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뜰날 Oct 11. 2022

감사. 합니까?

일상 다시보기

감사라는 것에 마음이 동의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쥐어짜서 하는 의도적 감사하기는 무슨 [도를 믿으세요?] 같은 사이비 종교처럼 떠들어 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특히, 마음이 우울할 때 그 반감은 더 치솟았다.

감사를 찾으래야 찾을 수 없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 감사라는 것을 거창한 것으로 생각한 나의 편견이 사고를 지배했을 거다. 자잘한 것들은 감사 축에도 끼지 않을 거라는 내 마음의 오만과 편견. 그것이 감사가 어색하고 어렵다고 생각했던 원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감사를 국어사전에서 검색해 봤다.


감사 (感謝)

[명사]
1. 고마움을 나타내는 인사.
2. 고맙게 여김. 또는 그런 마음.


알아보니 감사는 그냥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고마움을 나타내는 인사인 것이고 말로 표현된다면 [고맙습니다] 또는  [감사합니다]가 되는 것일 뿐인데. 그 단순한 것을 나는 한동안 참 어렵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사전의 의미처럼 감사를 단순하게 생각해본다면 당신도 나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게 감사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감사라는 것이 잘 와닿지 않았던 시기.

나는 일상을 따라가 보며 감사를 찾아보기로 했다.


아침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앞집 아주머니의 먼저 해 준 아침 인사에도 감사할 수 있었고, 야채 가게에서 내가 산 것들을 편하게 들고 가라고 내 장바구니를 벌려 넣어준 주인아주머니에게도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서두르지 않아 조금 늦게 건너는 아이들을 위해 빨간불이 되어도 출발하지 않은 운전자들에게도 감사할 수 있었고, 몸이 피곤해 죽겠을 때는 쉴 수 있는 시간과 침대가 있다는 것에도 감사할 수 있었다.


타인에게서 찾기 시작한 감사는, 어느새 내 가족에게도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었다.

그렇게 소소한 감사가 습관이 되기 시작하면서 어느 날은.


오늘을 살고 있는 나의 하루에도 감사를 할 수 있게 되고, 떼가 길고 밥을 덜먹어도 복장 터진다는 생각보다 그 모습 그대로 아이들의 존재로 감사할 수 있게 된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캠핑에 진심을 담아 인생을 즐기려는 남편의 모습에도 감사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남편과 아이들은 나의 감사를 금세 화로 바꿀 수 있는 스위치도 같이 옵션으로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한 친구는 나의 모습을 보고 사리가 나올 것 같다고 하기도 했고, 어떤 친구는 억누르고 사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맞다. 그렇게도 보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만큼 고행의 길은 아니지만, 보는 사람마다 입장 차이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나의 생각은 그렇지는 않다는 것.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직접 오랜 기간 감사를 의도적으로 발견하고 세줄의 감사 일기를 적기 시작하면서 느낀 것은

감사를 꾸준히 하다 보면 스스로의 비난이 줄어들고, 일상의 문제로 생각했던 게 더 이상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상을 보는 관점의 변화.

마음을 달리 가질 수 있는 힘.

그것이 감사의 가장 좋은 효과다.


하지만 감사 일기를 꾸준히 쓰는 누구라도 도저히 감사가 안 되는 감사의 비수기가 누구에게나 온다. 아마 그럴 땐 당신이 무척 피곤하거나 마음이 지쳤을 때 이거나 급박한 현실적인 문제로 몰두할 때 일 것이다.


그럴 땐 감사하기를 관두고 눈앞의 현실의 일을 먼저 처리하고 몸도 마음도 쉬는 게 먼저다.

감사가 마음의 숙제가 되면 안 되는 것.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습관을 계속 하고 싶은 누군가를 위해 감사의 비수기를 성수기로 바꿀 수 있는.

내가 터득한 비법을 공개 해 볼까 한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다. 드라마, 영화, 책을 봐도 좋다.

나의 인생 루틴을 벗어나 간접경험을 해보는 것이다.


그것도 시간 내기가 어렵다면, 당신 주변을 둘러보는 것으로 대체가 가능하다. 괜한 오지랖을 부리라는 얘기는 아니다. 주변에 애정 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관찰해 보거나 그들의 마음에 손을 포개 공감함으로써 내가 누리는 일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볼 수 있다.


오히려 큰 어려움 없이 해결 가능한 범위 내에서 나의 일상이 다행스러운 상황일 때를 많이 보게 된다는걸 당신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마도 감사는 우리가 자주 말하는 [다행이다]라는 말 뒤에 숨어서 내 마음의 온기를 주는 따뜻한 무엇이다.


코로나로 마스크를 끼는 생활에 익숙해져 보니 마스크 없이 살아온 삶이 얼마나 소중한 일상이었는지 느꼈던 것처럼 우리는 종종 주변을 보면서 잊었던 내 마음 안에서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감사]의 마음을 발견하기도 한다.


타인의 불행을 보고 감사를 느끼라는 이기적인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알 것이다.


