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 어느 책방에 머물러 있던 청춘의 글씨들
윤성근 (엮은이) | 큐리어스(Qrious) | 2013-07-15
옛날이야기다.
어릴 적, 나는 꽤나 책읽기를 좋아했다. 지금도 책 읽는 걸 빼먹지는 않지만 어릴 적 나는 정말 책이라면 환장을 했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도심지의 큼직한 대형서점과 인터넷 서점이 도서공급을 콱 틀어쥐고 있는 세상이지만, 인터넷이 지금처럼 발달하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어느 동네를 가든 작은 서점들이 꼭 있었고, 크고 화려하지 않지만 헌책방도 자주 볼 수 있었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난 학교 담벼락 끝에 있던 작은 헌책방을 좋아했다.
그곳에 가면 예쁜 아줌마가 자릴 잡고 앉아서 날 반겨주셨다.
“오늘은 무슨 책 보러 왔니?” 라고 물으시던 그 아줌마는 나이 어린 학생이 책 좋아하는 게 기특하다고 하셨었다. 내가 책을 몇 권 골라서 내놓으면 주욱 훑어본 뒤 비슷한 부류의 다른 책 한 권씩 얹어주곤 하셨다.
이젠 헌책방을 가기도 어렵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아예 헌책방을 구경할 수도 없다. 아주 가끔 신촌에 나가면 아직 장사를 하는 헌책방이 두어군데 눈에 띄기는 하지만 이제 헌책방은 큰 맘 먹고 일부러 찾아가야 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몇 년 전부터 알라딘에서 중고서점을 몇 군데 냈다. 나 역시 책을 팔거나 사기 위해 가끔 들른다. 우선 책을 팔기 쉽고 가격도 제법 쳐주는 게 마음에 들기 때문이고, 책 고르기 쉽게 꾸며진 매장도 마음에 든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책을 몇 권 사서 그 중 눈에 띄는 책을 읽고 빼먹은 책이 있었나 보다. 며칠 전, 책꽂이에서 이 책,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를 발견하고 한동안 고민했었다. “이 책이 도대체 왜 내 방에 와 있는 거지?”
책갈피에서 알라딘 영수증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마 계속 궁금해 했을 것 같다.
이 책은 좀 독특한 책이다.
헌책방 주인이었던 작가가 만난 헌책에서 본 (저자 말고) 책주인의 글을 모으고 소개한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할 때, 그렇게 몇 자 적어서 선물했었고, 그렇게 선물을 받기도 했었다.
그런 것들만 모아도 이렇게 훌륭한 읽을거리가 된다는 게 재미있다. 게다가 꽤 진지하게 생각할 거리도 있고 가벼운 웃음을 짓게 만들기도 하니 좋은 책인 것 같다.
책을 읽기 위해 펼쳐 들었다가 눈길을 끄는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수북하게 쌓인 책을 찍은 사진인데, “불광중학교도서관”이라는 스탬프가 찍혀 있다. 내가 졸압한 학교... 그래서 책날개에 있는 저자 소개를 보니 응암동 골목길에서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단다.
이 사진이 눈길을 끌어서 조금 더 진지하게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책에 대해서는 별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책에 누군가가 쓴 글을 소개하고 있다. 심지어 책 표지도 보여주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기 위해, 또는 그냥 낙서처럼...
많은 사람들이 볼펜을 만년필을 연필을 꾹꾹 눌러 쓴 글들이 유명한 작가의 문장보다 더 크게 읽히는 건 아마도 나 역시 그렇게 글을 써본 경험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그 글들을 모을 생각을 한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내 눈길을 끈 글들...
89P
페스트에 대하여
가수 정태춘이 부른 <아치의 노래>에서
그는 말 못하는 잉꼬와 깊은 대화를 나눈다.
잉꼬는 하늘을 본 적이 없지만, 화장실에서 들리는 물소리를 듣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넓은 초원을 꿈꾸며 날개를 푸드덕거린다.
다음날 아침 바닥에는 뽑힌 깃털이 수북하다.
“날지 마. 날지 마. 그건 자학일 뿐이야.”
하지만 잉꼬는 말을 듣지 않는다. 잉꼬가 말한다.
“날고 싶은 것은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다. 헛된 꿈도 아니다.”
자유는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누가 자유를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가.
페스트 | 알베르 까뮈 | 삼중당 | 1983년
세상을 물들이는 이념의 페스트. 자유는 이념이 아니다.
- 우리는 지금, 2016년 현재에도 자유를 꿈꾸며 산다. 빨갛게 물이 들었다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157P
살아 만나기
혹은 만남으로 살아남기
197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민족문학의 바람은 1990년대 초반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이어진다. 특히 1980년대 중, 후반에는 지금껏 활동한 민족문학을 정리하는 평론 활동이 많이 일어났는데
<민족 민중 그리고 문학>도 그런 선상에 있는 책이다.
이 책에는 고은, 김지하, 백기완, 백낙청, 신경림, 황석영 등
민족문학 계열에 있는 많은 작가들이 평론집 필진으로 참여했다.
민족 민중 그리고 문학 | 김병걸 | 지양사 | 1985년
문학을 여린 거인이라 부르자. 어린아이의 소외된 모습으로 현실을 반영하여 현실을 앞당겨 가는 거인이라 부르자. 너를 애틋함이라 부르자. 약속. “살아 만나기 혹은 만남으로 살아남기” 1990. 02 나 말달려 갈 거다.
