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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 VS 안전

치안국가라고 안전국가라 할 수 있을까?

3년 전부터 참여하고 있는 ‘연대와 협력’이란 주제의 워크보트 모임에 새롭게 합류한 젊은 동료가 6개월 여 만에 따뜻한 감정을 처음으로 느껴본다고 말했다. 그는 기존 멤버들과 일면식 없이 SNS를 통해 참여하게 되었는데 타인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고 마음을 써줘 우리의 모임이 자기 자신을 오랜만에 솔직하게 드러내도 되는 ‘안전한 시공간’이었다고 말했다. ‘안전하다’는 말이 새롭게 다가왔다.

‘안전’은 ‘위험’의 반대말이니만큼 위험한 현실이 성큼 다가왔다.     

흔히 우리나라를 밤늦은 시간이나 새벽에 혼자 다녀도 괜찮을 정도의 치안이 잘되어 있는 나라라고 자랑하지만 치안이 잘되어 있다고 과연 안전한 나라일까?

안전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안전한 나라, 안전한 사회는 무엇일까?



‘치안’(治安)이란 사전적으로 국가에 의한 통치가 안정적으로 실행되고 있는 거라면 ‘안전’(安全)이란 위험이 없어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위험이란 무엇일까?

물리적인 노동환경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산업재해를 막기 위해 작동하고 있는 중대재해처벌법 안의 위험스런 환경,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요소 말고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저해하는 위험요소는 일상 곳곳에, 사람들의 인식 저변에 만연해 있다.

불평등과 편견, 불공정, 나와 다른 것에 대한 혐오, 갑질, 노동착취 등을 비롯하여 인구의 41.6% 나 되는 1인 가구의 고립, 외로움 등 정서적인 ‘위험’, 그리고 정책 아젠다인 기후변화, 인구절벽 및 지역 소멸, 그리고 우리가 요즘체감하고 있는 고물가라는 민생의 위험까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최근에 외로움에 대한 위험요소를 연구한 ‘외로움의 습격’(김만권 저)이 출간됐다.

저자는 현대인들 경우, 디지털경제로 인한 양극화의 심화, 빅 데이터나 인공지능 등에 의한 편견, 그리고 능력주의로 인해 모두 홀로 남겨져 외로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는 불평등의 해소와 함께 경청자를 새로운 직업군으로 경청자를 양성하는 서로 돌봄 사회시스템을 제안한다. 복지가 강조되면서 사회복지사가 등장하고 문화예술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문화예술사라는 직업군이 생겨나고,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요양보호사라는 직업군이 나타났듯이 AI 등장 및 기술 변화환경으로 사람 자체가 ‘뿌리 뽑힘’과 쓸모없음‘이란 위험에 처한 만큼 사람들의 살기 어려움을 듣기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서 경청자가 강조된다.



 OECD국가 중 자살율이 1위인 위험한 나라에서 안전한 나라로 만들기 위한 사회시스템으로 경청자가 절실하다는 나의 고민 주파수가 알고리즘이 되었는지 어느 날 플랫폼엘에서 열리고 있는 사진작가 천경우의 ‘경청자들 Listener’이라는 전시(3.23-6.23)까지 가게 되었다.

전시장 2층에 오르면 인도 고아지방의 숲 속 나무들에게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어린이 합창단 친구들이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몽상적인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그냥 보면 정글 속 한 사람의 아름다운 뒷모습처럼 보이지만, 배경을 알고 보면 울창한 숲 속 나무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도 하고 동네 아이들이 속삭이듯, 읊조리듯 노래를 부르고 있는 숭고한 장면이다.

나무가 소년소녀들의 노래를 듣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숲의 소리를 들으며 노래부르는 어린이의 실루엣을 찍은 사진 속 뒷모습은 경청하는 자의 태도 같기도 하고 사진 속  신비로운 색감은 온 감각이 활짝 열리는 포용의 톤으로 전달된다.

아이와 나무가 노래를 부르고 서로 경청하며 연결될 때 숲은 그 어떤 위험도 사라진 안전한 순간, 안전한 공간이 된 것 같은 평화로움이 보는 이에게 스며든다.     

개그맨 전유성 또한 신작 ‘지구에 처음 온 사람처럼’ 이란 에세이집에서 사람이 아닌 자연에게 들려주는 음악회를 넘어 자연의 소리를 들어보는 콘서트를 기획하겠다고 한다. 바다의 소리나 폭포 소리 등 물의 소리에 귀 기울이듯 산 속 돌의 소리를 들어주는 음악회는 어떻겠느냐고 말이다. 음악 연주소리를 들으려고 준비하는 청중들에게 연주 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에 귀 기울이게 만든 존 케이지의 4분33초 같은 발상이다.

고정관념으로 당연히 들리리라 믿었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비로소 나의 감각은 숨겨진 다른 소리를 찾기 위해 감각을 열어 새롭게 진화한다.     

 

공감을 불러 일으켰던 41. 6%라는 테마의 보안여관 전시도 다시 떠오른다.

우리나라 인구의 41.6 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일인가구의 현실을 사진을 비롯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고립된 사람들의 외로움을 덜어주는 역할로 비좁은 방 안 속에 반려식물이나 반려 동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반려인,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반려자, 반려인을 찾기 어려운 세상이라 워크보트 멤버는 우리와의 모임을 통해 6개월 여 만에 처음으로 따뜻함을 느끼고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이 안전한 시공간이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치안이 좋다고 안전하지는 않다. 치안국가라고 안전국가가 그냥 될 수는 없다.

치안은 기본이고 이제 안전한 사회, 안전한 나라로 성숙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서로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서로 돌보고 인정하는 문화로 짜여진 일상의 안전망이 더없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런  문화안전망의 씨줄과 날줄을 엮어내는 예술가들이야말로 이 시대에 서로 돌봄 시스템을 실천할 수 있는 경청자 중의 경청자가 아닐까?     



세상에서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소리, 숨겨지고 감춰진 소리까지 예민하게 느끼고 찾아내고 다른 이들이 감각할 수 있도록 창작하는 예술가들.

지역의 서로 다른 커뮤니티의 갈등을 쏟아내며 다름의 불편을 넘어 서로 다른 걸 이해하도록 돕는 예술가들, 절망하고 좌절하는 현대인들의 마음에 곁을 내주는 예술가들.

1인가구를 비롯 외로움의 대안으로서 이야기를 듣고 연구하는  ‘듣는 연구소’라는 곳이 있듯이 안전한 나라,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데  예술가들의 쓸모가 따뜻한 효능감으로 작동되는 세상을 상상한다.

아울러 그것을 실험하고 데이터로 검증될 수 있다면 금상첨화.

어쩌면 ‘치안’의 단계에서 ‘안전한’ 단계까지 가능할 때 예술가들도 마음껏 창작 활동을 할 수 있을 지 모른다. 사람들의 연대와 협력의 조건으로도 서로가 피해를 주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안전한 관계가 전제된다. 바야흐로 ‘치안’을 넘어 ‘안전’감수성이 요구되는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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