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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달 Sep 08. 2022

내가 제일 잘 놀아.


엄마, 저는 아홉 살 중에
제일 잘 노는 어린이인 것 같아요.


우리 아들의 자부심은 공부도, 외모도, 운동이나 악기 실력도 아닌 '잘 노는 것'이다. 그동안 교사와 치료사로 일하며 또래 아이들의 다양한 자부심이 담겨 있는 귀여운 허세들을 보아왔지만, 잘 논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아이는 처음인 것 같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자부심엔 납득할만한 이유들이 있다.

"엄마, 개미집 만들기 하고 올게요."

"비 온 뒤라 땅이 질어서 좀 마르면 하는 건 어때?"

"땅이 젖어 있으면 땅 파기가 더 쉬워서 좋죠."

"그럼 햇빛 쨍쨍 더운 날은?
그럼 땅이 딱딱할 텐데 나가서 놀잖아."

"그런 날은 곤충이 많으니까 개미집에 데려올 손님이 많아서 좋고요."

잘 노는 아이에게 노는데 좋은 때란 따로 없다. 맑은 날은 맑아서,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이래도 저래도 다 놀기 좋은 날이다.


때만 가리지 않겠는가. 장소도 가리지 않는다. 아직 집들이 들어서지 않은 주변 빈 땅에서는 개미집을 만들고, 근처 공원에서는 곤충채집을 하고 예쁜 돌과 버섯을 관찰한다. 데크는 딱지치기에 최고의 장소이고 집 짓고 남은 나무와 벽돌, 수도가 있는 뒷마당은 온갖 놀이도구가 탄생하는 최고의 실험실이다.



이렇듯 놀 수만 있다면 모두 좋은 때와 장소임을 몸소 보여주는 그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이든 놀이화하는 능력이다. 아빠가 화단을 가꾸면 흙과 돌멩이를 가져다가 놀고, 목공을 하는 날에는 재미있어 보이는 못질을 하고 페인트칠도 해본다. 잔디를 깎는 것도 아이가 좋아하는 놀이 중에 하나였고, 벽이나 창문 청소를 하는 날은 청소를 가장한 물놀이를 하기에 딱인 날이다.


잘 노는 아이답게 놀 때는 체력도 대단하다. 아침에 골목에 나가 동네 아이들과 놀고 집에 놀러 온 친구와 오후까지 놀고 곧바로 놀이터에 가서 해 질 녘까지 놀다 오는 것도 모자라 잠들기 전에 잠깐이라도 놀이를 하지 않으면 아쉬워서 잠이 잘 오지 않는다고 한다.


아쉬움에 잠 못 이루던 어느 날, 아이에게 물었다.

"혹시 공부하기 좋은 날도 있어?"

"실컷 논 날이요. 그러고 나면 공부가 하고 싶어 져요."

“맨날 다 못 놀았다고 하잖아. 스스로도 실컷 놀았다고 생각되는 그런 날이 있어?"

"음... 일 년에 한 다섯 번?"

아이의 말에 따르면 일 년에 다섯 번 뿐이지만, 실제로 충분히 논 날은 공부도, 정리도 알아서 척척이다. 그리고 그런 날은 나 역시 육아가 훨씬 수월한 것 같다. 하지만 그 ‘충분히'의 기준은 늘 나의 생각보다 높아서 대부분은 놀아도, 놀아도 채워지지 않는다. (하하)


이렇게 놀고 놀고 또 노는 아들을 둔 덕분에 나는 매주 평균 세 켤레의 운동화를 빤다. 운동화 솔에 비누를 묻혀 이번 주도 신나게 놀았음을 증명하는 흔적을 지우며 다음 주에 새겨질 행복한 훈장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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