일상에서 당신이 미처 느끼지  못하는 어떤 감사한 마음이, 당신이 애정 하는 누군가의 삶을 바라보다 어느 날 불쑥 고개를 내밀어 마음이 훈훈해진 경험을 한 번쯤은 해 봤을 테니까.




늦은 나이에 계획에 없던 아이를 임신한 넷째 언니는 친정엄마가 날 낳은 시기와 같은 43살에 재빈이를 낳았다.


노산으로 많은 기형아 검사와 양수검사를 했고 첫 아이를 임신하며 생긴 임신성 당뇨가 만성이 되어 고위험군 임산부가 자동적으로 되었다.


임산부의 특권인 먹고 싶은 음식을 맘껏 먹을 수 있는 시기에 많은 음식을 절제하고 혈당을 인슐린으로 조절하며 임신기간을 견뎌 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이를 임신한 것을 선물로 생각하며 친정엄마의 초긍정 마인드를 물려받은 넷째 언니는 긍정적인 마인드로 임신기간을 보냈다.


그런 언니의 노력과는 별개로, 안타깝게도 재빈이는 선천성 담낭관종이 있어(담낭 근처의 물혹) 백일이 되기 전에 수술대에 올랐다.


조리원에서 검색을 통해 수술 과정을 자세히 알게 된 언니는 자신의 몸조리는 고사하고 조리원에서의 많은 날을 눈물로 지냈었다. 이 작은 아이가 어떻게 수술을 하냐며, 볼수록 눈물이 난다고 했다.


선천성이라는 것은 엄마의 잘못이 아닌데도 그 이유가 자기 탓인 것처럼 마음을 조여 오는 죄책감과 그 불안함을 품고 살았다. 많은 시간을 걱정으로 지낸 언니의 나날들을 동생인 나는 기억하고 있다.


기특하고 감사하게 재빈이는 수술과 회복시간을 잘 견뎌 내 주었다. 예후가 좋은 수술이란 것을 알고도 수술이라는 단어의 공포는 피를 말리는 일이었다.


수술 당일날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집에 있던 나는 마음이 잔뜩 긴장한 채, 손에는 수시로 땀이 나고 재빈이의 수술 결과의 메시지를 종일 기다리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다.


그런 큰 수술을 하고 잘 버텨낸 재빈이를, 수술한 것도 잊은 채로 너무 방긋방긋 잘 웃으며 잘 자라고 있는 재빈이를 만나러 가는 차 안에서 내 마음이 동동 떠다니는 것 같았다. 솜사탕처럼 가볍고,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잘 견뎌낸 재빈이를 어서 안아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6개월 10일 만에 재빈이를 안아봤다. 그 작은 얼굴에 눈 코 입이 올망졸망 모아져 있는 게 예쁘고 귀여워 이렇게 이쁜 아이가 부모를 닮지 않고 이모(나)를 닮았다면서 수다스럽게 언니에게 이야기를 했다.


낯가림을 하는 시기라 나를 보고 계속 우는 데도 나는 재빈이를 엄마인 언니품에 넘기지 않고 계속 안고 달래면서 그동안의 이모의 마음을 욕심내서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작은 재빈아. 더 작을 때 수술하느라 고생했어~

 수술 잘돼서 너무 다행이야.

 앞으로는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만 자라자.

 이모가 많이 애정해~'


나의 마음을. 재빈이는 느꼈을까.


아마 울어 재껴대는 아이를 계속 안고 볼을 비벼대는 나를 보며 뭘 하는 거냐는 무언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던 남편의 눈을 빌려 상황을 바라보자면,  재빈이의 마음은 '이모 마음은 모르겠고 나를 좀 놔줘요.' 였을지도.


그러게. 누가 그렇게 이쁘래. 이재빈!




6개월 된 작은 재빈이를 보고 오늘 길에 카시트에서 잠든 나의 7살 딸과 5살 아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게 됐다. 나의 아이들이 재빈이와 같은 6개월 때쯤의 나는 어떤 마음을 가진 엄마였을까? 재빈이를 보듯이 나의 아들 딸도 그런 하트를 장착한 눈으로 나의 아이들을 봤을까.


나의 시간을 되돌아보게 됐다. 하트가 눈에 없던 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에 비해 마음의 힘듦이 더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내 아이의 투정은 버겁지만 남의 아이 투정은 봐줄 만할 때도 많았다. 가끔은 떼 부리는 남의 아이가 이뻐 보이기까지 한 적도 있다.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지나가다가 이제는 그냥


앞으로 내 아이를 남의 아이 보듯 봐야겠다고 다짐해보기도 한다.

좀 더 아이의 존재로 반짝이는 그 모습 그대로 내 마음에 담아질 수 있게.

하트가 장착된 눈으로만 바라볼 수 있게 말이다.


그리고 떼도 잘 부리고, 잘 울고, 투정 부리고. 몸으로 치대는 아들도


여전히 잘 삐지고, 서운해도 알아줄 때까지 말해주지 않는 나의 딸도.


그 아이대로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서 참 다행이다.(라고 적고 감사하다고 읽는다)





작가의 이전글 인간관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