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도 적당히 오고 바람도 세지 않아 불 붙이기엔 제격인 날이었다. 한 번에 잘 태울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차근차근 불을 붙였다.
잿더미가 되어가는 앨범을 보며 이상하게 슬프거나 화가 나지 않은 것을 보니 나도 어느 정도 괜찮아진 것 같다. 그저 선명하게 활활 올라오는 불꽃이 멋지다는 생각을 하며 가만히 불을 바라보다 보니 왠지 모를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그냥 쓰레기통에 버렸다면 찝찝했을 그 무언가까지 회색 가루가 되도록 오랫동안 불 앞에 머물렀다.
붉은색 앨범 커버에 금박으로 찍힌 'bittersweet'. 나는 끝까지 앨범을 다시 열어보진 않았지만, 스튜디오에서 맘대로 정해 준 저 앨범 제목이 내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그래, 인생이란 달콤 쌉쌀하고, 좋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것이지. 인생의 단맛 쓴맛 보다 보면 진짜 어른이 되려나.
이혼을 겪으면서 내가 얼마나 센티멘털한 사람인지를 깨닫는다. 나에 대한 지인들의 피드백을 들어보면, 나라는 사람은 꽤나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지나치게 감성적인 부분이 있다고들 한다. 내가 아무리 냉정하게 포장하고 합리적으로 군다 한들 내재적인 감성은 역시나 드러나기 마련이다.
언젠가는 너무 싫었던 나의 이러한 정서적 부분이, 나이가 들면서 점점 좋아지고 친밀해지는 것 같다. 어차피 살면서 손에 쥐는 것은 한정적인데 감정이라도 차고 넘치게 풍부하니 조금 덜 억울하달까. 그것이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어쨌든 그 무엇이든 나는 내 감정을 존중하는 방법을 배워가고 있다. 인생이 끝날 때 무미건조하게 '남은 재산은 누구에게' 따위를 남길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무수히 많은 기쁨과 슬픔을 격렬하게 겪으며 풍성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회복탄력성
나라는 감정적인 인간에 대한 고찰을 하다 보면, 나의 극단성에 대해 걱정이 들기도 한다. 나는 예민한 편이고, 그래서 사소한 감정 하나 가지고도 글 한편 줄줄 써 내려갈 정도로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제라도 나의 이런 부분을 인지하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때로 감정이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 지려할 때면, 어떻게든 중심을 잡고 조금이라도 더 고상하고 우아하게 늙어가야 한다고 다짐이라도 하기 때문이다.
감정의 노예인 나는 가끔 극단적인 감정이 들면 온몸이 다 치우쳐지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특히 슬플 때 더욱 그러한데, 우울감이나 무력감이 심하게 들 때면 몸이 바닥에 척 달라붙어 엔간히 떼어지지 않는 느낌이다. 오뚝이처럼 후딱 일어서면 좋겠지만 내 마음의 추는 그렇게 쉽게 제자리로 오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런 나 자신을 다독이는데 도움이 된 글이 있는데, 고(故) 차동엽 신부님의 <행복선언, 2009>에서 소개된 히말라야삼목의 비밀에 관한 것이다.
캐나다 퀘벡의 긴 산맥은 동, 서가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라고 한다. 상대적으로 날씨가 좋은 서쪽은 여러 가지 나무들이 잘 자라는 반면, 추운 동쪽은 오직 히말라야삼목만 살고 있다. 엄청난 눈과 거센 바람에 다른 나무들은 눈의 하중을 견디지 못해 다 부러져 죽어버리지만, 히말라야삼목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휘어지는 유연성으로 그 하중을 견디고 환경에 적응해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지금이 내 인생의 폭설 기라면 나는 그 히말라야삼목처럼 버티는 수밖에 없다. 그 폭설을 내가 만들었건 세상이 만들었건 간에 어떻게든 버티려고 용쓰다 부러지는 것보다 잠시간 그 무게를 견디어 내는 것이 현명한 것 아닐까 싶다. 바닥에 닿을 만큼 휘어지면 어떠한가, 눈이 녹으면 다시 허리를 펴고 일어설 것인데.
