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들
이유 #3. 자료 없이 강의하기.
2000년대 초반, 앞서 언급한 서울 소재 모 대학에서 교양 과목으로 컴퓨터 그래픽 강의를 진행할 기회가 생겼다. 대학에서 가장 대접받지 못하는 직군의 하나인 시간강사로...
두어해 강의를 진행하고 보니 그간 강의한 내용을 정리해서 책을 한 권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주 수업 때마다 복사해서 배포한 자료만 모아도 교재 한 권은 나올 테니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1학기를 끝내고 여름방학이 되면서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소설이나 수필, 에세이 등의 분야는 대부분 텍스트로 채워진다. 그에 반해 컴퓨터 관련 분야는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글자보다 그림이 더 중요하다.
나름대로 기준을 세워서 그림 파일을 만들고 정리를 했다.
원고를 쓰면서 그림 파일을 불러와 배치하고, 잘못되었거나 모자란 부분은 다시 만들면서 원고를 완성해나갔다.
처음 원고를 시작할 때는 두 달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고, 결국 이듬해 신학기부터 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내가 직접 쓴 책을 들고 강의를 한다는 건 또 다른 경험이었고, 강의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길이라는 걸 그때 느꼈다.
교재를 쓰기 전이나 후나 강의는 어차피 똑같은 내용이었다. 그런데 강의는 훨씬 밀도 높게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더 신기했던 건 학기가 끝난 후 학생들의 만족도 역시 이전보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
그 뒤 몇 년 동안 강의를 진행하면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보완해서 다시 책을 냈다. 한 번 교재를 내본 경험이 있으니 훨씬 더 나은 수준의 책을 출간할 수 있었고 그렇게 조금씩 강의도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개인적인 이유와 몇 가지 다른 이유들이 겹치면서 만 9년 간 진행하던 강의를 그만두고 나니 아쉬움도 컸지만, 참 많이 배우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 컸다.
물론 교재를 쓰기 전에도 가능한 한 강의 자료를 잘 만들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했었지만, 이때의 경험으로 나는 강의 자료 만들기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강의를 직업으로 삼아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강의, 강연을 듣기 위해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편이다. 무료로 진행하는 단발성 특강도 찾아 듣고, 간혹 유료 강좌도 신청해서 열심히 듣기도 한다.
지금까지 내가 시간과 돈, 관심을 들여가며 들었던 강좌 중 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강좌가 몇 개 있다.
8년 전쯤 수강했던 “책 쓰기”강좌가 대표적이었다.
책 쓰기에 관한 책을 한 권 사서 읽고, 그 저자가 진행하는 12주짜리 책 쓰기 강좌를 수강했다. 이후 2년여 동안 단계를 밟아가며 차근차근 강좌를 들었다.
이때 나는 책 쓰기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를 했고, 그 경험은 내가 만든 강의 자료를 조금 더 질 높은 수준으로 만들어주었다.
내가 블로그 운영 강의를 처음 시작하게 된 건 순전히 강의자료 덕분이었다.
07년, 당시 홈페이지 제작업체에 근무하면서 개인적으로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홈페이지 운영을 담당하던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의사들을 대상으로 블로그 운영 특강을 진행해야 하는데 강사를 소개해달라고 한다.
마땅한 강사를 찾을 수 없어서 내가 하겠다고 했다. 강의를 해야 하니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요약자료를 준비했다. 의사라는 직업은 워낙 자료를 보는 데 익숙한 직군이라는 생각이 들어 꽤나 신경을 써서 자료를 만들었다.
당시 내 강의를 들었던 의사 한 분께서 내 강의 자료를 기준으로 블로그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불과 반년 만에 인정할만한 파워 블로거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병원 강의를 다시 한번 했고, 두 번째 강의는 동영상으로 녹화되어 포털 사이트에 노출이 되기도 했다. 그 동영상을 본 중견기업 교육 담당 부서에서 연락을 해왔고, 그렇게 강의를 하게 되었다.
이 업체는 참 인상적이었는데, 우선 강의료가 생각보다 꽤 많았다. 게다가 강의 자료에 대해 별도의 비용을 지급받았다.
이후 몇 년 간 나는 블로그 운영 강의를 진행할 수 있었다.
대학원 재학 시절, 지도교수님께서 “논문을 쓸 때 자료를 인용하고 출처를 밝히는 것이야 말로 논문의 신뢰도를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유명한 사람이나 단체의 자료를 인용하여 밝히는 것이야 말로 논문의 백미다.”라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강의 역시 마찬가지다.
어지간히 유명한 인사가 아니고서는 수강생들이 강사를 미리 알지 못한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 강사라고 앞에 서서 하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이때 설득력을 높이고 수강생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객관적인 자료가 필요하다.
강의 자료는 소설이나 에세이가 아니다.
핵심을 얼마나 잘 정리하는가, 시각적으로 보기 좋은가, 객관적인 자료인가...
이런 부분에서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강의 자료는 효과를 보기 어렵다.
너무 지나칠 정도로 빽빽해서 도저히 알아보기 어려운 수준의 자료를 펼쳐놓고 강의를 하는 것은 수강생들의 집중력을 떨어트려서 방해가 된다.
이것은 마치, 학창 시절 칠판에 빽빽하게 필기하느라 수업시간을 허비하는 선생님의 뒤통수를 보는 것과 같다. 필기하는 시간 동안 집중력은 떨어지고 학생들은 산만해진다.
반면, 말만으로 강의를 끝내는 강사도 있다.
강의 사간 내내 멀뚱멀뚱 강사만 쳐다보다가 끝내야 한다. 필기를 위해 노트를 펼쳐둔 이들은 가끔 몇 글자 적기도 하지만 딱히 중요한 내용도 아니다.
사람이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피부 감각으로 느낀다.
이 중 눈으로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이 가장 크다고 한다. 그런데 자료 없이 강의를 한다?
이건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큰 통로를 억지로 막는 것이다.
물론 시각자료 없이 진행해야 하는 강의도 없지는 않겠지만, 일단 강의 자료는 풍성하게 준비해야 한다. 풍성하게 준비한 자료를 잘 다듬어서 핵심을 정리해야 강의에 써먹을 수 있다.
그렇게 강의 자료를 준비하는 동안 강의의 질은 높아질 것이다. 심지어 준비한 자료를 전혀 써먹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고 해도 자료를 준비하지 않는 강사보다 수준 높은 강의를 만들 수 있다.
강의 자료를 잘 준비하는 팁 몇 가지.
1. 긴 문장이 아닌 짧은 단문으로 정리할 것.
문장은 필요 없다. 긴 문장을 대신하는 게 바로 강의다. 핵심 단어를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2. 글을 대체할 수 있는 사진이나 그림이 있다면 과감하게 바꿀 것.
읽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쉽다. 글의 양은 줄이고, 그림이나 사진의 양은 최대한 늘려라.
3.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다면 숫자로 말할 것.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숫자가 주는 신뢰감은 생각보다 무척 높다.
설령 숫자가 약간 틀리더라도 없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