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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뜰날 Oct 01. 2022

분노 처방전.

딸의 편지

올해  일곱 살인 딸아이는 나에게 편지를 자주 쓴다.

작년부터 한글을  읽고 쓰기 시작한 뒤부터 내가 아플 때면 어서 나으라고 힘내라고 써주고 생일이면 생일 축하한다고 써준다. 아이의 섬세하고 따뜻한 마음을 전달받는 방법 중 하나가 편지였다.


숱한 러브레터를 딸에게 받았다. 유치원 자유놀이 시간에 편지를 써와 하원 차량에서 내리자마자 웃는 얼굴로 가방에서 꺼내 내 주머니에 쏙~ 넣어주는가 하면, 집에서 혼자 놀 때에도 나에게 수시로 편지에 사랑한다고 쓰기도 한다. 딸의 러브레터를 버릴 수 없어 모아놓은 게 한 상자가 꽉 차고도 남는다.


그날도 당연히 그런  [러브레터] 일거라고 생각했다.


저녁 설거지를 막 끝내고 그림을 그리기로 약속한 딸과 함께 책상에 앉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내민 편지였다.


또 사랑한다고 말이겠지 싶어 무심코 펼친 편지를 보고 나도 모르게 할 말을 잃었다.


쓰다만 색종이에 적은 그 내용에는


하트가 한 서른 개쯤 그려져 있고  오른쪽 아래 부분에 [사랑]이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색종이 왼쪽 모서리 구석에는 동그란 모양에 뾰족 뾰족 가시가 박힌 세균 모양이 딱. 한 마리 있는데

그 옆에 [악마]라고 적혀있었다.


당황하거나 내가 침묵을 하면  아이가 평소와 반응이 다른 나의 마음을 눈치챌 것 같아 아무런 내색 없이 궁금한 척 물었다.


나: (악마 그림을 가리키며) "이게 뭐야~?"


딸: "엄마 마음엔 사랑이 많긴 한데 악마가 한 마리 있어."


나: "아 진짜~? 그 악마는 언제 나와?."


딸: "오늘도 한번 나왔어. 우리 밥 먹을 때."


밥 먹을 때 장난을 치는 모습을 보고 언성을 높여 혼냈는데 그때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나: "그럼 엄마 마음에 악마가 많아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딸: "계속 엄마 기분이 안 좋을 거 같아. 우울증 같은 거 걸릴지도 몰라. 계속 슬프고 마음의 감기 같은 거래. 호기심 딱지에서 봤어."


나: "아 그래? 엄마가 그럼 다이도 마음이 아프겠다~ 악마가 없어져야 되겠네~"


딸: "응. 악마가 없어지면 좋겠어~"


엄마의 화 = 악마.

아이들 마음의 절대 불변의 법칙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딸아이에게 내 정곡을 콕 찔린 느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이의 마음을 보게 되어 씁쓸했다. 내 감정의 흐름을 알 리 없는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아까 미처 못 그린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이다.


아이에게 [원래 사람이 악마 하나씩은 다 갖고 사는 거라고,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고] 현실세계를 사는 어른의 구차한 변명 같은 것을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진 않았다. 어른들 세계의 편견을 아이들의 동심에 굳이 각인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이가 커가면서 스스로 느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서는 변명을 하고 싶은 엄마 마음이 올라온다. 내 화를 정당화하고 싶은 생각들이 저기 마음 한구석에서 소리치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가 처음부터 화를 낸 건 아니라는 둥, 엄마도 화 많이 참은 거라는 라는둥 유치하고 궁색하기까지 한 어떤 변명의 말들이 내 마음속에서 목을 타고 올라오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화]는 아이들에게 정말 쓸데없는 거였구나. 라는걸...


그동안 아이들에게는 화내는 나의 모습이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아닌, 악마로 보였던 거겠구나. 그동안 참으로 많은 순간, 악마가 되었던 날들이 스쳐 지나가며 후회와 반성 같은 감정들이 올라왔다.


엄마의 [화]는 아이들의 마음에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빈 깡통 같다. 속이 텅 비어 내용물은 없고 발로 차면 요란스럽고 시끄럽기만 한. 바닥에서 아무에게나 발로 차이는 쓸데없는 깡통.


[화]를 내는 엄마의 표현 방식이 아이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수단이나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게 큰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 나는 화를 냈고 아이들은 엄마가 아닌 악마의 모습을 봤다는 것. 그게 사실이자 현실이다.


 화를 내고 나서 매번 느끼긴 했어도 [화]가 아이들에게 아무런 의미와 효과가 없음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아이의 편지를 통해 깨닫게 될 줄은 몰랐다.


화를 내지 말자고 다짐해도 스스로 통제되지 않거나 피곤하면 나도 모르게 나오는 짜증 섞인 화들은 결국 빈 깡통처럼 아이들 마음만 시끄럽게 했을 뿐이었다는 것을 이렇게 실감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내 안에서 악마의 모습을 아예 사라지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화는 누구나 낼 수 있고, 과도하지 않다면 기쁨과 같은 감정처럼 언제든 건강하게 표현되면 괜찮은 감정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안다. 알지만!


그래도 아이의 편지에 마음이 뒤숭숭하고 쓰라린 마음이 남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그래도 그림에 악마는 하나고 사랑의 하트가 악마 그림보다 몇 배는 많다고 누군가는 나를 위로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도, 그 말들이 오늘은 내 마음에 닿질 않는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바꿔 먹기로 했다. 그래, 그 편이 낫겠다.


내일은 화내지 말자고 매일의 결심을 하는 엄마에게 충격적이긴 해도 딸아이의 편지가 딱 맞는 [화]에 대한 처방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꽤 센 충격을 먹었으니, 이제 처방전의 약발이 제대로 먹히길 바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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