문제는 내가 이 정도의 무게를 견디고 다시 제자리로 올라서는 유연성과 탄성이 있냐는 것이다. 어느 정도 바람에는 모든 나무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적응하지만, 막상 엄청난 폭설과 강풍을 만나면 처참히 부러지거나 때론 뿌리째 뽑혀 쓰러지기도 하니 내가 견디고 싶다고 다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히말라야삼목이 될 자질이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지금 이만큼 버티고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럴싸하긴 한데 아직 허리는커녕 팔 하나 정도 간신히 들어 올린 모양새 같다. 어차피 동쪽에서 살아남기로 마음먹은 이상 유연한 몸통과 가지를 지닌 나무가 되고 싶은데 말이다.
이는 '회복탄력성(Resilience)'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위키피디아의 지루하고 딱딱한 표현을 빌리자면, 회복탄력성은 실패나 좌절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나는 마음의 힘을 지칭한다. 사전적 풀이를 단순하게 이해하면 이를 강인하고 뚝심 있게 무조건 '나는 할 수 있다!'를 외치는 것 같지만, 사실 '탄력성'이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 심리적 리듬에 따라 오르고 내리기도 하면서 결국 그 탄성으로 내면의 어두움에서 튀어 오르는 성질을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살게 되어있어
심리학 서적에서 자주 등장하는 '회복탄력성'은 사고의 유연성을 바탕으로 현실에 대한 태도를 바꿈으로써 역경을 결실로 치환한다는 용기를 주는 이론이다. <하버드 회복탄력성 수업, 게일 가젤, 손현선 번역, 2021>에서는 이러한 내재적 힘을 얼마든지 스스로 키울 수 있다고 격려하고 세세한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
저자는 가정폭력으로 얼룩진 자신의 과거를 회복탄력성을 통해 극복하며 경험에 근거한 다양한 마음 챙김의 방법을 알려준다. 모든 방법을 다 실천하기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나는 조금씩이라도 이를 시도해보려고 한다. 그는 이론적인 이해나 실제적 훈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을 판단하는 것을 삼가고 있는 그대로 공감해 주는 것이 회복탄력성의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강조한다. 그만큼 자신의 힘듦을 인정해 주는 것 자체가 유연하게 기울어지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내 주변의 어른들은 가끔 힘든 일 앞에서 '어떻게든 살게 되어있어',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한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쉽게 말하지라고 생각했던 때도 많지만, 나보다 더 오랜 시간 이일 저일 겪으며 살아낸 경험에서 우러나는 '쿨 함'일 것이다. 나도 언젠가 내 아이에게 저런 말을 하려나. 인생은 가까이 보면 비극이어도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덧붙이며 말이다.
그런데 사실 저 고리타분함 속에 진리가 있다.인생은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것이 맞긴 맞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나쁜 일은 누구에게나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것이고, 환경도 감정도 그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또한 모든 사건의 주인공 또한 내가 아니다. 내가 모든 문제의 근원도 아닐뿐더러, 나에 대한 비난이어도 사실 원인을 잘 들여다보면 상대방의 문제에서 탓할 대상이 내가 된 것이지 내가 이유가 아닐 때가 많다. 단지 이러한 것들이 감정으로 훅 치고 들어올 때 잠깐 뇌 속의 '정지' 버튼 누른 채 이를 식별해 내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결국 bittersweet 한 인생의 맛을 얼마나 제대로 음미하는지는 내 의지에 달린 문제이다. 쓰면 단 맛 폴폴 나는 초콜릿 하나 입에 물고, 너무 달다 싶으면 쌉쌀한 아메리카노 한 잔 들이켜는 것처럼 사는 것이 인생인가 보다. 쓴 맛의 뒤끝이 강해도 그 맛이 영원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무나 쓰디써 뱉지도 삼키지도 못한 채 오랫동안 입에 머금었던 이혼 한 번 꿀꺽 삼켰으니 이번엔 혀가 마비될 정도로 아주 달고 단 스윗함이 올 차례가 아닐까 기대해 본다.
앨범 커버의 문장 하나가 여기까지 생각을 끌고 온 것을 보니 내 뇌는 오늘도 할 일을 제대로 해냈다는 생각이 든다. 심각하게 글을 쓰다가 마무리하는 시점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에 피식 웃음이 나는 것을 보면, 나란 인간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차피 생각이라는 것은 내 맘대로 멈출 수 없는 것이니 이왕이면 글 한편이라도 남기며, 이만하면 기특한 것이라고 내게 어색한 칭찬을 건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