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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야 Jun 30. 2023

예민한 게 어때서

Sensitive

 

 글을 쓰는 이점 중 하나는 자기 성찰을 하게 된다는 것인데, 내 언어로 표현한 나의 감정을 다시 읽어보면 어느 정도 객관적인 시선으로 나라는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내가 사실은 꽤나 다른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한다.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될 사건을 마주하면 스스로를 자세히 돌아보게 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진 않겠지만, 나와 같이 애도와 성찰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으리라. 이혼을 겪으며 단순히 그와의 생활을 떠나 기존의 내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님을, 나는 다시 싱글이 되지만 그 전과 결코 같지는 않을 것임을 안다. 이것이 단순히 사회적으로 표기되는 이혼사실이라던가 아이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나 스스로의 내면 변화를 통해 조금 다른 사람이 된다는 의미이다.




 최근 나에 대한 위대한 발견이 하나 있으니, MBTI 테스트를 백만 번을 해봐도 늘 E(외향적)으로 규정되던 내가 알고 보면 어떤 면에서는 굉장내향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 이 부분을 아주 세세하게 느끼게 되었는데, 내가 인풋을 처리하는 방식에 있어 매우 예민하고 섬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알파벳 네 글자로 표현하기에 나는 다채롭고 복잡한 유형의 인간을 깨닫는 과정은 가치가 있다.


 나는 예민하고 민감하다. 대체로 되는 대로 살지만 어떤 부분은 까다롭다. 유교사상을 질색하면서도 꼰대스럽다. 사람들을 만나는 걸 좋아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에 더 의미를 둔다.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매우 공격적이지만 평온한 상태에서는 길가에 새로 핀 꽃 한 송이에 격하게 감동한다. 남들의 감정을 잘 읽지만 반응하기 귀찮으면 모른 척한다. 솔직한 걸 좋아하지만 한 끗 차이로 무례함을 감지한다. 사사롭게 예민하고 생각도 많지만 덕분에 내면세계가 활발하다.  


 나는 호불호가 확실하다 믿었건만 대체로 많은 상황에서 이렇기도 저렇기도 한 양면성이 고개를 든다. 알고 보면 나는 생각보다 줏대가 없는 인간이 아닐까 고민도 했고, 내가 인지하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고체계에 스스로가 피곤해졌다. 그냥 나는 이 생각 저 생각이 많은데, 단지 성질이 급해서 과감하고 빠르게 결단을 내리기 때문에 호불호가 확실해 보일 뿐이었을 수도 있다.

 더 생각해 봐야 머리 아프니 이쯤에서 좋게 마무리하자면, 나는 꽤나 까다롭지만 내외부의 모든 자극에 정성껏 반응하는 성실함도 있다고 치자.  


 일자샌드의 <센서티브(Highly Sensitive People)>에서는 나만큼이나 예민보스인 저자가 전하는 민감성의 잠재력을 발견하는 방법들을 제시한다. 나는 이 책이 꽤나 도움이 되었는데, 자칫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민감함을 어떻게 내적자원으로 활용할지에 대한 과제를 주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민감한 부분이 있다. 특정 부분에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어떤 자극을 못 견뎌하는 부분들이 있지만 나는 대체로 감정적으로 예민하다는 것에서 그 민감성이 두드러진다. 민감한 것과 내향적인 것은 다르다. 특히나 인상 깊었던, 내게 새로운 형태의 자기 인식을 가능하게 한 문장을 공유한다.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들 중에서 30퍼센트는 외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외향적이면서 민감한 사람들도 내향성에 대한 설명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남들과 매우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표현하고 인식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센서티브(Highly Sensitive People), 김유미 옮김, 2017, (P.214)>



  '민감하다, 예민하다'는 말은 사실 긍정적 의미보다는 꽤나 피곤하게 느껴지는 부정적 의미로 이해되기 쉽다. 흔히 둥글지 못하고 사사건건 브레이크를 걸거나, 감정을 자극 이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예민하다고 표현하지 않는가. 그래서인지 나는 애써 민감하지 않은 척 살며, 혼자 있는 시간에 그것을 해소해 왔던 것 같다.


