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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wHereUs May 28. 2021

용기 내어 한 한마디가 엄마와 나 사이에 가져온 변화

착한 막내딸, '우리애기'가엄마에게 처음으로 한 말

기억하는 한 나는, 어려서부터 아주 마른 편은 아니었다. 작기는 했지만 깡마른 편은 아니었던 아이였다. 2월생인 나는, 소위 빠른 82로서 88년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담임 선생님이 나를 보고 “애기가 왔네”라고 하셨고 나는 돌아서서 “작으면 어때, 공부만 잘하면 되지.”라고 했다고 한다. 


내 기억은 아니고, 엄마의 기억이다. 우리 집은 딸만 둘이다. 나는 둘째 딸이자 막내이다. 언니는 요즘 말로 K-장녀처럼 자랐다. 엄마에겐 감정을 다 받아 줄 수 있어야 하는 어른스러운 딸이어야했고, 아빠에겐 없는 아들 대신 장남 노릇을 해야 했다. 나에겐 믿음직한 언니여야만 했다. 엄마는 나를 대학교 때까지 ‘우리 애기’라고 불렀다. 언니가 그 말을 부러워하고 있었다는 걸 대학교를 졸업하고서야 알았다. 우리 자매가 싸웠을 때였나, 세 모녀가 둘러앉아 서로에 대한 불만을 쏟아낼 때, 언니는 말했다. “쟤도 다 컸는데 왜 아직 애기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애기가 아니었는데!” 엄마는 그날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지만 그 이후 가끔 언니에게 “우리 애기 일어나라.” 혹은 “우리 애기 밥 먹자”라고 말했다.


엄마는 언니를 키우며 겪은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좀 더 검증된 방식으로 나를 키웠다. 언니는 엄마에게 대들 수 있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언니의 수위가 센 말에 상처를 받은 엄마는 내가 그런 말이나 행동을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눈치가 빤한 나는 그 분위기를 뚫고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늘 엄마의 착한 막내딸이었다. 말썽을 피워 본 기억이 없다. 엄마에게 혼이 날 정도로 잘못한 “나쁜” 일은 학원에 갔다가 집에 한 시간인가 늦게 왔던 일 정도였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엄마를 부를 일은 면담할 때뿐이었다. 언니는 전학 오고 일주일 만에 반장으로 뽑힌 적도 있다. 그 이후로도 반장을 도맡아 하던 언니 덕에 피곤해진 엄마는 내게 반장은 하지 말고 부반장만 하라고 했다. 실제로도 나는 반장을 해 본 적이 없다. 부반장, 부회장, 심지어는 대학교 들어가서는 공동 과대표였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자주 언급되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이 인생에서 할 수 있는 ‘지랄’이라는 게 제한된 양이 있어 어렸을 적 얌전하던 아이는 커서 그동안 쌓인 에너지를 표출하게 되고, 어려서 말썽을 피우던 아이는 커서 오히려 얌전하게 산다는 식의 설명이다.  사고를 칠 수 없던 나는 살짝 시니컬하게 말을 해보기도 했다. 그게 똑똑한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대학교 졸업 때까지 좀 뾰족하게 말하는 것 외에 크게 반항한 적이 없었다. 국제협력단 봉사단원에 지원하고, 합격 후 엄마에게 출국 동의서를 내미는 것으로 나의 쌓여왔던 분노를 표출했다. 당시 언니는 이미 체코에서 일을 하던 중이었기에 나까지 떠나면 집에는 엄마 아빠 둘만 남게 되는 셈이었다. 출국하던 날, 나는 들떠 있었다. 한 번의 유럽 여행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오랫동안 집을 떠나는 기회였다. 출국장에 내가 들어가자 내가 더 이상 안 보일 때까지 나를 지켜보다가 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엄마는 그제야 울기 시작했다고 출국 배웅을 나왔던 봉사단원 하나가 임지 적응훈련을 하고 있던 나에게 한참이 지나서야 말해주었다.


필리핀에 간 건, 내 생애 처음 했던 선택이었다. 임지 파견 전 현지 훈련기간 동안 같은 기수 단원들과 함께 어느 작은 리조트에서 두 달 동안 살았는데, 가족 외의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건 처음이라 재미있었다. 밤이면 불 끄고 자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야식도 매일 먹을 수 있었다. 더운 나라에 있으니 점심시간은 3시간이었고, 함께 숙소에 머물며 타갈로그를 가르쳐 주던 선생님들은 정말로 점심을 먹고 방으로 들어가 시에스타를 즐겼다. 먹고 바로 눕는 게 이상해 보였는데, 해보니 오후 수업에 더 잘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두 달 만에 약 십 키로가 쪘다. 가져간 옷이 하나도 맞지 않을 정도였다. 훈련을 마치고 임지에 파견되고 나서 나는 운동과 식이를 조절해 1년 만에 겨우 원래 체중으로 돌아갔다. 


