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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 Jan 08. 2024

요나단'들'의 목소리

정해나 <요나단의 목소리>

※ 본 원고는 연재판이 아닌 단행본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만화는 언제나 소리라는 매개 앞에서 머뭇거린다. 이것은 꽤 오래전부터 마주해온 곤란함이다. 소리를 어떻게 시각화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 만화의 환경이 디지털로 넘어오면서 이를 기술적으로 해소하려는 시도가 있었기야 했지만(한국 웹툰에서 종종 사용되는 ‘패럴렉스 스크롤’ 기술을 생각해보라.), 이는 결국 기술 기반의 한정적 가능성에 머무를 뿐이었다. 애초에 만화는 그러한 청각 매개의 즉시적 연결을 포함하지 않기에, 사운드의 기술적 재생은 만화라는 현상 외부에 설계된 참조에 불과했던 것이다. 기술적 해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만화라는 현상을 통해’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가에 대해 묻는 것이다.


les choristes 그리고 破愛

해나(haena)의 <요나단의 목소리>는 제목에서부터 그러한 문제를 다루겠다 선언하고 있다. 실제로 작가 해나는 예스24와의 인터뷰에서 ‘읽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각기 다른 소리가 재생되는 것이 만화의 재미있는 강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만큼 <요나단의 목소리>에서 목소리(또는 소리)라는 것은 작품의 핵심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요소일 것이다. 작품은 미션스쿨계 기숙사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선우와 종교를 가지지 않은 의영의 만남으로 문을 연다. 이 만남의 가장 커다란 사건은 의영이 선우의 목소리를 인지한다는 부분에 있다. 그리고 이때 이 만화의 첫번째 흥미로운 지점이 걸린다. 해나는 이상하게도 이 ‘첫 만남’에서의 선우의 목소리를 특별히 그리지 않는다. ‘특별히 그린다’의 의미란 음악임을 알리기 위해 음표를 그리거나, 말풍선의 형태를 달리하거나, 회화와는 다른 서체를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해나는 의영에게는 특별했을 그 목소리를, 그저 서체를 기울인 정도로 처리하고 넘어간다. (이 미세한 기울임은 텍스트를 자세히 보기 전까지는 거의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해나의 이런 선택은 어쩐지 목소리라는 그 자체의 특별함을 의도적으로 건너 뛴다는 인상을 준다. 말하자면 선우의 소리가 특별할지언정,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리의 보편적 특별함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우의 인지와 독자의 인지 간의 불일치는 어떠한 소리가 진정 특별한 소리인가를 짚어주기 위한 전제처럼 보인다. 해나의 연출적 특별함은 (그가 소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인지시켜주듯) 칸과 칸, 말풍선 간의 미세한 리듬감을 꽤 정확히 잡아낸다는 점에 있다. 단 그러한 방법은 오직, 그 장면이 특별하여야 할 때에만 작동시킨다. (그런 면에서 그 음악적 리듬이 더욱 확실히 작동한다 말할 수 있다.) 이것을 확고히 보이는 장면이 바로 선우가 의영에게 시간을 내어 ‘les choristes’를 불러주는 장면일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페이지에 얹어지는 하나의 말풍선.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외곽선이 지워진 전면의 칸 속 두 사람의 위로 떨어지는 두 개의 말풍선. 이 때 발생하는 이 리듬은 그것의 원본인 ‘노랫 소리’의 재현과는(가사간의 체험 간격이 실제와 다르다는 측면에서)상당히 동떨어져 있을 수는 있겠으나, 그 소리가 만들어내는 어떠한 본질에는 정확히 맞닿아있을 것이다. 채플 시간마다 들을 수 있던 선우의 목소리와 독창하는 선우의 목소리란 물리적으로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다른 것은 오직 그것을 받아들이는 의영의 마음, 그리고 선우가 채우고 있는 그 공간의 분위기 그리고 지금 작품과 맞닿는 우리의 감각일 것이다. 해나는 이런 방법을 통해 특별한 소리라는 것을 이렇게 규정한다. 해나에게 있어 소리는 매질에 의한 음파의 확산과 반향, 그 수용이라는 물리적 조건에만 있지 않다. 소리란 발화자와 수용자의 관계, 그것이 이루어지는 발화의 조건들, 최종적으로 그 모든 것이 맞닿아 이루어지는 감정의 움직임에 그 본질이 있다.