 나는 사회 초년생 때부터 가끔씩 혼자 점심을 먹었는데, 오전 내내 피로한 일을 처리하고 나면 꼭 점심시간에 어딘가로 탈출을 하고 싶었다. 꼰대로운 2010년 대에 '여자군대'라 일컬어지는 분야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햇병아리 신입사원 주제에 감히 '저는 혼자 맥도널드를 먹겠습니다'라고 해맑게 점심 탈출을 통보했던 걸 생각하면 나는 원체도 자발적 아웃사이더였음이 분명하다. 뇌가 해맑았던 그 시절 나를 업어 키운 사수 언니들의 인자함이 아니었더라면 나의 사회생활은 고달팠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가끔 점심 혼밥을 했다. 일부러 멀리까지 걸어가 혼자만의 오롯한 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오후시간이 한결 나았고, 오전에 나를 화나게 했던 사람들에게도 조금은 관대해졌다.   


 점심시간 혼밥만으로도 나는 확실히 자극에 민감하고, 민감도가 높아질 때 그것을 해소할 나만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임이 설명이 된다. 그런데 왜 결혼 생활 그와의 싸움에서는 이러한 거리 두기가 안되었을까?

 결혼생활을 돌이켜보면 나나 그나 꽤나 예민한 것들끼리 스스로 예민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도 민감한 성격이다. 어쩌면 나보다 더. 단지 큰 차이점은 나는 앞에서, 그는 뒤에 가서 말하는 스타일이었다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 그는 뒤끝이 지겨울 만큼 길었고, 그의 입장에서 나는 우다다다 후련하게 쏟아붓고 자기 혼자 금방 멀쩡해지니 이런 부분이 서로의 민감함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게 된 것 같다.

 민감한 사람들에게는 분노가 더 큰 위험이 될 수 있다. 어떤 무언가와 격렬하게 싸운다는 사실에 고도로 집중하여 그 외 감정에는 무감각해지고, 내가 지금 예민하다는 사실조차 예민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예민함의 무기 '촉'


 예민함은 흔히 '촉'이라는 것으로도 설명이 된다. 아주 사사로운 다름을 느끼고 이상한 '싸함'이 순간적으로 튀어 오르는 것 말이다. 나의 촉은 그의 부정행위를 내 의식보다 먼저 눈치챘고, 현실부정과 분노 그 사이에서도 나 치밀하게 만들었다. 분노와 슬픔 등의 감정과 별개로 내 촉은 예민함이라는 부스터를 달고 순식간에 모든 증거를 찾아냈던 것이다. 그 당시 상황을 모두 알고 있던 J는 그 와중에 증거를 싹 다 긁어모은 나를 보며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다. 민감한 내면은 더 높은 수준의 각성을 가능케 하는 것이 분명하다.


 비록 이 촉 때문에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고, 거기에 과감한 결단까지 더해져 이혼이 완성되었지만 나는 예리하게 깨어있던 내 본능에 감사한다. 만약 내가 그러려니 하며 모른 채 지나쳤다면? 나는 그것이 더 억울하고 끔찍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 함께 유흥업소를 출입했던 친구들의 아내들을 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에게 사실을 밝힐지 말지를 고민했지만 그들의 '모를 권리'를 위해 그만두었다. 내겐 모르는 것이 독이어도 그들에겐 약일수도 있으므로, 무엇보다 그녀들은 말 그대로 무고한 사람들이니 내가 겪은 비참함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혹시 아는가, 그녀들도 나와 같은 무기를 지녔을지. 그렇다면 언젠가는 밝혀지게 되어있으니 내가 굳이 나설 필요도 없다. 그리고 아주 솔직히, 이제는 그러기도 귀찮다.


