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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리 Oct 04. 2017

시어머니의 이름을 부른다면?

명절 단상

매년 프랑스에 가면 남편 쟝의 가족들과 친지들을 만나게 된다. 특히 지난 겨울에는 결혼식이 있어 한번에 모든 친지들을 만나게 되었고, 생전 처음 만나는 분들이 많아 인사를 나누기 바빴다. 시아버지의 형제는 7남매, 시어머니의 형제는 4남매이시고, 형제들과 사촌들, 배우자 그리고 그분들의 자녀들과 배우자 혹은 연인, 아이들까지 하면 엄청난 대가족이다. 쟝의 할아버지는 지금 여자 친구와 함께 살고 계신데, 여자 친구와 그분의 가까운 가족들과도 인사를 나누는 일을 거치고 나면 머리 속은 온통 뒤죽박죽이 된다. 어차피 뇌 용량에 한계가 있어 한번에 모든 관계와 이름을 입력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하루라도 빨리 기억해보려 애를 썼다. 프랑스 가족들과 인사를 나눌 때 어려움있다면 이름을 정확히 기억해야 다음번에 만나서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기야, 따따(Tata) 세실의 남편 이름이 뭐였지?"

"똥똥(Tonton) 루이"


"그럼 따따 폴린의 남편은?"

"똥똥 니꼴라."


"똥똥 가브리엘의 부인은?"

"따따 마리"


"아, 맞다. 이제 헷갈리지 않을 것 같아."


쓰나미 같은 인사와 비주(bisous 프랑스식 인사. 양 볼에 뽀뽀를 하며 인사를 나눈다)를 한바탕 치르고 나면 쟝과 이와 같은 대화를 나누어야만 했다. 여기서 똥똥(tonton)이란 프랑스어로 부모님의 남자 형제 또는 여자 형제의 배우자를 친근하게 일컫는 말로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 삼촌, 고모부, 이모부 등이 되겠다. 부모님 형제의 행렬은 똥똥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tonton"이라고만 하면 누굴 일컫는지 정확히 알 수 없기에 이름과 함께 불러야 한다. 반면 따따(tata)는 부모님의 여자 형제 또는 남자 형제의 배우자를 친근하게 일컫는 말이다. 이모, 고모, 큰 어머니, 작은 어머니 등.


위 대화 속의 호칭을 다시 한국식 표현으로 바꾸자면,


따따 세실과 똥똥 루이는 첫째 이모와 첫째 이모부,

따따 폴린과 똥똥 니꼴라는 둘째 이모와 둘째 이모부,

똥똥 가브리엘과 따따 마리는 큰 아버지와 큰 어머니


가 되시겠다. 이처럼 호칭을 한국식으로 바꾸고 나면 드는 생각이 있다. 한국에서는 굳이 이름을 기억하지 않아도 누군지 머리 속에 각인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각인되는 요소가 인물 고유의 개성보다 서열과 그 자리에 맞는 호칭이다. 굳이 이름을 기억하지 않아도 어느 집안의 몇 번째 서열에 누구인지를 알 수가 있고 대화를 할 때도 전혀 문제가 없다.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남편이 거꾸로 나에게 한국 친지들의 이름을 물어보았을 때 프랑스식으로 호칭으로 전환해 알려주기가 매우 곤란했다. 우선 나부터 어른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머리 속에는 어른들의 성함보다 '큰 집에 첫째 큰 아버지', '작은 집에 둘째 큰 아버지'이런 식으로 입력되어 있기 때문에 이름을 잊은 지가 오래였다. 게다가 돌림자를 쓰면 더 헷갈리기 일쑤다. 예를 들어 김영수, 김영문, 김영화, 김영주, 김영식, 김영준, 김영민... 과 같은 비슷한 이름이 같은 항렬에 놓여있으니 말이다.

쟝은 한국의 방식을 존중해서 정확한 호칭으로 불러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가족들의 호칭과 이름을 외우기 위해서 꽤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결국 돌림자에서 막히고 말았다. 복잡한 호칭도 모자라 비슷비슷한 이름들이라니!


