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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뜰날 Oct 28. 2022

남편학개론_9

9. 살다 보니, 좋아지고,

"아저씨!!

 우리가 먼저 왔는데 누락시켰잖아요! 아저씨 잘못이잖아요! 저흰 새치기 안 했고, 세번째로 줄 서 있었다고요! 아저씨가 잘못해서 두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섬을 나갈 수 있다고요!! "


고성이 오갔다. 나는 8월의 땡볕 아래에서 얼굴이 붉어지면서 소리를 질러댔고 떠나는 배를 보면서 매표소 아저씨에게 성질을 내고 있었다. 섬에서 나가는 배를 타야 하는데 우리 차 번호가 누락이 되어 차를 배에 실을 수 없었다. 일찌감치 와서 1시간이나 미리 대기하고 있었는데 누락이라니..


2시간 후에나 다시 오는 배를 타고 우리는 전남의 끝 생일도라는 섬을 빠져나가 완도에서 경기도까지 휴게소 한 군데도 안 들리고 곧바로 가도 네비상 6시간 이상이 걸린다.


 갈길이 먼 나의 속사정도 모르고, 이렇게 일이 꼬이게 될 줄이야... 아. 집에 언제 간담...




아이들 앞에서 이렇게 소리치며 누군가를 비난해 본 게 처음인 것 같다.

날것으로 화내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들은 7살 딸 아이가 말했다.


"엄마, 정말 기분 안 좋아 보이더라. 화 많이 난 것 같던데 아저씨가 뭘 잘못한 거야?"


차 창문이 미처 열려있는 걸 모르고 나의 고성을 모두 다 들은 아이들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을 하고 나니. 뭔가 더 기운 빠지는 느낌이었다. 7살짜리가 본 어른이 화를 낸 것에 대한 변명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흥분하고 소리를 질러대는 나의 모습에 대해 부끄러운 느낌도 없지 않아 있어 화장실 갔다가 뒤처리를 못한 것 마냥 찜찜한 느낌...


게다가 아빠는 옆에 있었지만 화를 한마디도 내지 않았는데 엄마인 나는 마구 성질을 부리고 있고 나를 말리는 아빠에 비해 어른스럽지 않았던 것 같은 스스로를 보는  마음의 찜찜함도 있었던 것 같다.


어차피 배는 떠났고, 화내도 소용없을 일이었는데. 나는 왜 그렇게 그 아저씨가 미웠을까.


아마도 나는 우리가 일찍 왔는데 새치기를 했다는 아저씨 말이 억울했을 거고 적반하장으로 잘못한 아저씨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게 더 화가 났던 것 같다. 그리고 길고 긴 장거리에 대한 심적 부담이 더해졌겠지. 운전을 내가 하는 게 아니라고 보조석에 탄 사람(나)의 역할을 뭐가 있냐고 말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보조석에 앉아서 계속 남편의 말동무가 되어주며 아이들의 요구를 듣고 음악을 재생시키고, 끝말잇기를 시작하고, 아이의 동태를 살피면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 또한 보조석에 탄 사람의 역할이다.


운전에 방해되지 않게 아이들과 실랑이가 길어서도 안되고 아이들의 짜증이 한계를 넘어갈 때는 적절히 조율도 해야 한다. 어디 그것 뿐인가. 아이들이 생리적 욕구와 허기를 채워줄 행복한 휴게소 타이밍도 함께 두루두루 살펴봐야 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이 있단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장거리의 피로감은 그래도 운전을 하는 남편이 더 하고, 집에 가서 쉬고 싶은 생각이야 내일 출근하는 남편이 더 할 텐데 남편은 화를 하나도 내지 않았다. 나는 남편의 내면의 과정이 궁금했다.


이 남자는 왜 화를 내지 않았을까?


"여보는 화가 안 났어요?"(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는 우리 부부는 가끔 흥분했을 때 존댓말이 더 나오곤 한다)

내가 물었다.


"났죠. 저 사람이 실수했는데 오히려 우리 탓을 했으니까요."


아주 심플한 답변.


남편은 사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감정에 휩싸여 아저씨를 미워하고 있었지만 남편은 아저씨의 실수에만 화가 났다. 나처럼 소리를 지르고 감정이 표출지 않았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근데 왜 가만히 있었어요?" 내가 물었다


" 이미 배가 떠났더라고, 화내서 뭐해. 나만 감정 소모지."


아~

남편은 가능성이 없는 것에 감정 소모를 하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었고, 이미 배는 떠났다는 사실에 집중한 것이었구나.


