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운 가정출산의 기록
'빨리 아팠으면 좋겠다.'
죽을 듯이 아플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시작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진통을 상상하면 눈물이 날 정도로 무섭다. 초산 때는 그 정도를 상상할 수 없기에 두려운 줄을 몰랐는데 세 번째 출산이 닥치자 출산의 고통이 다시 현실로 다가왔다. 하지만 견뎌내야만 아이를 만날 수 있기에 차라리 빨리 지나가는 게 나았다.
예정일이 이틀 뒤로 다가오면서 과연 언제 어떻게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올까 하는 상상을 수십 번 반복했다. 한밤중일까 아침일까 물속이 좋을까 바닥에서 낳을까. 이왕이면 따뜻한 봄햇살이 가득한 오후 시간이면 좋겠는데, 주말에 출산이 이뤄져야 급하게 남편과 조산사님을 부르는 사태가 생기지 않고 여유 있게 진행을 할 텐데, 별의별 생각과 바람으로 머리 속이 가득했다. 배는 단단히 뭉치지만 아직 진짜 진통은 아니었다. 세 번째인데 진진통의 느낌을 모를 리가. 날것의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두려워하면서도 기다리는 복잡한 심정이 교차했다.
그리고 출산 전날 밤.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했다. 피곤한데 잠은 안 오고 스쿼드와 스트레칭 등 순산을 돕는 운동을 하면서 새벽 4시에 억지로 침대에 누웠다.
'스르륵'
아. 이 느낌이다. 진짜 진통의 싸한 느낌. 시계를 보니 아침 7시. 이어서 25분 뒤 다시 한번 약한 진통이 오는 듯하다. 그리고... 물이 샜다.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누웠던 자리를 살폈다. 양수가 터진 게 분명하다.
"오늘이야? 드디어 만나는 거야?"
남편도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는지 일어나 아침을 차려주었다. 그사이 진통 간격을 재어보니 규칙적이다. 조산사님께 전화를 걸어 오셔야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부모님께도 연락을 취했다.
아직 진통은 20~30분 간격이고 약했다. 갑자기 청소를 해야겠다 싶어 걸레를 집어 들고 화장대며 가구들을 닦기 시작했다. 아이를 맞이하기 전에 집을 깨끗이 단장하고 싶은 욕구가 본능적으로 발현되나 보다. 결국 지켜보던 남편이 아이를 만나기 전 마지막 대청소를 시작했다.
오후 12시. 남편이 미역국을 끓여주었다. 조산사님과 함께 웃으며 수다를 떠는데 꽤 강한 진통이 왔다. 이제 진통의 간격이 꽤 짧고 강해졌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기로 했다. 3월 중순 일요일의 날씨가 참 좋았다.
"우리 카미 정말 좋은 날 나온다. 그렇지?"
우리는 아이의 성별을 아직 모르지만 이름은 지어두었다. Camille는 한국인에게는 낯설지만 프랑스에서는 참 예쁜 이름이다. 남편의 손을 잡고 우리가 사는 건물 주변의 캠퍼스 안을 걸었다. 그러다 진통이 오면 그에게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는데 그 와중에 연애하는 기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오후 1시. 창밖으로 부모님의 차가 도착한 모습을 확인했다. 4시간을 달려오신 거였다. 도착하기 전에 아이가 나올까 봐 헐레벌떡 오신 게 분명했다. 손주의 탄생이 처음도 아닌데 늘 긴장과 설렘으로 기다리신다. 이번에는 어떤 녀석이 나올까 기대가 잔뜩 이셨다.
출산 1시간 전. 진통이 극에 달해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침대에 누워 진통을 계속했고 동시에 물속이 아닌 침대 위에서 출산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생각보다 너무 많이 아팠다. 분명 셋째는 덜 아플 거라고 기대했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자갸 나 애나 때보다 더 아픈 거 같아."라고 했더니 남편이 한마디 툭 뱉는다.
"C'est pas possible~그건 불가능해~"
엄살 피우지 말라는 뜻이었다. 순간 이 아픔을 공감해주지 못하는 남편이 얄미웠다. 뭐라 말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세 번째 출산이 더 아픈 근거를 논리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었고 고통 때문에 반박하는 말을 이어갈 수도 없었다. 그저 왜 이렇게 아플까,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뿐이었다.
끙끙거리면서 힘들어하자 남편은 집중하라며 '후우~ 우우~~'하고 나와 함께 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억? 이 냄새 뭐야 그새 담배를 피우고 왔어!
그래도 함께 호흡을 하자며 애쓰는 남편이 고마워 그가 내뱉는 숨을 한 번 참고, 두 번째 날숨까지도 참았다. 그런데 세 번째 날숨이 내 얼굴을 가득 덮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남편의 입을 막으면서 외치고 말았다.
