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조금 이른 나이부터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멋 내기 염색으로 시작했던 나의 염색 주기는 점점 짧아졌고 마흔에 들어서니 한 달에 한번 정도의 주기로 새치 염색을 하게 됐다. 그러다 어느 날, 돈도 들이고 시간도 들이고 건강에 좋지도 않은 이 행위를 언제까지 반복해야 하나, 이제 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이주만 되어도 올라오기 시작하는 불청객을 애써 외면하며 염색의 주기를 점차 늘여갔다. 하지만 나의 버티기는 늘 두 달의 벽에서 무너지고 말았고 며칠 전에도 결국 백기를 들고 미용실에 다녀왔다.
그런데 최근, 염색에만 국한되었던 노화와의 밀당이 피부 시술에 대한 관심으로 넓혀졌다. 40대 초반까지 굳건했던 '내 나이를, 또 그로 인한 변화를 받아들이겠다.'는 결심은 이마와 팔자 주름, 푹 꺼진 눈과 처진 볼살 등 급격하게 달라져가는 얼굴의 변화 앞에 조금씩 무너졌다. 그래서 시술 경험이 있는 친구들의 후기를 들어보기도 하고 성형외과나 피부과 홈페이지에 방문해 보기도 했지만, 시술의 종류도 너무 많고 그 후기도 천차만별이라 섣불리 결심하지 못하던 차였다.
그러다 얼마 전, 인터넷 카페를 뜨겁게 달궜던 이효리의 최근 사진을 보았다. 사진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나와 한 살 차이인 그녀는 -적어도 그 사진 속에서만은- 나와 비슷한 노화의 과정을 밟고 있었다. 누리꾼들의 반응은 자연스럽게 나이 드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반응부터 시술이 필요하다는 반응까지 극과 극으로 갈렸고 나는 문득 2012년에 그녀가 했던 선언이 생각났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그녀는 "연예인이니까 내 또래 여자들이 이렇게 생겼다는 걸 보여줄 책임이 있다. 연예인들은 워낙 젊어 보이는 사람이 많다. 분명 정상인데 늙은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라고 말하며 과거에 보톡스를 한 번 맞아본 적이 있지만 앞으로 어려 보이기 위한 시술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녀가 2017년에 발표한 ‘변하지 않는 건’이라는 노래 가사(아래)나 최근 방송된 '서울 체크인'에서 "억지로 웃다 웃상이 돼버렸어. 이 주름이 괜히 이렇게 많이 생긴 게 아니다. 돈 벌다 생긴 주름"이라며 얘기하며 웃었던 걸 보면 아마도 그녀의 결심은 십 년째 유효한 것 같다.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공유되고 평가받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소신을 지키고 있는 그녀의 용기에 성숙한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그녀가 인위적으로 젊어 보이는 노력을 내려놓은 지금, 우리는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녀의 삶의 태도에 집중한다. 어쩌면 그러한 선택이 오히려 '이효리 그 자체'를 바라볼 수 있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효리는 이효리'고 그녀는 여전히 또래 여성들보다 젊고 예쁘다. (그리고 나는 이효리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한결같은 그녀의 소신에 설득됐고 ‘일단' 그 뜻에 편승하고자 한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리라 장담할 순 없지만, 계속 늘어갈 노화와의 수많은 밀당에서 그녀의 메시지가 ‘잠시 멈춤’ 버튼이 되어줄 것 같긴 하다. 변하지 않는 건 너무 이상하다는 그녀의 노래 가사처럼 나이에 맞는 ‘나다움’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내게도 오겠지.
얼마 전 잡지에서 본 나의 얼굴
여전히 예쁘고 주름 하나 없는 얼굴
거울 속의 나는 많이 변했는데 왜
조금도 변하지 않는 이상한 저 얼굴
변하지 않는 건 너무 이상해
모든 건 시간 따라 조금씩 변하는데
변하지 않는 건 너무 위험해
모든 건 세월 따라 조금씩 변하는데
변하지 않는 걸 위해 우린 변해야 해
변하지 않는 걸 위해 우린 싸워야 해
변하지 않는 걸 위해 우린 변해야 해
변하지 않는 걸 위해 우린 싸워야 해
변하지 않는 건, 이효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