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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제주도에서 사는건가?

얼떨떨한 마음 안고 제주도로 향하는 길

by 말로이

며칠 비가 와서 걱정했는데, 이사 당일 부산의 날씨는 화창했습니다. 제주도 이사는 다른 이사보다 비교적 고려할 부분이 많은 이사였습니다. 같은 지역으로 가는 이사는 내 이삿짐만 생각하면 되는데 이번에는 친정과 시댁의 짐도 함께 챙겨야 했습니다. 9월에 인사를 나누는 일정도 꽤 많았습니다. 언제든 볼 수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과 타지로 가서 한동안 보기 힘든 것은 다른 일이니까요. 9월 한 달 동안 따뜻한 마음을 한껏 느낀 동시에 체력적으로 피곤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가져가야 할 짐, 친정과 시댁에 가야 할 짐, 폐기해야 할 짐들이 모두 많은 이사라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사 당일 집에 남아있는 주변 친구들의 옷을 종이 가방에 각각 정리해 두었습니다. 자매들이 바로 전날까지 친구 집에 놀러 갔었거든요. 옷을 바꿔 입기도 하고, 내복을 빌려 입기도 하면서 집에 친구들 옷이 남아있었습니다. 총 5집에 가야 할 짐들을 정리해 담았습니다. 그리고 이삿짐에 섞이지 않도록 복도에 빼놓았습니다.


매번 이사할 때마다, 이삿짐센터 복이 많았습니다.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납니다. 이번 이삿짐센터 분들도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삿짐센터에서 짐을 싸는 속도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얼마나 빠른지 거의 모든 짐들이 한꺼번에 포장이 됩니다. 아파트 관리실에 다녀온 저는, 얼른 집으로 들어가 미리 빼놓지 못한 도마뱀 구출하고, 시댁에 갈 물건을 다시 빼며 잠시 전쟁을 치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히 빼놓아야 하는데, 그날따라 정신이 없더라고요. 잠시 볼일을 보고 올 때마다 후다닥 이삿짐들이 포장됩니다. 이제는 짐들이 포장되어도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며 방해가 되지 않게 비켜섰습니다. 물어보시면 필요한 부분을 말씀드리고, 제 할 일을 하기도 하며 오전을 보내었습니다. 그러다 이삿짐이 80% 포장되었을 때 텅 빈 옷방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아이들이 자주 놀던 놀이터와 제가 한눈에 반했던 소나무가 보이는 방입니다. 빈 옷방을 들어가며 창밖을 보는데 아랫니가 간질간질했습니다. 간질간질한 느낌에 집중하니 어느새 가슴으로 간질간질한 느낌이 넘어갑니다. '아직도 이런 마음이 남아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몸은 늘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주도에 가는 것이 실감 나지 않지만, 몸은 이미 변화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종이 가방 5개를 각자 집에 걸어두고 오는 중

간질간질한 느낌을 느껴보는 것도 잠시, 또다시 해야 할 일에 집중해 봅니다. 자잘하게 해야 할 일들이 있거든요.


아파트에서 해야 할 것

1. 관리실에 이사 전 미리 전화해서 엘리베이터 신청하기

2. 아파트 헬스장 해지 신청하기

3. 관리실에서 정산한 관리비 문자로 보내주면 관리비 입금하기

4. 관리실에서 관리비 영수증과 장기수선 충당금 영수증 받기

5. 부동산 가서 비용 정산하기 (장기수선충당금도 받기)


이삿날 개인적으로 해야 할 것

1. 각 집에 전달하지 못했던 물품 전달 (아파트 문 앞에 걸기 5집)

2. 아이들 등원 시간에 가서 아파트 이웃과 마지막 인사 나누기 (둘째는 미리 등원)

3. 제주도에 가기 전 우체국에 보내야 하는 서류 보내기

4. 첫째 픽업 후 볼일을 보고 둘째 픽업하기

5. 이번 해에 못 가본 동네 맛집에서 점심 먹기


짐을 모두 싣고, 남편과 가장 많이 나눈 이야기는 "제주도에서 어떤 삶이 펼쳐질까?" , " 느낌이 어때?" 등의 이야기였습니다. 같은 말을 반복해도 누구 하나 이상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을 만큼 저희 부부에게는 특별한 도전이었거든요. 구체적으로 계획하지 않고 출발한 제주살이기에, 이사 당일 이 순간이 믿기지 않기도 했습니다. 언제, 어떻게, 무엇을 얻고 돌아올까?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에서 한 번쯤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은 커가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제주 한달살이는 할 수 있겠지만, 제주살이는 불가능하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떠났습니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평생 "그때 가고 싶었는데"를 반복할 것 같아서요.