결혼 직전까지 거의 비슷한 체중을 유지했다가 신혼 때 남편에게 야식을 만들어주고 함께 먹는 재미에 다시 맛들려 3킬로쯤 쪘다. 20대의 마지막 다이어트라며 10주간 입에 들어가는 것 하나까지 다 기록하고 피트니스 클럽에 도장을 찍었다. 그렇게 희미하게 내 천자 복근을 만들었는데 어느 순간 운동을 해도 소위 ‘퍼포먼스’가 오르지 않았다. 피곤해서 그런 줄만 알았다. 윗분들을 줄줄이 모시고 다녀온 일주일의 캐나다 출장 중 넷째 날, 자려고 누웠는데 위경련과 비슷한 증상이 나타났다. 출장 중 두 시간 이상 자 본 기억이 없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돌아와서 내과에서 수액을 맞았다. 나는 그 비타민 수액을 마법의 주사라고 불렀다. 그런데 주사를 맞아도 체력이 회복되지 않았다. 일주일 후 알았다. 임신 5주 차였다. 출장 가던 시기엔 임신 3주 차쯤이었을 것 같다. 주위에서 다들 유산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아이가 엄마에게 나 여기 있으니까 좀 알아달라고 말한 거였을 거라고 말했다.


거짓말처럼 아기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입덧이 몰려왔고 16주 차까지 지속되었다. 그제야 나는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었다. 배가 나오기도 전 임부용 레깅스를 입었고, 모두들 내 배를 보고 쌍둥이 아니냐고 물었다. 출산을 하면 배가 쏙 들어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산욕기에 허리까지 크게 다쳐서 운동은커녕 몸을 일으키고 걸어 다니는 것조차 힘들었다. 출산 후 백일만에 체중은 회복되었지만, 볼록 나온, 살이 터버린 배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운동은 꾸준히 했고, 덕분에 한동안 55 사이즈를 입은 ‘이모 같은 엄마’로 살았다.


미국에 오면서 실외 러닝을 했지만, 비가 와서, 추워서, 눈이 와서, 뛰러 나갈 수 없는 날이 많아졌고, 피트니스 센터에 등록하기엔 생각보다 비싼 비용이 부담이었다. 대학 내 명상 센터에서 일하기로 한 뒤 대학 내 체육관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말에 너무나 기뻤다. 당시 한국에서는 ‘저탄고지’라 불리는 저탄수화물 고지방 다이어트가 유행이었고, 고기, 치즈, 크림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너무나 솔깃했다. 그렇게 운동과 저탄고지 식이요법을 병행한 지 6주 만에 6킬로가 빠졌다. 체중도 체중이지만 사이즈 변화가 지금껏 내가 했던 어떤 다이어트보다 커서 이건 내 인생 끝까지 가져갈, 다이어트가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이라며 기뻐했다. 


저탄고지 2년 차, 엄마와 언니, 조카가 미국으로 놀러 왔다. 늘 화상통화로만 보던 가족들과 같은 공간에 있게 되어 기뻤다. 그러나 기쁘고 반가운 마음에도 유효기간이 있다. 폭풍 같은 반가움의 순간이 지나가자 엄마의 말버릇이 거슬렸다. 엄마는 자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 살찐 사람을 보면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한 마디씩 했다. “저 사람은 숨 쉬기도 힘들겠다.” “저 사람은 어떻게 걸어 다니지?” “한국에선 맨날 살 빼려고 했는데, 여기 와서 보니 나는 살찐 것도 아니네. 맘 편히 살려면 여기서 살아야겠네.” 엄마의 지적질은 끝이 없었다. 듣기 불편하긴 했지만 나는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 말 하는 건 실례라고 엄마를 가르치려 하지도 않았고 신경질적으로 엄마의 말을 막지도 않았다. 마음 챙김의 ‘비판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연습할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마의 칼날 같은 말이 이번엔 나에게 향했다. “저탄고지해서 살 빠진 건 좋다만, 배는 왜 안 들어가니?” 움찔했다. 그래도 바지 사이즈가 두 개나 줄었는데, 다시 55 사이즈 바지 입는데 무슨 소리냐고, 엄마는 날씬한 줄 아냐고, 한동안 잠잠했던 삐딱한 내가 소환되려는 순간이었다. 입을 열어 말하면 엄마는 샐쭉하거나 삐질 테고, 나는 시간을 두고 엄마가 풀리기를 기다리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동하면 된다. 그렇게 내 머릿속 시나리오는 완성되었다. 그런데 그날은 그 뻔한 패턴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는 지금의 내 몸이 좋아. 나 살면서 한 번도 내 몸이 부끄럽지 않았던 적이 없었어. 배가 더 들어가면 좋겠지만, 나 지금 너무 행복해. 전에 다이어트해서 살 쪽 빠졌을 때보다 지금이 더 행복해.

처음이었다. 뾰족하지 않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가장 어려웠던 상대인 엄마에게 했다. 엄마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사과를 하지는 않았지만 엄마가 내게 사과를 빚졌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직 엄마에게 그날의 내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엄마의 마음에 어떤 깨달음의 순간이 있었으리라는 건 짐작할 수 있다. 그날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그날의 기억은 이불킥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날 내가 평소처럼 말했다면, 그건 엄마와 나 사이에 부메랑이 되어 다른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같이 소환되었을 거다. 그러나 내가 용기 내어 한 그 말이 엄마와 나 사이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렇게 나는, 또 한 뼘 자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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