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변명
떠나야 할 순간이 오면
모두 훌훌 털고 가야 하겠지요.
그러나 제게 남는 건
어찌할 수 없는 그리움.
제 생의 연을 다 끊고 그렇게 떠나간들...
어찌 당신을 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제 삶 점점이
당신은 그리움으로 박혀 있는 것을...
얼마 전...
갑자기 몸에 이상을 느껴서 병원에 검진을 받으러 갔었습니다.
예약을 하고, 미리 검사 전날 먹어야 하는 약을 받고, 날짜를 정했습니다.
검사 당일, 아기 때문에 아내는 집에 있고, 저 혼자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참 기분이 착잡하더군요. ‘별 이상이야 없겠지? 그래도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결과는 ‘별 이상이 없다!’ 고 하더군요.
장에 약간 작은 크기의 혹이 보이기는 하는데, 큰 문제는 아니랍니다.
약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왠지 나를 다시 돌아보게 하더군요.
그동안 난 잘 살아왔나?
사랑하는 아내와 딸, 부모님, 처가,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
만일, 만일에 내가 잘못되면 누가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줄까?
집에 오니 아내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듯 깔끔하고 정리 잘하는 성격에 맞지 않게 설거지도, 방 정리도 제대로 못했더군요.
보자마자 묻습니다.
“뭐래? 이상 없대? 나한테는 거짓말하지 마!”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니까 오히려 솔직하게 말하라고 추궁을 합니다.
정말이라고, 내가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몇 번을 말하니까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이
“나 설거지랑, 청소할게.” 하고는 스윽 뒤를 돌아섭니다. 그런 아내의 모습이 정말 작아 보입니다.
결혼 전에는 항상 밝고 명랑하고 어리광도 잘 부리던 6살 어린 제 아내.
이제, 제가 재채기만 해도 눈가에 주름이 잡힙니다. 기침이라도 할라치면 담배 좀 줄이라고 잔소리를 합니다.
저는 원래 추위를 타지 않아서 겨울에도 옷을 얇게 입습니다.
그런 제게 벌써 아내는 두툼한 겨울 코트를 한 벌 꺼내어 슬그머니 제 앞으로 밀어놓습니다.
“날씨가 추워. 따뜻하게 입고 다녀.”
오늘은 그런 아내의 모습에 차마 거절을 못하고 코트를 입고 외출을 했습니다.
길을 걸으며, 전철 안에서 더워서 땀이 흘렀지만 코트를 벗어들지 못했습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던 날, 밀린 설거지랑 청소를 한다며 돌아서던 아내의 모습이 눈에 밟혀서입니다.
이제 20대의 마지막 겨울을 보내고 있는 제 아내.
제가 매일 밤새워 논문 쓰느라 혼자 자게 된지 벌써 두어 달이 되었습니다만, 오늘도 새벽에 졸리면 마시라며 진한 커피를 한잔 타 주고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나 잘게. 먼저 자서 미안해.”라고 인사를 하면서...
작은 아내의 두 어깨가 무거운 짐으로 점차 오그라드는 것 같습니다. 요즘 들어 손목이 아프다는 말도 가끔 합니다.
어제는 밤을 새우고 늦게 잠자리에 들어 정오까지 자고 있는데 아기가 기어 옵니다.
“아빠, 아빠” 하면서...
아기가 제 잠을 방해할까 봐 걱정이 된 아내는 아기를 안고 가려고 합니다.
그게 맘에 들지 않았던지 아기는 울고...
잠이 깬 제가 아기를 달랬습니다.
그러면서 보니 아내는 집안 청소를 하느라 빗자루를 들고 있더군요.
청소기 쓰면 제가 깰까 봐 비질로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걸레를 빨아서 제가 거실과 방을 닦았습니다.
아내가 그러더군요.
“당신이 걸레질을 해주니까 내가 할 일이 없네.”
지금도 밤새워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만일, 정말 만일에 내가 죽는 순간이 오면, 그렇게 떠나게 된다면 난, 누굴 가장 그리워할까?
누가 가장 많이 슬퍼해 줄까...
제 아내의 까만 눈동자가 눈앞에서 어른거립니다.
오히려 저를 만나고 더 작아져 버린 것 같은 제 아내.
그 아내에게 이렇게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정말 사랑하고 있다고...
아주 아주 많이...
연애할 때 제 아내가 제게 이렇게 물었었습니다.
-나 많이 사랑해?
-응
-얼마나 많이...?
-아주 많이...
-얼마나 아주 많이?
-아주 아주 많이...
절대로 끝나지 않는 물음과 답입니다... 후후
이 글을 쓴 게 2001년 가을.
이후로 몇 년간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빠를 부르며 기어 오던 아기는 많이 자라서 초등학교 3학년 어여쁜 숙녀가 되어있고, 그렇게나 많이 사랑하던 아내와는 5년 전, 이혼을 했다.
그리고 아직도 나는 아내와의 사랑을 정리하고 있다.
쉽지 않은 게 사랑이고, 더 어려운 게 이별이다.
하지만 헤어진 다음, 그 사랑했던 흔적을 지우고 태우고 잊는 건 평생을 해도 다 할 수 없을 만큼 힘겨운 것인가 보다.
잊지 않기로 했다.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사랑과 이별의 흔적을 모두 기억하고 새겨두자고 마음먹었다.
내 젊은 날의 치열했던 사랑의 모습을 모두 기록한 비망록 한 권을 가슴속 깊이 묻어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