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언 - 엘리자베스 코스토바 / 조영학 / 김영사
공포물을 생각하면 항상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주말 밤에 TV로 외화를 한 편 보았다.
요즘은 없어진 것 같지만 예전에는 주말 밤에는 외화를 한 편씩 방영했었다.
제목이나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데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장면은 이렇다.
어딘지 모를 언덕 위에 철문으로 굳게 닫힌 고성이 하나 있다. 대문 양옆 기둥 위에는 늑대인지 뭔지 모를 형상의 조각이 있다.
무슨 박사라고 하는 사람이 그 집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방문한다. 그것도 깜깜한 밤에...
인적도 없는 고요한 밤에 그 집 대문을 열고 박사 일행이 들어가고 잠시 후...
그 조각의 머리가 서서히 돌아가고, 조각의 눈에서 파란빛이 번득인다.
그 후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조각이 움직이고 눈에서 빛이 나는 그 장면이 어린 시절의 내겐 꽤나 충격적이었나 보다.
드라큘라 이야기는 꽤나 오래된 고전이다.
무수히 많은 책이 나왔고,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대학시절, 여자 친구와 멀리 부산까지 여행을 가서 심야에 본 영화가 드라큘라 이야기였다. 남자가 여자와 공포물을 볼 때는 대부분 ‘혹시나...’하는 기대감의 작용도 한몫할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 날 영화를 보는 내내 여자 친구의 손과 어깨는 내 품안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몇 년 전에는 무슨 드라큘라와 인터뷰를 한다는 제목의 영화도 있었고, 단순한 공포물이 아닌 액션 활극으로 변모한 ‘웨슬리 스나입스’의 영화도 한 편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히스토리언은 현재 절판 상태이다.
자주 가는 동호회의 중고매물 장터에 이 책이 올라왔었다.
어떤 책인지에 대한 사전 정보도 없이 구입했다. 사실은 이 책이 필요해서 산 것이 아니고, 역시 절판된 다른 책이 함께 매물로 올라왔는데 따로는 팔지 않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같이 구입한 책이다.
책을 받아서 책꽂이에 꼽아두었는데 어머니께서 먼저 읽으셨다.
제법 재미있다고 하시기에 무슨 내용이냐고 여쭈었더니 드라큘라에 관한 이야기인데 내용이 그럴듯하다고 하신다.
마치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 류의 작품을 읽는 기분이라고 하셨다.
그제야 이 책을 꺼내 들었다.
모두 세 권으로 구성된 ‘히스토리언’은 시작부터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책머리에 보통 작가의 말이 들어가게 마련인데, 이 책은 그 부분마저도 소설 속 화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마치 작가 스스로가 직접 겪은 경험담을 이야기하듯이...
이 책이 처음 미국에서 발표되었을 때 경매 시장에서 엄청 높은 금액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미국의 출판 시스템이 우리나라와 달라서 인기 있는 책의 경우에는 경매를 통해 출간권을 확보하는 모양이다.
어쨌든 그렇게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되다 보니 처음부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전 세계 28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다고 한다.
유명한 작가도 아니고 처녀 출간한 초보 작가의 작품이 그렇게까지 관심을 끌었다는 것만으로도 세 권 짜리 히스토리언을 읽을 만한 이유는 충분하겠다 싶었다.
주인공은 어느 날 아빠의 서재에서 낡고 오래된 편지 뭉치를 발견한다. 그 내용은 두려움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소녀는 아빠와 함께 여행을 하며 그 편지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다.
책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주인공이 직접 겪고 듣는 현실에서의 이야기이다.
아빠와 여행을 하고, 나중에는 사라진 아빠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주인공의 아빠가 주인공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 아빠가 직접 겪은 일들과 함께 아빠의 대학교수가 겪은 일까지 간간이 등장한다.
아빠가 도서관에서 손에 넣게 된 의문의 고서 한 권, 그리고 지도교수가 보관하고 있던 또 다른 고서...
교수가 젊었던 시절, 그 책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뒤지고 다니며 드라큘라의 흔적을 찾지만 실패하고 결국 자신의 제자에게 모든 짐을 떠넘기고 실종된다.
실종된 교수의 흔적을 찾으며 만난 젊은 여성과 연애도 하게 되고 결혼을 해서 딸을 낳게 된다.
그 딸이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인 것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삼대에 걸친 드라큘라의 진짜 무덤을 찾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뒤로 갈수록 지루해지는 감도 있고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날지 대강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 아쉬웠다.
게다가 너무 크고 넓게 벌려놓은 사건들을 제대로 덮지 못하고 마무리한 느낌...
마지막 장에서 주인공은 성인이 되어 어린 시절을 회고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을 찾아온 고서 한 권...
주인공의 외할아버지였던 사라진 노교수, 그녀의 아빠와 그녀 자신...
이렇게 삼대를 아우르며 드라큘라는 불멸의 자신을 드러낸다.
제목이 히스토리언인 이유는 드라큘라를 찾는 모험을 하는 이들의 직업이 바로 역사학자이기 때문이다.
역사학자의 드라큘라 찾기...
그들은 철저하게 자료에 의존한다.
도서관에서 오래된 책과 서신, 자료를 뒤지고 그 결과에 근거하여 추론한다.
그리고 조금씩 실체에 접근한다.
어쩌면 그들이 실체에 접근했다기보다는 드라큘라 자신이 그들에게 찾아간 걸지도 모르겠다.
드라큘라, 불사귀, 피를 빨리고 점차 흡혈귀로 변해가는 괴물, 생명력이 없는 좀비...
흔히 말하는 공포물에 등장하는 요소들은 모두 있지만 그다지 징그럽거나 혐오스럽게 그려지지 않았다는 특징도 있다.
이 책의 저자가 여성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상당히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세세한 묘사가 마치 그림을 그리듯 꼼꼼한 면도 있지만 한 편으로는 조금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결말도 예상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