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군사주의와 전쟁 게임
야코 수오미넨은 《The Past as the Future? Nostalgia and Retrogaming in Digital Cutlure》에서 ‘디지털 게임을 포함한 미디어 문화는 본질적으로 유아성infantlism, 유치함chindishness 또는 청소년성juvenility을 내포하고 있으며(...)’라고 쓴다. 폭탄 같은 발언처럼 들리지만, 비디오 게임과 걸쳐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논제다. 요컨데 우리가 게임학이라고 부를때의 루돌로지Ludology의 어원으로부터 발생하는 근원적 질문이다. 우리 사이에는 비디오 게임이라는 것이, 아니 게임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즐거움’에 대한 지향이라는 암묵적 동의가 있다. 이 때에 즐거움을 가장 원초적인 단위까지 훑고 내려가면 결국 유아성, 유치함, 청소년성 같은 것들과 마주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래서 비디오 게임과 전쟁이라는 두 키워드를 하나로 조합하면 그러한 ‘원초적 즐거움’의 상이 그려진다. 몰려드는 적, 화면을 메우는 총탄, 화면 어딘가에 표시되는 점수 또는 킬마크… 등등. 애초에 군사적 기술의 변용으로 탄생한 이 매체는 「미사일 커맨더」같은 군사주의적 테마의 게임과 함께 성장해왔다. 꼭 그 대상 또는 배경이 현실에 기반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타이토의「스페이스 인베이더」, 코나미의 「콘트라」같은 외계인과의 혈투를 그린 아케이드 게임도 엄밀히 말하자면 군사주의와 매개하고 있다. 직접 전장을 모사하지 않더라도 총기나 냉병기를 다루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조금 과장해서 폴 비릴리오를 경유하자면, 레이싱 게임 같은 기술 중심의 게임 마저도 군사주의에 대한 어슷한 인상 정도는 가지고 있겠다.
전쟁과 비디오 게임의 사이에는 언제나 군사주의라는 존재의 무게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군사주의가 자리잡고 있는 위치는 원초적 재미라는 근원적 공간이다. 반전을 외치는 비디오 게임이 군사적 쾌감을 준다는 루도내러티브 부조화 문제는 구태의연하고 철지난 이야기일 정도다. 그래서, 전쟁과 비디오 게임의 사이에서 이 군사주의를 걷어내면 그 자리에 ‘진지한serious’이라는 단어가 들어서게 된다.
시리어스 게임serious game이라는 단어의 현존 자체가 비디오 게임에 드리워진 루두스의 음산함을 시사한다. 게임이 진지해려면 특정한 수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확실히, 군사주의를 우회하는 전쟁 비디오 게임은 대체로 이 시리어스 게임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물론 시리어스 게임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여러가지 논의가 있다. 초기에는 교육적 효과를 가진 게임들을 지칭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근원적으로 교육적 목적이 아닌 게임들을 교육적으로 전환 사용하는 경우가 생기면서 ‘교육적 효과’, 아니 더 넓게는 ‘어떠한 효과’를 내포하는 게임들까지 아우르게 된다. 자우티Djaouti, 알바레즈Alvarez, 제슬Jessel은 기존의 비디오 게임을 ‘엔터테인먼트 게임’으로 구분한 뒤, 시리어스 게임을 ‘진지함serious’과 ‘게임성game’을 모두 가진 게임으로 규정한다.(2018) 물론 여기서도 이 ‘진지함’이 어느 범주까지를 뜻하는지에 대해서 규정하지 않는다면, 매우 모호해지긴 하지만 말이다. 여튼 게임이 어떠한 엔터테인먼트를 초과하는 ‘진지한 테마’를 목적한다면 시리어스 게임의 범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여기에 어떠한 충돌이 발생한다. 앞서 말했듯 루두스는 일정량 ‘진지함’을 배격하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전쟁과 비디오 게임 사이에 언제나 군사주의가 들어설 수 밖에 없었던 바로 그 논리적 귀결과 맞붙는다. 따라서 비디오 게임이 군사주의와 거리를 두고, 그 이면의 이야기를 ‘진지하게’하려 할때, ‘시리어스’와 ‘루두스’ 사이에는 강렬한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충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게임이 바로 Juggler Games의 「우리에 대한 나의 기억My Memories of Us」이다. 이 게임은 2차 세계대전의 와중 한 유대인 소녀와 도둑 소년이 함께 수용소로부터 탈출해 도망치는 이야기를 다룬다. 메커닉적으로는「발리언트 하츠」에 큰 빚을 졌다 할 정도로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지만, 각각 다른 특성을 지닌 두 주인공을 통한 퍼즐 메커닉은 새로운 흥미로움을 낳는다. 손을 잡으면 서로의 능력이 공유되고 손을 놓으면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된다는 메커닉은 게임이 부여하는 퍼즐을 보다 다채롭게 구축한다. 그러한 반면 이 게임은 ‘노년의 남성이 회상하는 과거’를 이유로 역사에 환상적인 면모들을 이식한다. 이를 통해 제3제국을 로봇으로, 제국의 총통을 로봇 왕으로, 유대인을 표시하는 노란 뱃지는 지워지지 않는 붉은색의 페인트로 묘사한다. 이 환상성(또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해야할까)이 있기에 더 다양한 퍼즐 메커닉이 나올 수 있었겠으나, 역사의 무게를 감소시켰다는 평은 피할 수 없었다. 《게임스팟》에서는 "게임의 더 귀여운 미적 요소와, 캐릭터들이 게토에 살게 되고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는 이야기 사이의 단절은 거슬린다. ...이러한 분위기의 혼란은 경험의 대부분을 약화시킨다."고, 《닌텐도 라이프》에서는 “주요 비판점은 어린아이의 마음에서 만들어진 실질적인 위협과 그것이 기반으로 하는 진정한 공포 사이에서 나타나는 거슬리는 분위기의 불일치다.”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이 게임이 더 현실적인 아트를 가졌다면 게임 전체를 ‘흥미롭게’ 만든 퍼즐 메커닉의 삽입은 불가능했을 것이 자명하다. 「우리에 대한 나의 기억」은 군사주의를 우회한 비디오 게임이 필연적으로 겪게되는 전쟁의 진지함과의 각축전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충돌에 대해 이안 보고스트의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절차procedure’와 ‘수사rhetoric’ 사이의 긴장이라고도 정리할 수 있다. 게임적 절차(=구조)를 동원해 수사(=의미에 대한 표출)를 구축한다는 보고스트의 발안을 따르자면, 진지함은 언제나 수사의 목적에 위치한다. 여기서 절차는 이 수사의 구축에 결부된다. 하지만 게임의 절차, 그러니까 루딕 메커닉은 앞서 정리한대로 유희성을 기반으로 한다. 결국 진지함에 대한 수사를 어떻게 유희적으로, 그러니까 원초적이지 않은 흥미로움으로 구축하느냐가 긴장의 근원이다.
