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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wHereUs Jun 08. 2021

이름의 의미

'지금', '여기', '우리'

달라이 라마 펠로우십(Dalai Lama Fellowship) 프로그램 참여자들이 우리 대학에 방문해서 워크숍을 할 때의 일이다. 아프리카에서 온 크리스챤이라는 친구가 내게 물어봤다. 한국 사람은 이름 한 음절마다 뜻이 있다는데, 네 이름의 의미는 뭐냐고 했다. 나는 어쩐지 슬퍼졌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줘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내 이름은 진영, 참 진(眞) 자에 길 영(永) 자를 쓴다. 중학교 때 한문 선생님은 내 이름을 보고 이건 이름에 들어가는 한자가 아니라고 했다. 나는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영문을 물었다.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그건 네 막내 삼촌 때문이라고 말했다. 엄마에 따르면, 내 출생신고를 해야 할 때 아빠는 출근하고 없었고, 대학교에 다니는 나머지 삼촌들은 공부를 하느라 바빴다. 엄마는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넷과 우리 둘, 이렇게 열 사람이 사는 집 살림을 하느라 너무 힘들어서 당시 중학교에 다니던 막내 삼촌에게 출생신고를 부탁했다고 한다. 동사무소에 간 막내 삼촌이 출생신고서를 작성하다가 엄마가 알려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아는 글자를 조합해서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엄마에게 그래서 엄마가 지었던 내 원래 이름이 뭐였냐고 물었다. 


엄마는 말을 돌리며 쓸데없는 소리 말고 공부나 하라고 했다. 이전부터 우리 집 돌림자는 ‘선’이라고 했는데, 내 이름에는 왜 돌림자를 쓰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속 시원하게 대답해주지 않는 엄마가 야속했다. 내 원래 이름이 바로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게, 엄마도 기억할 수 없어서 그런게 아닐까 생각하다가, 아무도 내 존재를 반가워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져 슬펐지만,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그냥 넘어갔다. 


그 뒤로도 몇 번쯤 내 이름의 진짜 의미를 찾으려 엄마에게 질문을 해보았는데, 대강의 스토리는 비슷했지만 엄마에게 내 진짜 이름에 대해 들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기억이 나지 않는건지, 아니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걸 자꾸 묻는건지를 고민하다가 어느 순간 나는 더 이상 그 질문을 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름에 얽힌 한자의 뜻을 설명할 때면, 내가 '참된' 삶을 '길게' 가져가고 싶은 사람이라고 설명할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아이디는 ‘zoobymuseum’이었다. 좋아했던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을 따서 지었는데 지금 그 영화에 대해 기억나는 건 두 주인공뿐이다. 어디선가 서사구조가 지금 보기에는 폭력적인 구석이 있다고 해서, 아마도 다시 이 아이디를 사용할 것 같지는 않다. 그다음으로 사용했던 아이디는 ‘lauterbrunen’이었다. 유럽여행 당시 너무 예뻐서 살고 싶었던, 동화 같은 스위스 알프스의 한 마을 이름이 ‘맑은 호수’라는 뜻을 가진 Lauterbrunnen이었는데, 당시 사용하던 인터넷 사이트에서 12자로 아이디를 한정하는 바람에 n을 하나 줄여서 사용했다. 간혹 업무관계로 메일을 주고받을 때, 이곳을 아는 사람들이 한 마디씩 하곤 했다. “스위스에 살다 오셨나 봐요?” 그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게 어쩐지 쑥스러워서 결국엔 그냥 내 이름을 사용해서 아이디를 만들었다. 


마음 챙김을 삶에 가져오고 나서 내게 중요해진 세 단어가 있다. 거창하게 필명을 짓지는 않았지만, 여러 커뮤니티에서 나는 now, here, us를 합쳐 '나우히어스'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이다. 


지금, 여기, 우리, 이건 내가 좋아하는 가수 젝스키스의 ‘세 단어’에 나오는 단어들이기도 하지만, 내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싶은 대상을 지칭하기도 한다. 마음 챙김에서는 바꿀 수 없는 과거에 얽매이거나,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걱정하느라 지금 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삶을 살 것을 당부한다. 이때 가장 많이 드는 비유는 우리가 삶을 살 때 ‘라이브’가 아닌’ 리허설’처럼 산다는 것인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 중 대부분은 삶을 ‘리허설’이 끝난 직후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가 싶다. 우리가 과거에 경험했던 실수나 실패의 경험이 마음속에 남아 비슷한 상황을 마주할 때면 그때의 실수와 관련된 경험이 마치 엉킨 실타래처럼 딸려 올라오게 된다.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우면 알고 있는 대사도 더듬게 되고 다음 장면에 어떤 동작을 해야 하는지 조차 잊게 만드는 것 같다. 그렇게 그날의 순간은 다시 리허설의 한 장면처럼 마음의 다른 한 구석에 자리 잡게 되고, 이런 경험이 쌓이면 실수를 저지를까 두려워서 입이 떨어지지 않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현재에 머무를 것을 강조하기 위해 '과거에 매여 살면 불행하고, 미래만 바라보면 불안해진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은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뜨고는 마음이 회사에 가 있는 경우가 많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복잡할수록 그렇다. 어떤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가득 찬 채로 하는 행동들은 우리를 실수로 이끌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막상 그 일에 대해 고민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 정신적 에너지를 미리 끌어다 쓰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일에 집중할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 


나우히어스의 마지막 단어 ‘어스’는 내가 나라는 세상에만 갇혀 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많은 경우 자신을 돌보는 일은 이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세상의 많은 자극들에서 한걸음 떨어져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된 삶을 만드는 것이라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나’를 돌보는 일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함께 사는 삶을 가꾸는 일의 첫 발걸음이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고민하고 싶다. 오늘의 짧은 글이 함께하는 우리의 시간에 잠시나마 도움이 되는 쉼표 같은 순간으로 다가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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