자동차를 싣고 제주도로 가야 하기에,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기로 합니다. 배는 밤 11시 30분 출발입니다. 부산에서 모든 일정이 끝난 시간이 오후 2시 30분이라 시간이 꽤 많이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머무를 곳을 검색했습니다. 검색하다가 찾은 곳은 바로 진주에 있는 만화카페입니다. 요즘 만화카페에 어른들 책도 있고, 보드게임도 있고, 음식도 먹을 수 있고 쉴 수 있는 공간도 있습니다. 영상도 감상할 수 있고요. 우리 가족이 배를 기다리기에 딱 맞는 장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보니 4인이 들어갈 수 있는 아주 큰 방도 있더라고요. 옆 방에 안마의자도 있어 휴식을 취하기 좋은 공간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그 유명한 '귀멸의 칼날'을 조금 읽었습니다. 2권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유명한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피로도 풀고, 블로그도 올리고, 만화도 읽고 보드게임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며 시간을 보내봅니다. 오랜 시간을 보냈음에도 아쉬움을 느끼며 만화카페를 나와 삼천포 신항으로 향합니다.


사실 제주살이를 단순하게 외쳤지만, 제가 꽤 겁쟁이라 제주도로 향하기 전 긴장을 많이 했습니다. 아마 하나하나 생각했으면 떠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직장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을 때 걸렸던 과민성대장증후군 증상도 있어 이사 전에 약도 두 번 처방받았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는 깨끗하게 사라졌으나 설렘과 함께 찾아온 긴장감을 몸은 알아버렸나 봅니다. 늘 몸이 먼저 알고, 마음이 나중에 알아차립니다. 마지막 약은 조금 길게 처방을 부탁드렸습니다. 마음의 안정을 찾으며 이 약으로 몸도 안정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만화카페에서 나와 삼천포항으로 향합니다. 항으로 가는 길이 꽤 어둡더라고요. 선착장도 어둡고요. 아이들에게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둘째에게 "멀리 가지 말고 엄마 옆에 붙어있어!"라는 날 선 말을 내뱉습니다. 그 말로 이미 엄마의 긴장이 아이들에게 전해집니다. 남편이 제 긴장을 느꼈는지 제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봅니다. 남편이 제 얼굴을 그렇게 쳐다보는 건, 제가 평소와 다르다는 뜻입니다.


삼천포 선착장에는 왜인지 모르게 인상이 무서운 아저씨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긴장이 풀린 순간이 있었는데요. 험상궂어 보이는 (실제는 아니었을 수도 있는...) 아저씨들 틈에 저희 이삿짐을 옮겨주시는 화물차 아저씨가 계시더라고요. 아이들과 지나가는데 "제주도 가니?"라고 물어보셔서 쳐다보았더니 이삿짐을 포장할 때 뵈었던 분이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드리고 보니 제가 무서운 인상이라 느꼈던 분들이 서로 웃으며 이야기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분들이 모두 화물운송하시는 분들이라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그러자 긴장이 조금은 풀립니다.


모바일 탑승권을 발급 받아 자동차를 싣고 배를 타는 과정 또한 조금은 생소해서 또다시 긴장됩니다. 사실 배에 오르자마자 꽤 피곤했는데요. 둘째 딸 또한 긴장한 것 같아 편하게 잠을 잘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여기저기 둘러보고 간식도 먹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듭니다. 중간중간 깨긴 했지만 새벽이 빠르게 왔습니다. 제주도에는 새벽 6시 30분 도착 예정입니다. 5시 50분쯤이 되자, 방송으로 자동차로 가서 대기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얼른 준비해서 자동차가 주차된 배의 지하로 가봅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제일 마지막으로 차를 탔었거든요. 제일 빨리 나갈 거로 생각하며 미리 차에 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맨 처음 배에 자동차를 실은 사람이 맨 처음으로 나가는 거더라고요. 내릴 때는 나가는 방향이 반대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부산으로 돌아갈 때는 배에 빨리 탑승하자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덥고 습한 자동차 안에서 꽤 오랜 시간 대기하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더위에 현기증이 나기 직전에 자동차는 배 바깥으로 나갑니다. 자동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에어컨온도도 낮아지니 조금은 살만해집니다.


제주도에 내리니 어두운 항구에 비도 추적추적 내립니다. 예전에 집을 보러 제주도에 왔을 때처럼, 제주의 드라마틱한 풍경을 감상할 수 없었지만, 그 나름의 운치가 있었습니다. 스레드에 비가 오는 풍경을 올렸더니 사람들이 응원을 해줍니다. 그중에서 특히 마음에 드는 댓글이 있었습니다. '크~ 비가 반겨주는 건 제주살이 아주 웰컴 한다는 뜻이야!!'라고요. 이 관점을 선택하기로 합니다. 오늘 제주도가 우리 가족을 무척이나 반겨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신나게 저희가 살 집으로 향합니다.


그때 갑자기 전화기가 울립니다. "띠리리리링"


"여보세요? 네, 이사업체입니다. 잘 오고 계시죠?? 오늘 비가 많이 오네요. 오후에는 조금 더 쏟아질 것 같아요. 오늘 이사를 하면 가구가 많이 젖겠어요. 혹시 이사를 내일 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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