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Gaming Monthly

3 - 빌딩 앤 매니지먼트 인터페이스

건설/경영 시뮬레이션에서의 정치

by 이선인

건설/경영 시뮬레이션이라는 건 도대체 무엇을 시뮬레이션하는 것일까? 게임의 장르에는 쉽사리 ‘시뮬레이션’이라는 단어가 붙곤 하는데, 사실상 이것의 원본이라는 것은 도통 상상하기 어렵다. 「심시티」는 고전적으로 ‘시장의 관점’을 시뮬레이션 한다고 주장하지만, 세상 어느 시장이 도시의 구성 계획을 ‘그림을 그리듯이’ 그려넣을 수 있을까. 도시계획의 여부와 가능성은 주어질지언정 그것이 즉각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무래도 시장의 행위라고 보기 어렵다. 물론 그렇다고 도시계획 전문가의 시뮬레이션으로 보기에도 세금, 복지, 공공 영역에 대한 컨트롤 권한이 지나치게 많기도 하다. 사실상 이것은 ‘시뮬레이션’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플레이play를 위한 구성된 소프트웨어라고 밖에 규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이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 켈리 클랜시Kelly Clancy가 와이어드Wired에 게제한 《SimCity Isn’t a Model of Reality. It’s a Libertarian Toy Land》가 그것이다. 자신의 책 《Playing with Reality》의 내용 일부를 편집한 이 기사는「심시티」가 구축되는 와중에 특정한 정치적 입장이 반영되었음을 서술한다. 제목부터 흥미롭다.「심시티」는 현실의 모델이 아니라, 보수적 리버테리언들의 장난감 세계일 뿐이라는 것. 그것은「심시티」의 메커니즘이 특정한 ‘편향’에 의해 성공성을 담지한다는 것이다.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다.


“빈센트 오카슬라Vincent Ocasla는 인구 600만 명의 안정적인 도시를 창조해낸 적이 있다. 단 하나의 문제는? 그곳은 자유지상주의적 악몽의 세계였다. 공공 서비스는 전혀 없었고—학교도, 병원도, 공원도, 소방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만든 디스토피아에는 시민들과 집중 배치된 경찰력만이 존재했고, 하나의 암울한 시가지 블록이 끝없이 복사되어 펼쳐져 있었다.”


이는 「심시티」의 구축 메커니즘에 있어서 제이 포레스터Jay Forrester의 이론이 적용되었고, 포레스터는 잘 알려진 보수적 리버테리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윌 라이트가 어떠한 정치색을 도출시키기 위해 이런 선택을 했다고까지 말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도시 건설/경영이라는 메커니즘을 작동시키기 위해 이론적 베이스가 필요했을 것이고,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에 관련된 스무권이 넘는 책을 독파했다고 한다. 이 결론은 그런 과정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기사를 따르자면) 클랜시는 포레스터의 이론을 수용한 것으로 인과를 설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이 「심시티」라는 게임에만 고유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건설/경영 시뮬레이션들도 「심시티」와 유사한 감각을 준다. 좀 과도하게 말하자면 이 장르는 플레이어를 (푸코적 개념에서의) 생명 정치의 실현자 혹은 신자유주의의 화신처럼 만들어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쥬라기 월드 에볼루션」시리즈를 하는 플레이어라면, 연구진을 그 능력에 맞춰서 쉽게 고용/해고한다. 이 해고에는 그 어떠한 심적 동요나 불편한 과정이 없다. 그 어떤 플레이어도 이런 과정을 따르지 않기는 좀처럼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의 과정이 ‘매우 복잡한’ 정책 결정과 그 결과를 비가시적으로 숨겨놨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오히려 매우 단순한 연결이 있다. ‘경영’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장르에는 지극히 효율적인 연결만이 가시화되는 것이다.


「쥬라기 월드 에볼루션 2」의 연구원 관리 화면. 해고 아이콘은 우측에 잘 보이도록 마련되어 있다.


