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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영 Aug 01. 2021

왜 필요한 것만 없는 걸까?

쇼핑 욕구 극복 일지 : 11일 차

모처럼 아침에 바람이 불었다. 도시에 비해 비교적 덜 더운 편이지만 기후위기는 시골에도 들이닥쳐 서늘하던 밤과 아침의 공기를 빼앗아 갔다. 자고 일어나자마자 창을 열고 맡던 상쾌한 나무 냄새가 사라진 지 한 달 여. 태양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 차분하게 불던 바람이 그리웠는데 오늘 아침 아주 살짝 그 바람의 전령 정도 되는 세기로 바람이 불었다. 


오늘 아침 산책에는 멋을 좀 내봐야지.


매일 나갈 일 없는 프리랜서가 코로나를 만나 더더욱 사람 만날 일이 없어지는 바람에 더 대충 입고 살았었다. 누굴 보여준다고 뻗쳐 입고 나가라는 생각에 대충 꿰어 입고 산책을 다녔는데 날이 더우니 대충에 대충을 곱한 정도의 차림으로 집을 나섰었다. 주머니가 뜯어졌지만 몇 년째 그만한 길이와 컬러를 찾을 수 없는 반바지에 깔 별로 쟁여 놓은 오천 원 짜리 민소매 티를 돌려 입기를 십 수일. 


바람도 불었겠다 일요일이겠다 오늘은 멋을 좀 내볼까 하고 자딕앤볼테르에서 오래전에 산 질 좋은 면으로 만든 롱스커트를 입고 나니 걸칠만한 상의가 없다. 가슴에서부터 일자로 툭 떨어지는 자연스러운 면 스커트에 어울릴만한 상의라. 일단 길이는 짧아야 하고 아랫 통이 넉넉해야 좀 더 어려 보이겠고 컬러는 베이지나 그레이 계열이면 좋겠는데. 같은 면 소재면 좀 재미가 없으니 리넨이나 아사 소재 혹은 까슬한 여름 니트 소재도 괜찮을 것 같고. 제일 좋은 건 크랍 길이의 어깨가 강조된 여름 재킷일 것 같은데... 다 없다. 저 중에 하나라도 있어야 미리 픽해둔 스커트를 입을 텐데 정말 없다. 어쩌자고 그중에 하나도 없는가, 미리 구비해두지 못한 나를 꾸짖으며 옷장을 열었다 닫았다 열었다 닫았다.


아무래도 베이지나 베이지가 한 방울 정도 들어간 그레이 컬러의 티셔츠를 사야겠어. 길이가 짧고 통이 크면 좋겠고, 라는 생각을 하며 의류 사이트에 들어가 구매 버튼을 누르기 전에 가까스로 지금 나의 본분을 깨달았다. 나는 옷을 사지 않기로 한 사람이다! 그렇다아아! 


나는 다시 차분하게 옷장을 열었다. 반팔티셔츠들이 보였다. 아주 짧은 것 짧은 것 적당한 것 긴 것, 프린트가 있는 것과 무지까지. 색깔별 종류별 수십 벌의 티셔츠들과 눈이 마주쳤다. 


휴... 

없긴 왜 없어, 잘 찾으면 있겠지.


체념 섞인 혼잣말을 되뇌고 딱 어울리는 상의를 찾느라 시간이 지체됐다. 강아지들이 너무 쪼여대서 아무거나 골라 잡았는데, 딱 원하던 컬러의 티셔츠였다. 베이지가 한 방울 들어간 그레이 컬러의 티셔츠. 하지만 안타깝게 길이가 너무 길었다. 그 스커트에는 짧은 크랍 기장이 어울리는데 말이지. 


결국 나는 어제도 입었던 주머니가 뜯어졌지만 딱 적당한 길이의 반바지로 갈아입었다. 그 바지는 어떤 컬러 어떤 길이의 티셔츠도 어울렸다. 멋을 낼 수는 없었지만 괜찮았다. 나는 오늘도 잘 참고 옷을 사지 않았는 걸? 그거면 됐다.  



*사진을 찾다 보니, 그 스커트를 핫핑크 민소매에 곁들여 잘도 입었었다. 핫핑크 민소매도 아직 가지고 있다. 내일은 저렇게 입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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