"악 너 숨 쉬지 마아아아악!!!"
숨 쉬지 말라는 말이 잔인한가 싶었지만 더 이상은 그를 배려할 정신이 아니었다. 목숨을 내걸고 임하는 출산이 진행 중인데 이 와중에 흡연이라니.
지켜보던 조산사님은 조용히 마스크를 꺼내 남편에게 건넸고 그이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얌전히 받아 썼다. 출산이 끝나고 뒤돌아보니 이 장면이 어찌나 우스웠던지.
후에 조산사님 말씀으로는 남자아이들이 뼈대도 크고 힘이 좋아 진통하는 엄마를 종종 힘들게 한다고 한다. 어쩐지 눈물이 다 나올 지경으로 너무 아프더라. 흑. 남편도 이 고통을 겪어봐야 온전히 이해하겠지? 그럴 방도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진통이 한번 올 때마다 극심한 고통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이제 한 번만 더 힘을 주면 아이가 나온다는 소리에 진통이 오길 기다렸다가 있는 힘을 다해 아래로 힘을 주었다. 이번 진통을 놓치면 안 된다, 더 이상 고통은 싫다, 마지막 이어야 한다는 절실함 덕분에 끝까지 놓치지 않고 힘을 주었더니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소리를 지르면서도 아이의 머리가 나오고 90도로 회전을 한 다음 이어서 어깨와 엉덩이, 다리가 빠져나오는 과정이 하나하나 느껴졌다(혹시나 읽는 분들이 불편할까 봐 더 자세한 묘사는 피했다). 수중분만에서는 물의 압력 때문인지 이처럼 상세하게 느낄 수 없었는데 아이가 내 몸을 나오는 이 모든 과정이 느껴지다니 신기한 기분마저 들었다.
남편은 아내가 죽을 둥 살 둥 세상에 내보낸 아이를 직접 받아 안았고 내가 몸을 돌려 바르게 눕자 배 위로 아이를 올려주었다. 안도와 감동이 몰려왔다. 남편의 눈시울이 붉었다. 우렁차게 울어대는 아이의 얼굴이 남편을 꼭 닮았다.
"카미야 안녕? 너무 고생했어!"
태반까지 나오고 나니 그렇게 시원하고 쾌감이 느껴질 수가 없었다. 지독하게 아팠는데 그만큼 큰 희열이 찾아왔다. 겪어본 자만이 공감한다는 황홀한 출산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그렇게 너무 소중한 한 생명이 하나 더 찾아왔고 나의 세 번째 자연출산이자 두 번째 가정분만은 마무리가 되었다. 늘 그랬듯 온 가족이 둘러앉아 함께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고 사진도 찍고 기쁨을 만끽했다. 오직 내 집에서 출산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기는 건강하고 힘이 좋았다. 생애 처음으로 젖을 빠는 아기 위로 봄날 오후 햇살이 드리워졌다. 매번 출산을 할 때마다 가장 소원하는 것들이 한 가지씩 있었는데 돌이켜보니 모든 게 다 이루어졌다. 첫아기는 물속에서 낳을 수 있기를, 둘째는 큰아이를 비롯한 온 가족이 함께 집에서 맞이하기를, 세 번째 아기는 느긋한 봄날 오후에 찬란한 햇살을 받으며 태어나기를 바랐었다. 거짓말처럼 아무런 문제도 없이 소망하는 바가 현실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내 인생에 출산이란 원래 그러하도록 계획되었던 것처럼.
가끔 나는 운이 좋아서 자연출산을 만났다는 생각을 한다. 인생의 가장 큰 이벤트 가운데 하나인 출산을 내 마음대로 치러냈으니 말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여성들에게 출산은 수치스럽고 불쾌하게 기억된다. 반면 나에게는 즐거운 추억거리이자 힘이 되는 경험이었다. 아이들도 엄마의 자궁을 힘차게 헤쳐 나와 평화롭게 세상을 맞이한 경험이 무의식 중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자궁 밖도 아름답고 따뜻한 곳이었다는 경험이 삶의 위기를 견뎌내는 힘이 되기를 기도한다.
내 인생에 더 이상의 출산은 없을 것 같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된 것을 감사해하며 잘 키우는 데 집중할 생각이다. 낳고 보니 아이들이 국적도 다르고 성별도 다양하게 되어버렸다. 그만큼 키우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고 감당하기 벅찬 일들도 많이 벌어지겠지. 두렵지는 않다. 이겨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어려움도 즐겁게 헤쳐나갈 힘을 갖고 있음을 나 스스로 확인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