프랑스 시댁 마을


반대로 나는 모든 시댁 식구들을 '이름'으로 부르는 일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시어머니 대신 조슬린, 시아버지 대신 프랑수와. 이미 한차례 한국식 결혼생활을 경험했기 때문인지, 아직까지 지극히 한국적인 사고방식에만 익숙했던 까닭인지, 처음에는 시부모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너무도 어색했다. 이건 외국인 친구가 많고, 그들의 나이를 불문하고 이름을 부르던 것과는 다른 문제다. 상상해 보시라. 한국에서 라면 당장 "감히 시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다니!" 하는 반응이 나올 것이 틀림없다. 나 역시 시어머니의 이름이 혀 끝에만 맴돌다가, "조.. 조슬린!"하고 튀어나오기도 하고, 남편이 부모님을 부르듯이 "마망, 빠빠!(maman, papa 엄마, 아빠)"하고 부르기도 했다. 오히려 시아버지는


"난 네 아빠가 아니야. 프랑수와 야."


하고 반문하셨을 따름이었다. 그뿐인가, 쟝의 이모부에게도 "똥똥(이모부님)!"이라고 했다가


"내 이름은 루이란다."


와 같은 반응을 얻기 마련이었다. 이런 실수들이 외국인 며느리가 저지르기 때문에 귀엽게 받아들여지기는 했지만, 몇 차례 경험을 통해서 프랑스인들에게는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이 어색하고 간혹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완벽히 프랑스 가족들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고 이름으로 호칭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리고 시어머니 대신 '조슬린'이라고 부르는 그 순간이 좋아졌다. 시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남편의 어머니가 아닌 고유의 영혼과 자유의지를 가진 한 인간을 대면하는 기분이 든다. 나도 마찬가지다. 며느리가 아닌 '나금'이라는 사람으로 조슬린과 대면한다. 그만큼 우리의 대화도 편안하고 자유로우며 주제의 제약이 없다.


첫 번째 결혼을 통해서 얻은 교훈도 이 맥락에 맞닿아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결혼을 하는 순간 며느리라는 '타이틀'이 주어지고, 그 호칭은 신기하게도 ''라는 개인의 색깔을 빠르게 퇴색시킨다. 이상하게 시댁에만 가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이며 내가 가진 취향과 직업이 무엇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어느 집 몇 째 아들의 아내가 되어 사는 삶과 며느리로서 기대되는 행동양식만 충족시켜 주면 되는 것 같다. 아마도 이 땅의 대다수 며느리들이 느끼는 스트레스와 고통이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며느리'라는 의미 이외에 사라져 버리고 무시되는 나란 존재에 대한 허망함과 분노 말이다.


출처 포토뉴스



그 와중에 추석 명절을 앞두고 시댁, 처가 식구 호칭 문제로 싸웠다는 한 부부의 사연을 듣게 되었다. 시가 구성원에게만 존칭을 붙여야 하는 관행은 분명 성차별적이다. 명절만 되면 발생하는 스트레스도 결국 성차별적인 문화가 개선되어야만 줄어들 것이다. 가부장적인 문화가 굳건한 우리 사회에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 한 둘은 아니지만, 만약 성차별적인 어휘를 개선한다면 어떻게 바꾸는 것이 좋을까?


사실 대체할 만한 적절한 대안을 찾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 같다. 그렇다면 그냥 깔끔하게 이름을 부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름 뒤에 덧붙일 '님'이라던가 거부감을 없앨 적절한 호칭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10여 년 전에는 아가씨, 도련님, 며느리 대신에 새 동생, 시제, 자부 등이 제안되었다고 하는데 제안된 호칭이 더 낯설고 세대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결국은 개인의 '이름'을 찾는 것이 본질에 가깝게 접근한다는 생각이다. 서열과 위치보다 개인을 존중하는 문화의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친지들의 호칭을 간략화하거나 이름을 부르는 일이 현실화될 수 있을까?'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자신 있게 답할 수가 없다. 나 조차도 그것이 당연한 문화를 받아들이는 일이 금세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니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이른 변화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변화란 '어, 이래도 될까?' 싶게 갑작스레 찾아오는 것이니까. 성평등으로 가는 길목에 서있는 지금, 적절한 대안을 찾는 논의가 중단되지 말고 힘을 받아 추진되기를 기대해본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딸들과 며느리들이 제 이름과 목소리를 찾는 날이 오기를. 모두가 온전히 행복한 명절을 보내는 날이 오기를!


모두 해피추석! 출처 카카오프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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