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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n finito May 03. 2024

개인의 고유한 고통에서 퍼지는 보편의 연대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일을 겪는다. 그렇게 들이닥치고야 마는 폭풍, 그 속에서 휘몰아치는 비바람 같은 거센 감정을 마주한다. 사건의 전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디서 한 번쯤 보고 들은 적도 있는 듯한데 나를 파고드는 고통만큼은 그저 처음이고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오롯이 나의 것일 뿐이다. 타인과는 나눌 수 없는 오직 홀로 감당하고 겪어야 하는 삶의 단독자로서의 시간이다. 나만이 겪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아니기도 한, 비슷할지언정 같을 수 없는 자기만의 아픔이다. 한순간에 세상이 무너져버리는 느낌. 내면에서 벌이는 자신과의 전쟁. 그래서 적막하다.

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고통은 스스로를 오인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나만 아픈 것 같은 기분으로 자신의 불행을 비참하게 여겨 타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다가도 제 안으로 다시 파고든다. 고독으로의 도피. 한 동안 문을 걸어 잠근다. 

홀로의 시간 속에서 반사되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만화경 속 이미지>


하지만 상기할 것이 있다. 우리가 불행으로 느끼는 고통은 삶의 공통된 속성이라는 사실을. 늪에 빠져있을 때는 도리가 없지만 소용돌이치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벗어났다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둠 속으로 파고들어 자신을 휘감은 끈적한 막을 걷어내는 처절한 몸부림, 그 적막했던 시간을 지긋하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얼마 전 영국에 사는 친구 y가 한국에 왔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들어오는 친구는 최근 몇 년 동안 결혼 생활이 참, 많이도 힘들었다. 사정을 자세히 적어내기는 어렵지만 그녀의 영혼을 칭칭 감고 숨을 조이던 고통을, 나는 알고 있다. 뼛속까지 외롭다고 얘기하던 y의 얼굴에 흐르던 눈물과 야윈 몸을 기억한다.

친구의 아픔을 들으며 한 해가 지나고 또 두 번의 해가 흘렀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말하는 y는 그럼에도 도망치지 않았다. 포기하기보다 견뎠고 깨달아갔다. 스스로에 대해, 사랑에 대해, 삶이라는 것에 대해.

친구와 저녁 식사 후 밤거리를 걸으며 나는 이런 말을 했다. “옛날에 우리 회사 같이 다닐 때.. 너는 뭐랄까, 존재 자체가 안정되어 있고 완전한 느낌이랄까. 할 말 딱딱하는 이성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캐릭터여서 그랬을까, 얘기를 편하게 할 수가 없었거든. 근데 이제는 진짜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이야.” y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의 고통을 들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새겼다. y가 지나온 시간에 대한 신뢰이기도 했다. 

y는 자신만의 고유한 고통을 통해 깊어졌다. 느낄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러했으므로.


홀로의 캄캄한 시간은 고유함이 되어 다채롭게 펼쳐진다. <만화경 속 이미지>

존재를 온전히 관통한 고통은 한 사람을 고유하게 만든다. 나는 여기서 개인의 그 고유함이 펼쳐내는 다채로운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 고통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는 새로운 시선을 펼쳐보는 것이다. 자신을 넘어선 곳에서 다가오는 그다음의 감정들, 열리는 새로운 세계. 바로, 이 지점은 우리가 추구하는 연대로 이어진다. 나와 친구가 겪은 고통은 다른 종류의 것이지만 같은 것을 말하며 비로소 서로가 맞닿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고통을 직면하고 각자만의 치열한 전쟁을 치러냈다는 공통분모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 아픔을 서로 나눴다는 것.

이러한 '맞닿음'은 개인 간뿐 아니라 사회적 감정에 대한 의미로 확장되기도 한다. 일어나서는 안될 비극으로 아픔이 온 사회를 뒤덮었을 때, 그 차갑고 날카로운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들을 향한 마음의 깊이가 비단 인간의 측은지심이나 정의감에서만 비롯될까. 타인의 고통을 인식하고 그들을 품어내는 것이 과연 본성만으로 가능할까?


하나의 존재에서 점차 파동이 일어 우리가 된다. <만화경 속 이미지>

한 존재의 아픔은 수면 위 파동이 점차 넓게 퍼지듯 또 다른 누군가의 그것과 맞닿고, 나아가 사회 공동체 구성원들의 고통에 대한 참 이해와 깊은 공감으로 확대 연결될 수 있다. 지극히 견뎌온 개인의 세계는 서로를 품어내는 더 큰 세계가 된다. 이렇게 가장 개인적인 것은 보편의 것이 된다. 개인의 고유한 고통은 보편의 연대를 향하는 가능성이 된다. 

마침내, 나에서 우리가 되도록. 그리하여 나의 상처에서 빛이 나도록.


“가장 깊이 숨겨져 있는 것이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가장 고독한 것이 가장 공동체적이라는 사실을 곧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존재의 가장 내밀한 곳에서 산다는 것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의 '영혼의 양식'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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