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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뜰날 Feb 05. 2023

빈 수레가 요란하다.

엄마의 말.

오늘아침.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평소처럼 진동으로 해놓았다면 무시하고 잤을 법한데,

아이들이 만졌는지 휴대폰이 요란한 벨소리로 울려 어쩔 수 없이 자다 깨 전화를 받았다.


엄마였다.


"아직도 자냐~오늘은 대보름이여~ 오늘 하루를 일찍 시작해야 1년 내내 일찍 일어나고 운수가 좋디야~언능 인나라잉"


"어~ 인자 일어났네~ 끊어~"


형식적인 짧은 통화를 끊고,

눈을 비비면서 생각했다.


'엄마는 이런 식으로 당신의 삶의 방식을 나에게 알려준 거였구나'


엄마는 절기를 챙기는 옛날 사람이었고, 그 풍습들을 어린 나에게 알려줬다.

동지면 팥죽을 끓여 시골집을 벽에 돌려가며 뿌렸었고,

오늘 같은 대보름이면 보는 사람마다 더위 팔기를 하거나, 부럼 깨기를 하는 것이라고.


엄마는 그렇게 당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나에게 삶의 방식을 알려준 건지도 모르겠다.


어른은 공경해야 한다.

형제간에는 우애가 좋아야 한다.

어딜 다녀오면 오는 길에 꼭 집안 어른들 선물은 작은 거라도 준비하는 것이다.

손님에겐 남았던 헌 밥 말고, 늘 새로운 밥을 해서 드리는 것이다.

사람은  무슨 일이 하든 정성이 중요하다.

어디 가서 남욕하는 거 아니다.

내가 손해 보는 것보다 사람이 먼저다.


이럴 땐 이런 걸 하고, 이런 건 하면 안 된다. 등등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도 나는 지금도 절기를 잘 모르는 어른이 되었고, 입춘은 언제인지 감도 오질 않는다.


어디 가서 가끔 남욕을 하기도 하고, 내가 손해 보는 것이 마음의 정성보다 더 중요할 때도 있다.


이런 것들을 자식들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 게 우리 엄마의 사랑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바랬던 엄마의 사랑은 그것과는 차이가 컸다.


엄마의 사랑을 느끼는 곳은 소풍날 김밥과 학교 갈 때 싸준 도시락 같은 거였다.

소풍날 김밥에 평소에 못 먹던 햄과 맛살은 꼭 들어가 있어야 했고,

내가 싸가는 학교 도시락에는 메추리알 장조림 같은 게 있었으면 했다.


운동회 날, 달리기 하는 나를 응원하러 와 주, 발표회를 할 때 열심히 연습한 나를 보러 오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모습의 사랑이 아니라며, 엄마의 사랑을 심했다.


지금은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친정에 갈 때마다 엄마의 사랑을 곳곳에서 마주한다.

이번 설에도 엄마의 마음에 그득그득 채워진 사랑을 보았다.


당신네 집에 있을 동안 입 짧은 손주들이 매끼 먹으면서도 질리지 않고 밥 한 그릇씩 뚝딱 치운 미역국과 반찬을 정성껏 싸주셨다.


매끼 남은 밥을 두고 새 밥으로 사위의 밥상을 차려주셨다.


내가 잘 먹었던 김치를 시간을 내 담가 주고

밤새 집으로 갈 우리를 위해 홍삼 음료와 간식거리를 챙겨 주셨다.


아마 어릴 때부터 엄마의 사랑은 엄마의 색깔대로 늘 변함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전화를 끊고 아이들 아침을 차리느라 분주한 아침.


일요일엔 요리를 잘하는 남편이 바쁘게 움직이고 나는 아이들의 행동을 제지하느라 정신이 없다.


아침에는 상 조금만 보자~

간식은 밥 먹고 먹는 거야~

옷은 벗으면 제자리에 둬야지~

장난감은 다 놀았으면 치우는 거야~

뛰지 말자~


어릴 때부터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시작한 나의 말은 좋은 말로만 끝나는 경우가 드물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화내니까.

겨우겨우 하는 척 하는 건성인 태도에 화가 올라오기도 한다.


나는 그런 모습으로,

오늘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일까.


어른의 말은 무조건 들어야 한다?

자신의 의견보다 엄마의 말이 더 중요하다?

엄마가 화내기 전에 말을 들어야 덜 혼난다?


친정엄마의 삶의 태도나 방식이 어린 나에게 통하지 않았던 것처럼

엄마랍시고 아이들에게 안 통하는 언어로 말하면서 아이들을 탓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아이들에게 몇 번을 말해야 아냐고 반복해서 이야기했을 뿐.

내 언어의 방식이 아이들에게 닿지 않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릴 때, 친정엄마의 말이 답답했던 것처럼, 아이들에게 시시콜콜 잔소리인 내가 아이들 입장에선 답답할 것 같았다. 


강요와 지시로 아이들의 행동과 말을 통제하려고 했던 것일 뿐.

아무런 효과가 없는 요란한 빈 수레.


그게 지금 나의 말 그릇이었다.


지금껏 아이에게 엄마로서 어른의 말을 한 게 아니라.

아이처럼 감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말한 잔소리꾼밖에 안 됐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김종원 작가님 책을 좋아한다.

얼마 전 신간 소식과 함께 라이브를 했을 때 작가님 말이 기억에 남다.


어른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하는 게 아니라,

세 마디 만으로도 열 가지 의미가 아이에게 전달되는 것이라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은 소리나 크기로 

힘을 느끼는 게 아니라고.

말은 온도로 느끼는 것이라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오늘은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믿어봐야겠다.

아이들 마음에 닿을 수 있는 진짜 어른의 말을 연습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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