예민한 기질은 지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존중되어야 하는 성향이다.
 <예민함이라는 무기, 롤프 젤린, 유영미 옮김, 2018, (p.260)>


  사람의 성향이라는 것은, 그것이 범죄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이상 좋고 나쁨을 구분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보통 행복할 때는 굳이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이런 자아성찰을 하게 된 계기도 이미 내게 엿같은 일이 벌어졌기 때문인데, 더 이상 나쁠 것도 없으니 이왕이면 좋게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사실 이 예민함이라는 것은 지난 글에 썼던 회복탄력성과 반대되는 개념일 수도 있다. 유연하게 튀어 올라야 할 때 '엇?' 하며 멈칫하게 되는 원인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그저 맹목적으로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만 되뇌는 것은 내게 맞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섬세하게 상황을 돌아보고, 부서진 삶의 파편을 차근차근 주워 모으며 창의성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나의 민감성이니 나는 이것을 잘 활용해보려고 한다.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이해할 때 이 '예민함은 재능이 될 수 있다'는 심리학자 롤프 젤린의 의견 또한 나를 향한 스스로의 시선을 바꾸는데 도움이 되었다. 롤프 젤린의 저서 <예민함이라는 무기, 유영미 옮김, 2018>에서는 나처럼 고도로 예민하나 외향적인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 더 상세히 파고든다.

 나는 예민하면서도 동시에 센세이션 한 모험을 즐기는 편인데, 자극에 대한 반응이 크다 보니 때로는 과잉자극과 과소자극 사이에서 스스로의 모순성을 발견한다. 나의 예민함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이러한 부분 때문에 정체성에 혼란을 겪기도 했고, 일종의 고정관념_감정을 일관적으로 통솔해야 성인이다 등_에 부합하기 위해 훅 치고 올라오는 예민함을 애써 억압하기도 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본성의 억압은 더 큰 스트레스로 돌아오고, 때로 그 자극점들 사이에서 해결이 안 될 때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다 내려놓고 싶어질 때도 있었다.


 자신의 모순을 느끼는 정도의 감각이 있다면 남들의 모순은 더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이전 글에 몇 번 언급했던 그와 그 가족의 '이중언어'가 대표적인데, 내뱉어진 말과 다른 표정 이면의 의도와 들리지 않는 본심이 빤히 보여 그 모순적인 상황에 너무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지금에서야 '아, 나는 이런 것에 예민하니 차라리 속으로 노래나 부르자' 하겠지만 당시에는 내가 진짜 비뚤어진 인간이라 자꾸 꼬아 듣나 싶어 자책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예민함은 유전학으로도 설명이 될 수 있는 내제적 본성이며, 그렇기에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를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이로울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파악하고 존중할 때 부정적 아웃풋을 긍정적인 부분으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성향 탓에 고통을 더 강하게 받아들였지만, 조금씩 회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얻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 고통이 컸던 만큼 소소한 상황에서 더 크게 만족감을 느끼게 되었고, 유익하고 풍부한 내면 성찰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고, 세밀한 감정을 글로 풀어내며 인생의 항로를 바꾸는 중이기도 하다.



나는 당신보다 조금 더 민감하고 예리할 뿐


 그러니 나는 내 예민한 부분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있는 경함과 통찰을 가능하게 한 나만의 존재 방식이라고 새롭게 정의해 본다. 나는 단지 누군가보다 조금 더 민감하고 예리할 뿐이다. 이를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까탈 맞은 인간이 되느냐, 혹은 섬세한 인간이 되느냐가 결정되는 것이다.


 민감성이 높으면 오히려 적극적인 감정 교류가 가능하기 때문에 밀도 있는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20대까지만 해도 마당발처럼 여기저기 인간관계를 맺었는데, 굳이 정의하자면 친구보다는 그냥 지인_아는 사람_이라고 칭해야 할 사이가 훨씬 많았다. 관계의 깊이가 다르다는 뜻이다. 소모적인 인간관계에 심한 피로감을 느끼며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주변이 정리되더니 이제는 정말 '나 다운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좁고 깊은 관계들이 남았다.

 내 가까운 친구들은 서로의 성향을 최대한 존중한다.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어느 누군가가 세세한 감정을 솔직하게 개방할 때, 서로의 민감한 부분을 조심스레 포용하고 위로해 주며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비록 이런 사이가 아무 하고나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관계가 성립된다면 몇천만 명의 깊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보다 비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들이 가진 보석 같은 잠재력일 수 있다. 그러니 이제는 '예민한 게 좀 어때서'라고 당당히 말하고, 그 강점을 발전시키는데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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