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을 버리니 꿈꾸게 되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교문을 들어서는 것이 힘들어졌다. 수업, 상담, 회의, 서류 작성 등.. 당연한 듯 해내던 학교에서의 루틴들에 매 번 애를 써야 했다. 어느덧 퇴근길마다 내 손엔 술병이 들려 있었고, 놓을 수 없는 현실과 더해가는 우울 속에서 괴로워했다. 처참했던 나만의 시간이 지나고 출근을 하면 여느 때처럼 밝게 웃으며 일을 했지만, 그것마저도 힘들어지는 때가 왔다.
사범대를 졸업한 후, 해 본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가르치는 것 밖에 못하는 내가 보장된 정년과 연금을 버리고 나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막바지엔 그저, 살고 싶었다.
흙수저 중에 흙수저, 게다가 친정 엄마의 생활비도 책임져야 했던 내가 쉬어갈 수 있었던 건 남편 덕분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당신이 있어서 여기까지 온 것 같아. 이제 내가 힘이 되어줄게.” 늦은 밤 남편이 보내온 이 한통의 문자로 나는 잠시 쉬어가고자 마음을 굳혔다.
그때까지만 해도 딱 1년만 쉬고 시험을 봐서 학교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일주일 후 대학 동기에게 연락이 왔다. “외삼촌이 돌아가셨어. 쉬고 있는 동기가 너뿐이라 부탁할 곳이 없어. 나 대신 3일만 일해줄래?” 생각만으로 숨이 턱 막혀왔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상을 당한 상황이니, 그것도 3일만 일하면 된다고 하니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다행히 불과 일주일 전까지 하던 일이라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그때 아이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감명받았다고 하시며 학부모님 한 분께서 정중히 과외를 부탁하셨다. 처음엔 힘들어서 쉬고 있는 중이라고 사양했지만 연이은 설득에 일주일에 딱 2번만 해보기로 했고, 그 일은 내가 만삭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전히 간간이 소식을 전하며 지내고 있고, 헤어지며 건넨 인형은 중학생이 된 지금까지 매일 밤 아이와 함께 잠자리에 든다고 한다.
아이가 태어날 무렵 남편의 회사가 제주도로 옮겨가게 되면서 뜻하지 않은 제주살이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3년을 육아에 전념하다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머릿속으로는 아이를 키우는 일이 가치 있다고 말하면서도 자꾸만 내가 닳아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에 무엇인가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다 구인 광고란 맨 윗줄에 있던 치료실에 전화를 걸었고 이력서를 가지고 당장 오라는 말에 갑자기 치료사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주 2일만 하겠다고 시작한 일은 어느새 주 5일로 늘어갔고, 매일 일하는 시간도 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아이 맘 속에 엄마의 빈자리는 점점 커져갔고 아이가 힘들어하니 부부 사이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전보다 경제적으로는 여유로워졌지만, 마음은 점점 궁핍해져 갔다. 워킹맘으로 사는 삶이 녹록지 않음을 깨달으며 좌절했고 또다시 일을 그만뒀다. 다행히 엄마의 사직과 함께 아이는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하지만 섣불리 복직을 결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엄마와 아내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며 내가 덜 필요한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아파트 상승기에 매매 시기를 놓친 우리는 차선책으로 집을 짓게 되었다. 집 짓기는 이전까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영역이고 인생에 있어서도 큰 이벤트라 생각했기에 나는 기록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블로그와 인스타에 집짓기 과정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초창기엔 가족과 지인 외에는 '남의 집 짓는 과정'에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나 역시 쭉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새 4천 명 가까운 팔로워가 생겼고 많은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시공 과정만 기록했던 나의 인스타는 점차 가족의 일상과 집과 삶에 대한 나의 생각을 공유하는 공간으로 확장되었다. 그 과정에서 인스타 친구분들께서 '작가'에 도전해 볼 것을 권유해 주셨다. 그러한 계기로 '브런치 작가'에 도전하였고 3일 후 합격 메시지를 받았다. 그리고 인스타는 나에게 '인플루언서'라는 명칭도 달아줬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플루언서란 엄청난 팔로워를 몰고 다니는 예쁘고 자기 관리 잘하는 엄마들에게나 붙여지는 명칭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편견과는 다르게 자기 관리와 관계가 먼, 털털함을 넘어 사고뭉치인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새로운 제안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이전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인테리어, 브랜딩, 마케팅 관련 조언이나 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엔 브런치 글을 보고 들어온 기고 제안에 원고를 쓰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장래 희망란에 매 번 교사라고 적었다. 그것은 부모님의 바람이었고 나 역시 다른 직업을 생각할 수도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막연히 나쁘지 않은 직업이라고 생각했고 취업을 한 후엔 나름 소질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8살 때부터 정해진 나의 진로는 예외가 없다면 만 62세까지 이어질 예정이었다. 사직을 하고 휴직을 할 때조차 가르치는 일을 제외하고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작가와 새로운 영역으로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사직이라는 계기가 없었다면 아마도 평생 다른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고등학생 때, 그리고 직장에서 적성검사를 하면 나의 적성은 언론, 광고 쪽 분야가 많았다. 그리고 대학생 때는 신방과나 항공운항과에 다니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은 불필요한 사치였기에 이내 마음을 접었었다. 비록 나는 꿈꾸지 못한 10대와 20대를 보냈지만, 40대가 되어서야 나를 알아가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때보다 체력도 두뇌회전도 떨어지지만 꿈꾸기에 늦지 않은 나이라 믿는다. 물론 언젠가 나의 본업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땐 아마 이것밖에 할 수 없어서가 아닌 이것도 할 수 있는 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