛도 다 지나가기 마련인데. 무엇보다 나와 아이를 최우선에 두고 도와주는 가족들, 내가 힘들 때 언제든지 시간을 내어 같이 아파해주는 친구들, 나를 진심으로 위해주고 기도해 주는 많은 사람들이 내게 더 가까이 다가온다. 사실상 내 인생을 지탱하는 가장 큰 든든한 버팀목들은 늘 그 자리에서, 그들이 마음으로 나를 안전하게 둘러싸고 있다.



사랑해야 한다


 결국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사랑'이 맞다. 사랑에 상처받고 사랑을 떠나보내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이러니하지만, 나는 사랑이 떠난 자리에서 다른 사랑들을 발견하는 중이다.

 내 인생 책 중 단 하나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 (La vie devant soi) >을 말할 것이다. 20살에 처음 읽고 여태껏 열 번은 족히 읽었던 것 같다. 프랑스어로 '여생'을 뜻하기도 하는 '자기 앞의 생'은 1970년대 파리 뒷골목의 비주류 사람들의 인생과, 그 중심에서 끝없이 삶과 생의 의미를 묻는 14살 사생아 모모를 통해 인생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그 어느 누구도 당시 프랑스 사회의 주류에 속하지 못한다. 늙은 매춘부이자 같은 일을 하는 여성들의 사생아를 돌보는 로자 아줌마, 트랜스젠더, 외국인 노동자, 고아, 유태인 등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람들이 매춘부의 사생아인 모모의 삶을 충만하게 채우고 결국 그의 앞에 놓인 여생을 살아갈 힘을 부여한다. 소설의 초입에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라고 묻는다. 할아버지는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지만, 모모는 자신의 삶 속에서 그 정답을 찾게 된다.  

 이 책을 그토록 여러 번 읽었던 이유는 마지막 문장, '사랑해야 한다'를 읽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했던 이십 대에는 그저 그 알 수 없는 울림이 좋았는데, 치열한 삶을 견디며 마흔이 가까워지니 이젠 그 의미가 더 깊고 풍성하게 다가온다.


 온 마음을 다해 로자 아줌마의 죽음을 배웅하고, 다가올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모모에게서 나는 무엇을 발견하는가. 진정 인생은 이별과 상실의 연속이다. 우리는 내일을 모르고,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 단지 흘러오고 흘러가는 생(生)의 장면들을 유영하며 매 순간 살아야 할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며 삶을 이어나간다.


 이미 떠난 것들은 내게서 사랑을 완수하고 떠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내가 아무리 큰 것을 잃었다 할지언정 사랑할 대상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날은 단 하루도 없다. 그것이 내 인형이었건, 반려견이었건, 친구나 가족이었건 어쨌든 나는 늘 무언가를 사랑하고 살았음이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내 생이 의미 있고 살아갈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슬픔과 상실이 없는 인생은 허무한 것 일수도 있다. 무언가를 떠나보낼 때 겪는 아픔이 가져다주는 분명한 가르침이 있고, 그 이별을 잘 겪어낸 후 마주하는 조금 더 성숙해진 내가 있기 때문이다. 동화 속 주인공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하면 좋겠지만 항상 그 동화 속 주인공들의 그 행복 이전에는 늘 고난과 아픔, 투쟁이 전제한다는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혼 과정에서 엄청난 패배감과 좌절을 느끼며 바닥까지 곤두박질쳤을 때, 나는 인생의 제비 뽑기를 잘못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왜 나에게 이런 거지 같은 일이 생긴 건지 곱씹느라 잠도 오지 않았고, 어떻게든 자보려고 술을 마실 때면 그 자괴감이 수백만 배는 심해졌다. 남들은 평범하게 잘만 사는데 나는 그 평범한 중간치조차 못해내는 모지리처럼 느껴져 슬펐다. 이혼정보 카페에 하루에도 몇 건씩 올라오는 '애 때문에 그냥 덮고, 저 새끼는 ATM기라고 생각하고 쇼윈도로 산다'는 말에 공감하면서도, 나는 결코 그걸 참아낼 인내심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꾸역꾸역 이혼 의지를 다지며 매일을 버텼다.  


 이혼을 결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백번 천 번, 아니 수 만 번 다시 생각해도 그와의 미래는 없다. 궁상맞게 온갖 경우의 수를 상상해 보았지만 그 상상 속 나는 불행하다. 사랑하면서 미워하고, 의지하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인생일지언정 나는 그의 성매매를 덮고 살 수 없고, 앞으로 그를 의심하며 남은 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그런 삶에서의 나는 그 어떤 무언가도 사랑하지 못할 것임으로.

 또한 나는 결코 해내지 못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아이를 위해 내 삶을 희생하면서 여태껏 버텼다는 말을 하는 불행한 엄마가 될 수는 없다. 예민한 내 아이는 분명히 내 불행을 눈치챌 것임으로 핑계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정일에 그가 오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이었건, 그를 일부러 데려오지 않았다는 뉘앙스를 풍긴 그의 변호사가 무슨 의도였건간에 그날 그가 왔다면 조정안 논의는 커녕 감정만 더 상했을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굳이 마지막까지 긍정회로를 돌려보자면 결국 이혼도, 조정 합의 여부도, 내 감정이 흘러갈 방향도 모두 내게 선택지가 있었다. 그 도착지를 지난 이후에 어떤 길이 내 앞에 펼쳐질진 모르지만, 적어도 이보다 고된 길은 아닐 것이라는 안도감이 든다. 그와의 이별이 남긴 자원들을 잘 활용하여 나는 다른 사랑들을 가꿔나갈 것이다. 나는 아직도 사랑할 것들이 많고, 그것들을 충분히 사랑하는데도 삶 부족하다.


 결혼은 둘이 했지만 끝엔 나 혼자 간 게 뭐 어떠한가. 진짜 혼자인 것은 내가 아닌데.

 이만하면 나, 괜찮다.

 

 

이전 13화 이혼에 대처하는 자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