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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wHereUs Apr 15. 2021

결혼 12년차, 우리는 서로에게 수렴되고 있다.

웹툰 <웰캄투실버라이프>를 보고

늙는 것은 추해지는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추한 모습을 보이느니 일찍 죽고싶다는 생각이 따라왔다.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하면 좋을지 열심히 궁리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 옆에 남편과 아이라는 소중한 존재가 생기면서, 나의 욕심 때문에 그들의 남은 인생에 '내가 잘 했더라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의 짐을 지워주는 건 못 할 짓이다 싶었다. 그래서 나는 “곱게 늙기 프로젝트”로 남은 인생의 목표를 바꾸었다. 


논문에서 선행연구를 수집하듯, 내가 닮고 싶은 롤모델의 모습을 찾는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하는 영화배우 윤여정씨가 나의 원탑 롤모델이다. 네이버에 즐겨보는 웹툰 <웰캄투실버라이프>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며 우리 부부의 나이든 모습을 그려보곤 한다.

이 웹툰의 가장 최근 에피소드에서는 한밤 중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꿈을 꾼 할아버지가 일어나자마자 할머니를 재촉해 부산으로 짧은 여행을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늘 미래를 위해 현재를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우리 부부도 언젠가부터는 오늘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집을 알아보며 최대한 내부공사가 필요하지 않은 곳을 고르려 했다. 막상 들어와서 보니 이곳 저곳 손 볼 곳이 눈에 띄었다. 전구가 하나 나가도 사는데 지장 없으니 시간이 있을 때까지 그냥 두라고 했던 남편이 유튜브를 보며 집 손 보는 것을 배우고, 대형 철물점을 오가며 부품을 사다가 세탁실 싱크대를 설치하고, 집 안의 모든 전등과 스위치를 교체하고, 부엌 환풍기가 연기를 잘 빨아들이지 못해 화재경보 알람이 울리자 바람이 들어오고 나가는 길을 확인해 새는 곳이 없도록 막았다. 어제 우리는 환풍구가 잘 고쳐졌는지 확인하려고 연기가 많이 나는 삼겹살과 항정살을 구워먹었다. 성공이었다.


생각해보니 2월 말 이사 온 후로 남편은 한 번도 주말 늦잠을 잔 적이 없다. 연애 할 때 토요일에 일어나서 연락한다고 해놓고 오후 3시가 넘어도 울리지 않는 전화를 보며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게 분명하다고 오해했던 내가 떠오른다. 오후 늦게 전화가 오면 퉁명스럽게 받았다. 기다린 시간에 비해, 한껏 차려입은 내 옷에 비해 데이트는 특별하지 않았다. 데이트를 밀린 숙제 해치우듯 생각하는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들었고 오랜만의 데이트가 다툼으로 마무리 되기도 했었다. 결혼 후 정말로 오후 2시가 되도록 자고 일어나는 남편을 보며 그동안 “의심”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나도 주말 늦잠에 동참했다. 과연 다음 한 주를 살아갈 에너지를 주는 귀한 휴식이었다.


이미치 출처: Unsplash

웹툰 속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재촉해 옷도 갈아입지 못한 할머니와 함께 부산행 기차에 탄 장면을 보며 할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느껴졌다. 이대로 파리에 가도 되겠다는 할아버지의 말, 이럴 줄 알았으면 보풀이 인 옷은 갈아입었을 거라고 얘기하는 할머니의 마음 모두 이해가 되었다. 준비도 좋지만 사소한 것 때문에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은 할아버지의 마음이 너무 예뻐서 살짝 눈물이 났다. 


결혼한지 십년이 넘어가는 우리는 조금씩 서로에게 수렴되고 있는 것 같다. 남편은 내가 지나가듯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내가 머무는 공간들을 조금씩 편하게 고쳐준다. 나는 남편이 공구박스를 열면 그건 그렇게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해도 된다고 말한다. 

우리의 ‘지금’이 미래의 우리가 되짚어 볼 추억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해야 하는 삶, 준비하고 참아내야 하는 삶 보다는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작은 선물 같은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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