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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wHereUs Apr 15. 2021

마음의 병을 인식하는 방법, '알아차림'

교보 참사람 에세이 공모전 입선

갑자기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내가 일하는 버지니아 대학에서 ‘인종주의 새롭게 보기- 내면에서 밖으로’라는 강연을 하기로 한 <Mindful of Race>의 저자인 명상가 루스 킹(Ruth King)이 나에게만 메일을 따로 보내 미국 대학에서 일하는 한국인으로서 강연에서 특별히 기대하는게 있는지를 물으며 강연 준비에 참고하고 싶다고 했다. 

대학 내 명상 센터에서 4년 동안 크고 작은 행사 주관을 했지만 이런 질문을 받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늘 커튼 뒤에서 그림자처럼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누군가 나의 생각을 물어봐준다니, 참 고마운 일이었다.  



살짝 떨렸다. 미국에서 소위 마이너리티라 불리는 아시안 여성으로 살아가며, 일하며 느꼈던 수많은 좌절의 순간들을 떠올렸다.  우리 센터 명상 프로그램의 장소와 시간에 대한 문의 전화에 답변하던 중, 불현듯 “영어를 꽤 잘하네요!” 라고 하던 수화기 너머의 그 상냥한 목소리에 받았던 상처, 시스템 오류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짧은 영어를 탓하던 이메일 속 사람들이 머리에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내가 겪은 이러한 경험들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총을 맞는 흑인들의 경험에 비하면 별 것 아니었고, 그래서 힘들다고 말하기에도 어쩐지 부족한 것이었다. 루스의 물음은, 누군가 내게 너도 힘들었지 않냐고 물어봐주는 것 같아서, 그 힘듦을 이해한다고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느낌이었다. 답장 버튼을 누르고 아무리 노력해도 이 사회에 영원히 섞일 수 없을 것 같은 소외감, 소위 ‘모델 마이너리티’라는 동양인에 대한 정형화된 이미지의 갑갑함을 적어내려갔다. 강연을 통해 내가, 혹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사람들이 불편한 경험들을 어떻게하면 덜 힘들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나아가 이 세상을 어떻게하면 좀 덜 힘든 곳으로 만들 수 있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Ruth도 내게 답장을 보냈다. 메시지는 간결했지만 나의 마음을 울렸다. 


“진심어린 답장을 보내줘서 고마워요.
여전히 진행중인, 은밀하고 미묘한 차별의 경험은 우리 삶을 엉망으로 만들죠.

이번 강연에서 우리가 접하는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바라보는 시각을 바꿈으로서 어떻게하면 덜 괴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작은 깨달음을 얻어갈 수 있길 바랍니다.

이런 시각의 변화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무시와 멸시를 멈출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좀 더 깊은 이해를 하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얼굴 보고 얘기할 수 있는 날이 기다려지네요.  

행사를 주최하는 입장으로서 유명한 인사들의 소위 커튼 뒤 대기실 모드를 관찰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세상을 향한 따뜻한 메시지를 던지고, 강연을 마치고서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내려오는 사람들을 볼 때면 회의감이 들 때가 많다. 몇 번에 걸친 이메일에도 불구하고 확인이 필요한 사항에 대한 언급이 없다가 행사 당일에 나타나 갑자기 무리한 요구를 하고,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돌발상황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기도 한다. ‘유명해지면 다 저런가보다’라는 생각을 갖고 일하던 나에게 루스의 메시지는 큰 울림을 주었다. 어딜 가든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채운 사람들이 어떤 얘기를 듣고 싶어할지 궁금해하고, 그 궁금증을 채워주려는 강연자라니, 강연을 시작하기도 전에 내 마음이 힐링되는 느낌이었다. 

예고없이 눈이 내린 그 날, 걱정과는 달리 강연장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200여개의 좌석을 빼곡이 채우고 자리가 없어 통로에도, 강연장 뒤편에도, 그녀의 강의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가득찼다. 그녀는 이런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내가 당신에게 속하지 않았다면, 나는 여기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속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이 자리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의 해방감은 나의 해방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과 나의 마음은 오랜 친구와도 같습니다.” 