당장 근래 이 장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어게인스트 더 스톰」을 보자. 여기에는 ‘주민’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러나 정확한 의미에서는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이들인 (이것을 시뮬레이션으로 간주한다면) 생존을 목표로하는 인간들이다. 각자는 아마도 원하는 삶의 형태, 노동 환경 같은 것들이 존재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이 게임에서 이들이 ‘필요 요소’같은 것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개별화되지 않는다. 필요 요소는 종족에 따라 결정되며 해당 요건이 충족되면 해당 종족의 모든 업무 효율이 증진된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필요 요소라는 것은 게임적으로 규정된, 업무적 능률에 대한 직결적 메터에 준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종족이 가진 ‘필요 요소’는 기본 인터페이스에서는 감춰진 영역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기 위해서는 좌측 상단의 종족 아이콘을 클릭해 따로 열람해야 하는데, 결국 게임의 인터페이스는 이 필요 요소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라는 사실을 지시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또한 이들에게는 각자 이름이 존재하지만, 이 개별화된 이름은 그들이 주거하는 주거지를 클릭했을 때에만 볼 수 있는 구조다. 보통은 클릭할 일이 없는 건물이라 신경쓰지 않다보면 ‘이름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기 쉽다. 외견이 모두 통일되어 있어 구별이 되지 않기도 하고. 결국 「어게인스트 더 스톰」에는 명백한 정보의 위계가 존재한다. 그것은 게임의 ‘승리 조건’인 명성이 얼마인가, 게임의 ‘패배 조건’인 여왕의 분노가 얼마인가를 최상위의 층위에 놓은 뒤, 한 층위씩 가시성을 줄이는 방식처럼 디자인되어 있다. 여기서 최하단, 그러니까 게임이 ‘쓸모없는 정보’라고 규정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개별성이다. 그런 정보는 이 게임에서 별다른 가치가 없다.


「어게인스트 더 스톰」의 종족별 필요 요소 열람 화면. 기본적으로는 비가시화 되도록 접혀있다.


이 게임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프로스트 펑크」에서의 법률서 역시 어떠한 윤리적 고민을 만드는 것 처럼 보이지만, 최종적으로는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어떻게 ‘효율화 하느냐’와 직결되는 측면이 있다. 어차피 그 윤리적 결과라는 것도 (가시성의 측면에선) 수치의 위계로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플레이어의 윤리를 시험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게임이 ‘윤리성’이라는 것을 어떻게 재현하느냐의 문제다. 결국 수치화되어 있는 희망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희망적인가’는, 미묘한 표현법의 차이로 묘사될 뿐, 삶에서의 직접적인 체험으로 등장하긴 어려운 것이다. 필요에 따라 희망의 증감을 정확한 타이밍에 조절하는 ‘숙련된 플레이’ 앞에서는, 희망조차 관리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생명정치를 넘은 희망정치라고 불러야 할까.


물론 수치화는 비디오게임의 숙명이다. 어차피 디지털이라는 것은 본디 이렇게 작동하는 것이다. 사실 이 전체의 문제는 수치화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인터페이스의 문제다. 무엇을 전면화하고 무엇을 감추는가. 알렉산더 갤러웨이Alexander Galloway가 말했듯, 인터페이스는 드러냄과 동시에 감추는 매개다. 우리의 사고는 우리가 접촉하는 인터페이스에 기반한다. 갤러웨이는 그런 의미에서 소프트웨어와 이데올로기를 계속 비교한다. 인터페이스는 그러한 배경의 ‘드러냄’을 작동시키고, 그를 위해 어떠한 것들이 ‘탈각’된다. 보이는 것이 우리는 좌우한다. 왜 「림월드」에서의 죽음은 고통스럽지만 「엔드 존」에서의 죽음은 상대적으로 덜 고통스러운가. 물론 ‘인물’ 하나하나의 비중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림월드」에서의 개별화는 보장된 인터페이스의 효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림월드」역시 (여러면에서) 생명정치를 실현하지만, 그것은 개별화된 인간의 패턴에 대한 접촉과 제어로 작동한다. 여기엔 인간성에 대한 ‘감춤’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건설/경영 시뮬레이션이 신자유주의의 첨병이며, 우리를 노예화하는 세뇌의 기재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정리하는 건 너무 각 게임들이 억울할 소지가 많을 것이다. 도리어 우리는 이러한 체험을 사유의 가능성으로 전유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왜 효율이라는 늪으로 쉽사리 빠져드는가? 누군가의 삶이 나의 판단과 결부됨에도 그 디테일을 의식에서 제거하게 되는 것은 왜 일까? 이 장르를 이 가능성을 극단적인 단위까지 밀어 붙여 만든, 잠재성virtual의 실재화actual라고 부르는 건 어떨까?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인터페이스의 무시무시함을 체험하는 셈이다. 말하자면, 건설/경영 시뮬레이션의 역설이다. 디지털의 무참한 비가시화를 통해서 우리는, 체감할 수 있는 가시화의 필요성을 감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건설/경영 시뮬레이션이 극도로 재미있는 장르라는 사실을 통해서 동시대의 공포를 조금이라도 더 느껴보자고 감히 제안해보는 것도 생각해볼 만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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