가끔은 남편이 매우 이성적인게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서 서운할 때도 있었는데 오늘 같은 일에서는 내가 하지 못하는걸 잘하는 남편을 보니 남편의 장점이 확대되어 아주 좋아보이기까지 하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들은 부부특강의 내용이 생각이 난다.

남녀의 뇌를 말해주는 것이었는데 남자들과 여자들은 상황을 해석하는 게 다른데 남자는 주로 상황을 사실대로 기억하는 반면, 여자들은 사실에 대한 기억보다 감정에 대한 기억을 많이 한다는 것.


여자들은 5년 전의 일도 감정이 또렷해서 감정에 대해 억울함, 슬픔, 기쁨을 바로 지금처럼 재현해 내는 게 가능하지만 남자들은 거기에 대한 사실만 알고 감정은 잊어버린다는 것. 그래서 서운했던 몇 년 전의 사건에 대해 아내가 말하면 남편들이 아주 대응하기 어려워한다는 점이었다.


그 강의를 들을 때만 해도 사람을 평균적인 남녀로 구분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나는, 감정에 섬세한 남자들이 얼마나 많고, 감정에 무딘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저렇게 나누는 게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그 평균적인 남녀의 특성에 남편과 내가 속해있을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남편과 나의 다른 반응과 태도를 곱씹고 생각하다보니, 뒷좌석에 앉아있는 아이들이 벌써부터 지루해 하는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대화로 찝찝한 내 마음을 풀 겸 아이들에게 이 시간을 기분 좋게 보내기 위한 수를 써보기로 했다.


기분 푸는데 아이스크림 만한 게 없지!


선착장 앞 편의점으로 아이 둘의 손을 잡고 향했다.


우리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초빵(초코 빵빠레), 우리 딸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설레임)을 사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바빵(바닐라 빵빠레)를 골랐다. 남편 꺼는 아무거나 샀다.(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남편은 다 잘 먹으니까~)


단것이 들어가면서 감정을 조금 벗어나고 두 시간을 즐겁게 보내기 위한 머리가 회전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요 메들리를 듣고 엄마와 아빠의 신청곡들을 번갈아 들어가면서 우리는 다음 배 시간까지의 두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그다음 배를 기다렸다가 타서 완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이제 진짜 고속도로를  달릴 일만 남았다.

매표소 아저씨에 대한 분노는 가라앉았지만 앞으로의 긴 여정에 대한 부담은 내 맘속에 여전했다.


일요일, 오후 2시. 내비게이션 예상시간 6시간.

휴게소를 몇 번 들리고 가면 집까지 빠르면 밤 9시나 10시 도착 예정. 여름휴가철을 생각해서 막히면 12시쯤이 되겠구나. 머릿속으로 예상시간을 생각하고 나름의 휴게소 들를 타이밍의 시나리오를 만들어 본다.


빠르게 돌아가는 나의 머리와 다르게 남편의 태도는 나와 정 반대다.

 

나의 시나리오를 읊어 보고 남편의 생각을 물어보면


"생각하지 마~ 혹시 몰라~ 생각보다 길이 안 막힐 수도 있어~그때그때 봐서 결정하자"


이 사람 참 편해 보인다. 미리 계획하고 예측하는 나와는 다르게 조급함도 불편함도 없다.


태평해 보이는 그 태도가 장거리의 부담이 있는 오늘 같은 날은 나에게 오히려 안도감을 줄 때가 있다.


이 사람과 살아갈수록 점점 이 사람의 장점을 흡수하는 내공이 생긴 것 같기도 하다.


늘 하는 습관적인 나의 시뮬레이션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이면서


" 그래 뭐. 어떻게든 다 방법은 생기겠지~ 색다른 경험이 될지도 몰라."


라며,  장거리의 부담된 마음가짐이 긍정적으로 쉽게 전환되는 것도 내가 가능하게 됐으니 말이다.




상황을  자칫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성향이 있는 나는 어떤 일이 생겼을 때의 불안을 극복하고자 시뮬레이션을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혹시 모르는 플랜 B를 계획하기도 하고 즉흥적인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감당하는 내성이 약하다.


그에 반해 남편은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해도 쉽게 적응을 하며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나갈 수 있는 추진력이 있고 그래서 어떤 일에 대한 걱정과 불안에 압도되지 않는다.


서로 좀 좋은 성격들을 반반 잘라서 섞어놓은 성격이야 말로 세상 편한 성격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아마 여느 부부나 같은 생각인가 싶으면서도, 서로의 특성을 파악하고 이해하면서 한 사람을 깊게 수용하는 삶을 사는 게 부부라는 삶의 내비게이션의 종착지는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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