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영신 <아티스트>
마영신은 어느덧 대단한 작가가 되었다. 그는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솜씨좋게 풀어낸 <엄마들>로 2021년 하비상의 ‘최고의 국제 만화’ 부문을 수상했다. 서구의 평단이 이 만화의 어느 부분을 그렇게 호평했을까를 알기는 어렵겠으나, 마영신이 현실의 풍광들로부터 정확한 하나의 상(image)를 끌어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에는 서로 동의가 가능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영신은 권용득, 송아람, 김수박 등의 사실주의 스토리텔러 처럼 읽힐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다음 웹툰(현 카카오 웹툰)에 연재되었던 <아티스트>도 그러한 사실주의로 읽히기 쉬운 작품이다. 실제로 댓글 중에는 ‘어떻게 이렇게 예술과(科) 사람의 행동을 정확하게 그리시는가, 혹시 나의 집에 CCTV를 달아놨는가’하는 너스레가 전시되곤 할 정도이니, 마영신이 예술인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된 인간 군상의 추잡함과 허레를 매우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는 것은 어느 정도 공통된 평가일 것이다. 이 만화는 세 주인공이 가진 근본적인 삐뚤어짐, 질투의식 따위를 묘사하며 시작한다. 혹자들은 이렇게 표출되는 그들의 불편한 성품이 바로 만화의 제목인 ‘아티스트’와 연결되는 지점일 것이라 기대할 수도 있다. 물론, 마영신은 이러한 기대를 정확히 비껴나간다.
사실 <엄마들>을 보는 독자들 역시 일견 우리 세대의 ‘엄마들’을 있는 그대로 다루었다는 점에 포커스를 맞출 확률이 농후하다. 하지만 <엄마들>의 미덕이 그러한 관찰의 결과에 있다고만은 하기 어렵다. <엄마들>에게 어떠한 위대함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전형성의 표층과 실재의 심층이 정확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부분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그리는 ‘엄마’들은 우리의 기대를 위배하는 철저히 욕망적인 존재이지만 그런 한편 그들을 우리의 인식(=모성애의 표출자) 바깥에 있는 괴물로 그려내지도 않는다. 마영신이 그린 엄마들은 한두개의 카테고리 내부에 넣을 수 없는 매우 복합적인 존재이며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잃어버렸던 ‘엄마’라는 표상의 진위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마영신은 매우 ‘정확하게 그리는 작가일 뿐 아니라 우리가 미처 직시하지 못하는 본질까지 복원하려는 의지를 지닌 작가다. 그는 결코 단순한 희화나 정확한 묘사라는 미명하에 만들어지는 편향성 따위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티스트>는 어떠한 목적의 결과물인가. 마영신의 작법은 어떤 면에선 신화적이기도 하다. 그는 욕망을 지닌 세 ‘아티스트’에게 동일한 시련을 부과한 뒤, 그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지키는 지 알아보려고 한다. 재미있게도 그가 내리는 시련은 다름 아닌 물질적 성공이다.
만화는 한 때 남성 예술인들의 모임이었던 ‘오락실’에 남은 유일한 세 남자 신득녕, 김경수, 천종섭의 일화를 그리며 시작된다. 이들은 한 때에 자신들과 같은 ‘오락실’에 있었지만 지금은 성공해서 모임으로부터 모습을 감춘 자들에 대한 말들로 작품의 포문을 연다. 이 때에 이 ‘성공’은 무엇으로 규정하는가? 마영신은 어쩌면 이 질문으로부터 출발했을 수 있다. 그러니까 ‘묘사의 대상이 모두 예술가’라는 작품의 특징이 애초부터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유발되었을 수 있다는 의미다. 대다수의 인간들에게 있어 성공은 정확히 물질 세계에서의 성공과 연계된다. 하지만 때때로 사람들로부터 그러한 표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벗어나길 기대하는 대상들이 있다. 그들은 성인, 종교인 혹은 예술적 순수성을 추구하는 순수한 예술가로 좁혀진다. 따라서 <아티스트>의 목표는 우리 시대의 예술가들이 가진 전형적 표상을 훔쳐내는 것 따위가 아니라, 오히려 물질 세계의-그러니까 돈과 권력 따위로 정리되는- 성공이 작동하는 양태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때문에 마영신은 이 세 사람의 성공의 루트와 형식, 그에 따른 리액션의 결과를 매우 자세히 그리려고 노력한다. 작품은 꽤나 꼼꼼하게 이들 성공의 성격을 분리해서 표현하는데, 이를테면 김경수는 계급 상승의 지향, 천종섭은 갑작스러운 자산의 증가, 신득녕은 목표지향적 성과의 도출으로 그려진다. 마영신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혹은 몰락하는가를 지켜보는 데 더 관심을 두고 있는 셈이다. 또한 이 모든 성공의 찬탈이 정확히 어떻게 권력을 생산하는지, 그리고 그 생성된 권력으로부터 이들이 어떻게 버티어내는지를 그려내려고 한다.
이런 목표는 때때로 정확한 언어로 표출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출판사 ‘오락실’의 성공 이후 잡지의 운영 방식에 클레임을 받은 득녕은 ‘지금 과연 권력은 어디로 옮겨갔는가’를 자문한다. 성공이라는 결과가 근본적으로 권력과 결부된다는 사실을 짚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잡지의 수익을 1/n로 나누겠다’고 선언한 득녕이야 말로 스스로 반권력적 시스템 구축을 천명했던 자라는 점이 특기할만하다. 득녕은 자본주의적 목표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성공을 달성한 존재이며, 따라서 그가 획득한 권력은 자의적 유발이 아닌 과정의 결과로 규정된다. 득녕의 성공을 통해 물질 세계의 성공과 권력의 단단한 결속이 드러나는 셈이다.
이런 과정이 바로 마영신이 바라보는 세계의 형태이다. 마영신이 지금 주장하는 것, 그것은 권력이란 생성되는 것이며, 그렇게 생성된 권력은 그 생성자의 도덕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권력이란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푸코의 논의와 연결된다. 하지만 이렇게 권력 유발자의 도덕성을 문제로부터 제거할 때, 말하자면 시스템을 통해 생산된 권력으로부터 부도덕이 생성된다는 전제를 받아들였을 때, 도덕성의 문제는 오히려 개인의 선택이라는 차원으로 축소되어버린다. 말하자면 권력을 통해 생성된 부도덕을 체화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개인적 선택의 문제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아티스트>는 그러한 세계에서 상이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왜 득녕이 다른 두 사람과 다른지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다. 그렇다. 왜 득녕은 다른 두 사람과 달리 권력에 잡아먹히기 보다는 그로부터 계속 빠져나오려 노력하는가?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만화규장각 홈페이지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