정리하자면 수사의 확고한 대상을 위해 절차가 동원되는가, 아니면 절차의 목적이 수사의 대상보다 더 높은 층위에서 작동하는가의 문제다. 이 긴장의 내부에서, 게임을 통해 전쟁의 ‘진지함’을 논한다면 과연 어떤 방식을 이루어야 할까?
이를테면 의미가 구조를 앞지르는 경우, 이는 명백히 역사 교육을 위한 콘텐츠가 된다. Charles Games의 「아텐타트 1942Attentat 1942」와 「스보보다 1945 : 해방Svoboda 1945 : Liberation」이 대표적인 예시다. 두 게임은 모두 체코의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 교육 자료의 일환으로 만들어졌으며, 의도적으로 복잡한 사회적 양태의 시기, 체코슬로바이카 총독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된 뒤에 벌어진 억압적 통제 ‘하이드리하디’가 발생한 1942년과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던 독일인들에 대한 폭력적 추방이 시행된 1945년을 그 조사의 배경으로 삼는다. 플레이어는 모종의 이유로 과거에 있었던 진실을 찾아내야 하는 현대의 체코인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노벨 게임’ 스타일의 인터뷰를 진행하며 정보를 모아야 한다. 비록 재연 배우들을 사용하긴 했지만, 가상의 인터뷰라는 형식은 전쟁 중의 민중들이 가진 미시사의 복잡함을 인지시킨다.
인터뷰이들은 대부분 타자에 대한 극도의 불안과 의심을 갖는다. 그리고 이는 전적으로 전쟁이라는 현상이 주는 공포로부터 기인한다. 유대인이 아님에도 유대인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할아버지의 역사를 추적하는「아텐타트 1942」의 경우, 주인공의 할머니는 불신으로 가득했던 과거를 회상한다. 누군가의 불온한 고발이 남편에게 부당한 문제를 일으켰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인 지금까지도) 할머니의 의심의 대상인 이웃집 남자 역시 나치당의 폭압에 의한 피해자라고 고백한다. 그 역시 총독부에 의해 강압적으로 친독적인 기사를 써야 했던 과거에 고통받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서로에 대한 정보는 파편화되어, 결국 켜켜히 쌓인 오해가 한 사람을 비극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아텐타트 1942」는 이를 위해 역사 탐구를 가상적으로 분화시킨다. 게임 중 발생하는 모든 인터뷰는 인터뷰이의 정보 전체를 한번에 획득하지 못한다. 하지만 진행 중 발생한 미니게임을 통해 지급받은 코인을 사용하면 인터뷰를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있다. 이 ‘처음부터’ 다시는 문자 그대로의 처음부터, 즉 ‘이전의 인터뷰가 없었던 것’으로는 간주한다. 하지만 플레이어에게 이전 인터뷰의 정보는 남아있다. 이러한 인식상의 오류가 있음에도, 딱히 이런 과정을「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즈」처럼 초상적 능력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즉 사실상 주인공은 부족한 정보들로 구성된 한 플로우의 인터뷰 경험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우연치 않게 진짜 ‘진실’과 접촉하게 된 셈이다. 이는 게임이기에 가능한 잠재태의 경험만이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일 뿐이다. 따라서 게임이 아닌 현실의, 그러니까 실재태의 인터뷰는 결코 진실에 도달할을 것이라는 회의주의에 가깝다. 어쩌면 이 현상이 「아텐타트 1942」의 인터뷰이들이 가진 정보 부족의 비극을 일부 설명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개인은 근본적으로 판단의 한계지점을 가지며 오해와 불신의 가능성은 언제나 곁에 도사린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거대한 이벤트는 이런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증가시킨다. 플레이어가 추적한 진실은 이러한 세계의 초상이며, 오직 각 인간에 대한 불가능한 정보 습득의 반복으로만 도달할 수 있다는 수사인 셈이다.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게임 제너레이션 홈페이지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