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나는 왜 늘 바보 천치가 되었을까.

저항할 수 없는 아이의 가장 잔인한 선택

by 이제 봄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화가 나면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절대로 말하지 않겠어. 그들과 웃지 않겠어.

그들과 다시 말을 한다면 바보 천치야. '


이것은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격이었다.

나는 아직 어려서 돈도 없고 힘도 없고 그들의 도움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이것이 다였다.

화를 내면 더 큰 화가 돌아올 것이므로

입을 닫는 것.

마음을 닫는 것.

그것이 그들의 마음에 약간이라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보였다.


그리고 나는 늘 며칠 내로 바보 천치가 되었다.


아버지는

이차성징이 시기가 되어

딸아이의 가슴에 몽우리가 잡히자

신기하다면서 장난질을 치기 시작했다.

대놓고 딸의 가슴을 찔러보면서 놀렸다.

이제 너도 크는 거냐고.

위아래 남자 형제뿐이라 늘 소외감을 느끼는 데다가

가뜩이나 예민했던 시기를 지나고 있었던 나는

너무 힘에 부쳤다.


싫다고 싫다고 너무 싫다고

화도 내고 발로 차보고 손사래를 치고 소리도 질러봤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의 화에도, 화내는 모습이 재밌다고 웃던 사람이었다.

그 장난질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지속되었다.

어머니는 종종 그 장면은 목격하기도 했지만, 딸을 보호할 생각은커녕 같이 웃고 말 뿐이었다.

유유상종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남동생이 아버지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동생도 싫고 아버지도 싫고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싫어졌다.

방에 들어가 한참을 울고 나와도 아무도 내 상태를 알아봐 주지 않았다.

이 지옥은 몇 년이 지속되었다.


흔적이 안 남게 우는 능력은 저절로 발달되었다.

흔적이 있는데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면 더 슬플 터였다.

열심히 운 흔적을 지우면서, 울었다는 것을 누가 눈치채줬으면 했을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방에서 울며

나를 울리고도 웃고 있는 가족들을 경멸했다.

그리고 다짐을 반복했다.

'저 쓰레기 같은 자식들이랑 말을 섞지 않겠어.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겠어. '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같이 사는 집에서 다 자라지 않은 아이가 실행하기엔 어려운 결심이었다.

그렇게 당하고도 다시 나도 모르게 마음을 주고 있는 내가 정말 바보 천치 같았다.

나는 스스로 바보 천치가 되어가고 있었다.


남자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마음을 열면 바보 천치다.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우는 흔적을 남기면 더 상처받는다.

어린 나는 이런 것들을 배웠다.


그리고 나는 내 몸이 싫어졌다.

게다가 여성인 것도 싫어졌다.

여성스러운 모든 것이 싫었다.


나는 내 몸이 내가 원하지 않아도

보여지고, 건드려지고, 평가될수 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 싫은 몸에서 벗어날 수있는 방법은

어찌보면 쉬울수도 있었다.

살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내가 만든 벽에

갇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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