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선기념 포스팅
외국에 나와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그리워하는 음식이 있다. 큰 도시에 대형 한인 마트도 있고, 한국 음식점도 있고, 심지어 한국 식품을 특급 배송해주는 온라인 상점들도 있지만, 어딘가 부족한 맛이라 한국 방문 시 꼭 먹고 오겠다는 음식의 리스트가 있게 마련이다. 나와 남편에겐 엄마의 양념게장이 리스트의 제일 첫머리에 올라와 있다.
우리가 한국에 간다고 하면 엄마는 아무리 바빠도 게장을 만들어 놓는다. 한 번은 귀국한 바로 다음 날 건강검진을 받기로 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내시경 검사를 받고는 채 아물지도 않은 속에 게장을 집어넣었다가 위에서 불꽃놀이 하듯 매운 기운이 퍼져서 힘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우리 둘은 좋다고 쪽쪽 소리를 내며 손가락에 냄새가 밸 때까지 게장을 먹었다.
게장을 언제 처음 먹어봤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김치나 젓갈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으니, 꽤 어린 나이에 먹어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엄마는 김포 출신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외갓집에 대한 기억이 없다.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고등학생일 때 돌아가셨고, 외할머니는 내가 태어난 뒤 얼마 후 암에 걸려 몇 년간의 투병 끝에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한다. 시부모님과 네 명의 시동생, 그리고 딸 둘까지, 열 명의 살림을 사느라 엄마는 늘 바빴다. 명절이면 큰 집이라며 숙모들이 삼촌과 함께 사촌동생들을 데리고 왔다가 서둘러 본인 친정으로 돌아갔고, 우리는 그냥 집에 있다가 고모가 오시면 고모를 맞이하곤 했다. 우리가 왜 외가에 가지 않는지 물어볼 생각조차 못 했다는 게 지금에서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때는 그저 당연한 줄 알았다.
바다가 있는 곳에서 자랐던 엄마는 어려서 밥상에 해물이 올라오지 않으면 “오늘은 먹을 것이 없네.”라고 중얼거렸다고 했다. 엄마가 구운 생선은 언제나 맛있었다. 시중에 파는 자반 생선은 너무 짜다며 직접 생물을 사다가 손질하고, 소금을 뿌려서 두었다가 구워주곤 했다. 엄마는 음력 5월이 되면 배 들어오는 날을 확인하고는 강화도 동명항 시장에 가서 살아있는 게를 사 왔다. 게장을 만드는 날이면 온 집안에 간장을 달이는 냄새와 게의 비릿한 냄새가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엄마에게 환기 좀 시키라고 잔소리를 하긴 했지만, 막상 게장을 먹을 때면 매콤한 양념이 묻은 게 껍데기 사이로 삐져나오는 살과 노란 알이 너무 맛있어서 그 정도 불편함쯤은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린데 게장을 잘도 먹는다고, 집게다리 속살까지 잘 발라서 먹는 나를 보며 엄마는 흐뭇해했다. 그렇게 매년 초여름이 되면 엄마가 만들어 준 게장을 연례행사처럼 먹곤 했다.
엄마의 흐뭇한 미소 속에 감춰진 속내를 듣게 된 건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엄마가 아빠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바다 음식을 그리워하는 엄마를 위해 외할머니가 게장을 만들어 보냈다고 한다. 게장을 상에 내놓자 내륙지방 출신인 할아버지가 날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고 했고, 아무도 게장에 손을 대지 않았다. 엄마는 그걸 혼자 먹지도 못하고 끓여서 상에 올려야 했다. 엄마는 그렇게 신선한 게장을 게국지처럼 찌개로 끓이면서 속으로 울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 자매가 자라 엄마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을 때야 엄마는 게장을 만들 수 있었고, 우리가 잘 먹는다는 핑계를 대고 매년 여름, 엄마의 추억을 되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남편이 남친이었을 때, 인사를 드린다고 우리 집에 오던 날 엄마는 게장을 내놨고, 태어나서 처음 게장을 맛본 그는 그 이후 나처럼 게장 마니아가 되었다. 내가 결혼 한 후 엄마는 사위가 좋아한다며 초여름이 되면 어김없이 동명항으로 향했다. 어느 해든가 배가 들어오는 날과 주말이 겹쳐서 남편까지 온 가족이 다 같이 동명항에 갔던 날, 엄마는 들떠서 시장에 있는 모든 해물을 다 사버릴 기세였다. 엄마를 겨우 말려서 게 20kg, 기절 낙지, 소라와 갯가재만 사서 돌아왔다. 그날 엄마는 내게 자꾸만 게를 다듬는 법을 가르쳐주려고 했다. 칫솔로 배딱지를 닦으며, 등딱지에 붙은 모래주머니를 떼어내며 나는 엄마가 늙을 준비를 하나 싶어서 어쩐지 슬퍼졌다.
엄마의 음식 솜씨는 나만 물려받은 것 같다. 음식 만들기에 크게 흥미가 없는 언니 대신 엄마가 부엌일을 할 때 엄마 옆엔 내가 있었다. 나는 무를 깍둑썰기를 해야 할지, 삐대야 할지, 가늘게 채 썰어야 할지 아는 엄마의 훌륭한 조수이자 살가운 말동무였다.
그렇게 어깨너머 음식을 배운 나는 계량을 하지 않고도, 굳이 레시피를 찾아보지 않아도 어지간한 한식은 대강 할 줄 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나는 내 생일에 엄마와 가족들을 초대해 한 상 가득 음식을 대접했다. 엄마도 내가 만든 음식을 먹으며 이만하면 됐다고, 하산해도 좋다고 말했다.
미국에 와선 일하던 대학 국제 학생센터에서 한국 음식 클래스를 몇 번 열기도 했다. 김치도, 갈비탕도, 불고기도, 김밥도, 잡채도, 다들 너무 잘 먹어서 클래스에서 만든 음식이 동이 났고, 빈손으로 돌아와 집에서 기다리던 남편과 아이에게 라면을 끓여준 적도 있다. 그래도 나는 가끔 엄마와 화상통화를 하면 엄마에게 자꾸만 음식의 비법을 묻는다. “엄마가 해준 고사리는 부들부들한데 여기서 고사리 사다가 만들면 왜 그렇게 질긴 거야?” “엄마, 갈비찜에 윤기를 내려면 뭘 넣어야 해?”
엄마는 귀찮아하면서도 늘 엄마의 비법을 하나씩 풀어놓는다. 그래도 게장만은 아직 배우고 싶지 않다. 아니, 배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엄마가 해준 게장을 먹을 때면 엄마가 나를 바라보며 짓던 흐뭇한 그 미소, 집게다리를 깨물어 먹으려는 내게 이 다친다고 하는 엄마의 잔소리가 있어야 엄마표 양념게장의 맛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것만큼은 꼭 엄마가 해준 것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