- 그 시절, 읽으면 안 되는 책들이 참 많았다. 지금 우리는 하면 안 되는 생각들이 참 많다.
180P
그 때 잃어버린 것들은 어쩌면
그때의 청춘들은 누구나 시인이었다. 좋아하는 시 몇 편쯤 외울 줄 알았고 노트 한 귀퉁이에, 아끼는 책 한 켠에 자작시 몇 줄끔 부끄러움 없이 끄적일 줄 알았다.
그때 그들은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나는 누구인지 실체도 정답도 없는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지금 내 곁은 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소소한 일상을 함께하고 슬픔과 기쁨, 고민을 나누는 나의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겼다.
감정에 솔직했고, 때로는 무모했으며, 불투명한 미래라 할지라도 꿈이 있었다. 몇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청춘을 지나는 이들의 마음은 결이 같다.
- 생각해보니 지금 내 방 책꽃이에 자릴 잡고 있는 시집들은 모두 그 시절에 샀던 것들이다.
182P
불행한 양우당이여
이렇게 말하면 아주 오래전 이야기인 것 같지만, 예전에
종로서적이 있었다. ‘있었다’는 말은 슬프다. 하지만 거기 있었다.
근처에 고려당 제과점이 있었고, 그 근처에 양우당 서점이 있었다.
메모에 쓴 “양우당 맞은편의 종로의 아이들”은 당시 위치로
추측해보건대 대형 어학원에 드나들던 젊은이들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종로는 멋진 곳이었다. 종로서적 옆에는
빠이롯트 PILOT 만년필 매장이 있었고, 길 건너 YMCA 건물과
그 주변에도 서점이 몇 개 더 있었다.
하지만 양우당 서점이 1990년대 초 문을 닫은 것을 시작으로 시청 앞
태평서적센터도 2000년대 들어 문을 닫았다. 종로서적은 2002년에
간판을 내렸다. 서울을 디자인했다고, 더 멋있어졌다고 하지만
내겐 여전히 종로서적과 빠이롯트 앞에서 전화기도 없이 친구를
기다리던 그때의 종로가 더 멋있게 느껴진다.
- 맞다. 잊고 있었는데, 종로서적이 있었다. 지금의 교보문고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좁은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고 좁다고 투덜거렸던 그 종로서적...
187P
나의 인간관계는
진실하고 성실하고 완전한가
한때 유행처럼 ‘프랭클린 플래너’라는 다이어리를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밴저민 프랭클린은 200년도 전에 살았던 인물이지만
철저한 자기관리를 통해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평가받기 때문에
여전히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그를 본받으려는 노력이 끊이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한 번 사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고 싶은 건
같은 마음인가 보다.
수많은 책이 자기관리를 통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저마다의
방법을 알려준다. 이런 책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어떤 방식으로든 성공적으로 삶을 살았던 사람은 늘 그 중심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두었다는 사실이다. 혼자 노력해서 혼자
성공하면 그 성공은 혼자만의 것이 된다. 그런 성공은 애초에 성공을
하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여럿이 함께 어울린 성공은
나무와 풀, 온갖 생명이 모인 숲처럼 아름답다.
프랭클린 자서전 | 밴저민 프랭클린 | 김영사 | 2002년
행복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함, 성실함, 완전함으로 맺어진 인간관계에 있다.
- 그런가? 진실하고 성실하고 게다가 완전하기 까지 한 인간관계만이 행복을 가져다 주는가? 조금 과장되기도 하고, 약간 게으르기도 하며 늘 허점투성이인 나는 평생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을 만날 수는 있을까?
그래도 함께 하는 성공이 혼자만의 성공보다 값지다는 말은 완전하게 공감한다.
189P
이젠 당신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초혜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1980년대를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때 우리의 사랑은
<사랑굿>, <홀로서기>, <접시꽃 당신>과 함게 시작됐고
그 안에서 살짝 고갤르 내민 꽃봉오리처럼
수줍은 분홍색으로 피어올랐다.
우리는 시를 써서 사랑을 고백했고,
사랑을 잊으며 또한 시를 썼다.
사랑굿 | 김초혜 | 한국예술사 | 1989년
그대/그대를 잊고자 했습니다./도저히 지금의 나를 볼 수가 없어/이런 나를 있게 한 당신을/잊으려 했습니다.//그대가 그리워서/항시 나를 떠나지 않는 그대이기에./잊고자 했습니다.//그대를 만나고 세 번째 겨울을 맞습니다./그러나 이제 그대는 이 겨울 어느 rt에도/찾아지질 않습니다.‘//그대 이름 처절히 불러도 그대는 없습니다.//그대의 모습은 내 안에서/밝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자리합니다./그대의 포근한 눈, 손길을 소중하게 간직합니다.//이젠, 내 안에서 언제나 만나볼 수 있는 그대/사랑합니다. 영원히.//오늘 사랑굿을 손에 들고./그대와의 소중한 사랑을 추억하며/그대를 드디어 나의 사랑으로/모십니다. -- 이젠 당신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굿... 이 한 글자가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참 크다. 굿판을 벌이기도 하고, 굿잔치가 펼쳐지기도 한다. 가는 영혼의 한을 씻어주는 굿도 있고, 아예 귀신을 쫒기 위해서도 굿이 필요하다. 김초혜 시인은 사랑에도 굿판이 필요하다며 연작으로 시를 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