말하자면 목소리의 아름다움이란 역으로 그것을 매개하는 두 사람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셈이다. 따라서 ‘les choristes’를 부르는 이 장면은 선우와 의영이 서로에게 어떠한 존재로 보이는지를 확연히 말해준다. 그리고 이후 자우림의 ‘파애’를 부르는 다윗의 독창 장면은 다시금 ‘les choristes’의 독창 장면을 연상시킬 수 있도록 구성되어있다. 이 노래방 장면 전체를 다시 톺아보면, 해나는 아름다운 소리를 가진 선우보다도 오히려 다윗의 이 다듬어지지 않은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기를 바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이것이  <다윗의 목소리>가 규정하는 소리의 본질이다. 목소리의 아름다움이란 관계와 감정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다. 다윗의 목소리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그 섬세함을 꿰뚫어보는 선우의 애정어린 시선이다.


빛과 소리

따라서 <요나단의 목소리>에서는 소리의 수용자가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그가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그와의 감정적 유대를 어떻게 만드느냐가 소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또 다른 독특한 지점이 있다. 이 만화는 의영과 선우를 두 발화자로 삼은 뒤, 양자를 각각의 시간대로 묶어 전달한다. 그런데 불쑥, 이 만화에는 세번째 발화자인 주영이 끼어든다. 정확히 주영의 일인칭 내레이션은 두 장면에서 발화되는데, 그것은 주영과 다윗의 과거 사진을 선우가 본 직후에 다윗에 대한 마음을 말하는 장면과 다윗이 사망하기 직전에 다윗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의 이야기를 말하는 장면이다. 이 두 장면은 선우의 언어들로부터 이상할 정도로 분절되지 않은 채 이어져, 얼핏 신경쓰지 않으면 언제 주연의 언어로 건너왔는지 인지하지 못할 정도다. 그리고 이 장면들을 구성하는 색이 이들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요나단의 목소리>는 딜리헙에 연재될 당시 흑백으로 연재되었다. 그리고 이후 단행본이 발매될 때에야 해나가 직접 작화를 수정하고 색을 넣는다. 그런데 이 채색은 단순히 구매 독자를 위한 서비스(그러니까 인지의 정도를 확고히 만들기 위한 단순 작업)로 삽입되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여기에는 명백한 작가의 의식이 읽히는데 이를테면 의영이 주요 발화자인 시간대에는 한색(寒色) 컬러링이, 선우가 주요 화자인 시간대에는 난색(暖色)의 컬러링이 주로 사용되고 있는 부분이 그렇다. 또한 다윗 사후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선우의 마음을 표현하는 장면은 점차 밀려드는 물 속에 침잠되는 방식으로 묘사되는데, 채색 원고에서는 이 물에 확실한 ‘푸른빛’을 부여한다. 덧붙여 다윗과 처음 만난 장소에서 자신도 모르게 머리에 상처를 낸 선우와 방에서 기도를 읊으며 침대에 눕는 장면의 연결에서도, 방문은 난색과 한색의 그라데이션으로 처리되며 두 시간대를 잇는다. 난색과 한색이라는 이 두개의 틀은 시간대의 구분과 형성을 위한 단순배치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색들은 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한 사람, 선우의 감정이 고스란히 반영된 색이다.


다시금 앞선 전제로 돌아갈 수 있다. <요나단의 목소리>에서 목소리란 발화자와 수용자의 관계와 감정의 맥락으로 구성된다. 즉 우리가 보는 장면이 관계와 감정의 맥락을 통한 ‘소리’의 시각화라면 이 색들 역시 그 작동의 결과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일 것이다. 이를 따르자면 <요나단의 목소리>는 선우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만화다. 그리고 단행본에서 삽입된 두 개의 색은 우리에게 선우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매질처럼 작동한다. <요나단의 목소리>라는 제목이 지칭하고 있는 대상은, 확실히 선우의 목소리다. (물론 성경에서 요나단과 다윗과 어떠한 관계였는지를 알고 있다면 충분히 떠올릴 수 있는 맥락이다.) 말하자면 이 두 개의 색은 감정의 색이며 곧 목소리의 색이 된다. 감정은 소리와 분리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만화규장각 홈페이지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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