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미움받을 용기>가 화두였을 때, "미워할 용기"조차 없던 나는 그 책을 몇번이고 읽고 아들러에 대해 깊이 공부했다.
어떤 심리학 개념도 그렇지만, 유명해지고 나면 설익은 이해에 기반해 남용/오용되는 경우가 많다. <미움받을 용기>를 인용하는 담화가, 미디어가, 진짜 '용기'를 냈어야 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뒷끝없는 척' 하는 무신경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배려없음을 포장하는 듯해 묘하게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미국에 와서 "내가 널 불편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등의 달달한 일명 sugar coated라 부르는 완곡한 표현을 입에 달고 사는 나에게 주위 사람들은 내가 아는 oo이는 사람 불편하게 만들 마지막 사람이라며 "Speak for yourself!" 라고 했다. 원래도 타인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데 예민한 정서적 감각을 가진 나라는 사람은, 게다가 눈치가 요구되는 조직생활을 약 10년간 거친 나는, 소위 'read the room(방안의 공기를 읽어낸다라고 해석하면 좋을 듯 하다)'으로 표현되는 눈치보기를 기본으로 타인의 감정 이해하기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는 용기 사이에서 늘 고민했다. 이런 고민은 나의 낮은 자존감 레벨을 직시하게 해주었다. 그저 가만히 있어야 중간이라도 가는 문화권에서 자랐던 나는 내가 뭘 원하는지 상대에게 명시적으로 말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받았다.
미국에서 했던 석사과정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과제가 있었다. 학기 말에 이 수업에 대해 돌아보는 글, 이른바 reflection paper를 써서 내야했는데, 주제가 "내가 이 수업에서 받고 싶은 점수를 적고 그 이유를 사례와 함께 제시하시오."였다. 미국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대체 이 과제가 뭘 요구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냥 A+달라고 해도 되는거냐고, 이러다가 괘씸죄로 B 받을 수 있었던 걸 C 받으면 어쩌냐고 걱정 섞인 푸념을 늘어놓았다. 교수로 일하고 있던 한 친구는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을 수평으로 맞추려는 강사의 노력이라고 했다. 제시할 사례에 대해 너 스스로 자신이 있다면, A+ 달라고 하라고, 이 과제로 인해 괘씸죄 받으면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이번에야말로 너의 목소리를 낼 기회라고, 시원하게 질러보라고 말했다.
이 조언에 힘입어 나는 내게 A+를 달라고 썼다. 내가 매 수업시간마다 손을 들고, 의견을 발표하고, 질문을 던졌던 것은, 비단 언어장벽을 넘어선 것 뿐 아니라, 내가 자란 문화적 배경에서 학습된 문화적 코드, 가만히 있어서 중간을 유지해야 했던 동양권 문화에서 여성으로서 기대받은 사회적 관습을 깬 것이었다는 걸 3가지 이유 중 가장 크게 강조했다. 이때 사용한 표현이 'out of comfort zone'이었고, 나는 이 수업에서 A-를 받았다. 비록 A+는 아니었지만 석사과정 입학 후 들은 첫 대면 수업이었고 세미나 토론 수업이었기에, A-도 내게는 상당히 큰 성과였다.
그렇게 나는 '용기'를 내는 것이 내 생각처럼 내게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고,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 주는 것을 경험했다. 이후 그 경험을 강화시켜 주는 비슷한 경험들이 쌓여서, 누군가를 만날 때, 무조건 "도와주세요"가 아니라, 뭘 원하는지 명시적이고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을 조금씩 배워갔다.
어린아이의 언어습득 발달단계를 보면 필수적으로 언급되는 과잉규칙화(overregularization)라는 개념이 있다. 생각해보면, 내가 낸 용기의 말이 누군가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을텐데, 그걸 간혹 놓치곤 한다. 특히나 물리적, 시간적 제약이 있을때는 더더군다나. 어떻게든 회의가 끝나기 전 하고 싶었던 말을 해야만했다. 안 그러면 그 기회가 언제 찾아올지, 아니 영엉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용기를 언제 어떻게 내야하는지를 나는 아직 마스터하지 못했다. 다만, 용기 내어 한 말에 누군가 부담을 느끼는 것을 목격하거나 입밖으로 나온 말이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해섣괴어가는 것을 느끼면 나는 바로 사과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미움받을 용기'는 없지만 잘못했다고 느낄 때 '사과할 수 있는 용기' 정도는 탑재한 것 같다.
명상가 루스 킹은 자신의 강연에서 늘 'Not there yet'이라는 말을 강조하곤 한다. 아직, 내게는 갈 길이 더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