강연장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서로를 향해 조금씩 열려가는 듯했다. 인종주의처럼 민감한 주제를 다룬 강연은 강연 내용도 중요하지만 누구하나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끌고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청중은 다양한 인종,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고 여기에 따른 각기 다른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강연 중 무심코 던지는 배려 없는 단어 선택이나 표정, 질문을 대하는 태도 등이 마음의 위안을 얻으러 온 강의에서 도리어 상처를 입고 돌아가게 만들 수도 있다. 루스는 인종주의는 마음의 병이라고 했다. 그러나 치료가 가능한 병이라고 덧붙였다. 우리 마음의 습관이 만들어내는 잘못된 인식이 이 병의 시작이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이른바 ‘알아차림’이 이 병을 치료하는 가장 첫 단계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어서 ‘알아차림’의 과정에 관련된 자신의 일화를 소개했다. 

버지니아 대학이 위치한 샬로츠빌(Charlottesville)에는 배럭스(Barracks) 쇼핑센터가 있다. 루스는 샬로츠빌에 처음 강연을 오던 날, 이 쇼핑 센터 팻말을 보며 버락 오바마(Barack Obama)를 떠올렸고, 미국 최초 흑인 대통령을 기념한 센터를 지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라 차를 운전해주던 강연 주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샬로츠빌은 꽤나 진보적인 도시군요!
버락의 이름을 딴 쇼핑센터라니 너무 멋져요! 


주최자는 어색한 미소를 띈 얼굴로 버락(Barack)과 배럭스(Barracks)의 차이를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만약 루스가 강연주최자에게 본인의 벅찬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자신의 오해를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우리 안에 갇혀 있을 때, 그것은 머릿속에서 절대적인 옳음으로 굳어진다. 이것을 타인과 나누는 과정에서, 우리 인식의 왜곡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러한 알아차림의 과정은 분명 내 마음에 묘한 불편함을 가져오지만, 반복되는 알아차림을 연습함으로서 우리는 비로소 나와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내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면, 얼굴을 찌푸릴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고, 머릿속에서 그와 손을 갑은 자신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두 시간 남짓한 강연을 들으며 내가 차별이라고 느꼈던 순간들을 다시 떠올려봤다. 내 마음의 벽을 넘어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굴지 떠올려봤다. 


마음을 울리는 강연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전달되어야하는지 루스를 통해 배웠다. 준비된 메시지를 녹음기처럼 쏟아내기보다는, 그 시간,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궁금해할지를 알아보는 노력이 우선이다. 메시지가 조금 더 마음에 깊이 와닿을 수 있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자세도 필요하다. 무대를 만드는 사람들 모두가 존중받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말과 태도까지 갖췄다면, 그 강연은 누군가의 삶을 채우는 계기가 될 것이다. 


강연이 끝나고 루스가 나를 불렀다. 강연 준비를 꼼꼼하게 해줘서 고맙다며 내게 작은 선물 꾸러미를 내밀었다. 작은 팔찌였다. 거기에는 ‘아직은 모자라지만(Not there yet)’이라는 문구가 새겨져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늘 제자리인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그래서 마음이 지칠 때 이 팔찌를 보면서 다시 나아갈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내게 그 팔찌를 건네주었다. 


2월 말이던가, 글쓰기 모임을 통해 교보 참사람에세이 공모전에 대해 알게 되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제출했던 나의 첫 공모전 응모 글. 3월 말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공모전 사이트에 들어가보았다. 오늘 이 글이 입선했다는 걸 확인하고는 정말 가슴이 벅찼다. 영화 <미나리> 감상평이 오마이 뉴스에 실렸을 때보다 더 기뻤다. 이런 게 글을 쓸 수 있게 해주는 힘이구나 싶었다. 


나의 글쓰기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었다. 이들에게 좋은 읽을 거리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라도, 계속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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