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변명
유명 포털 사이트에는 참 많은 동호회가 모여 있다.
언젠가 쪽지를 한 통 받았다.
[이혼한 사람들의 아픔과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입니다. 방문하셔서...]
‘이런 젠장, 내가 이혼한 걸 어떻게 알고 이런 쪽지를 보냈지?’
황당한 생각도 들고, 궁금하기도 해서 가입을 했다.
생각보다 회원 수도 많고 꽤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는 카페이다.
다른 사람들은 왜 이혼을 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사실 가입을 하고도 한동안 둘러보기만 할 뿐 선뜻 글을 남기기도 조심스러웠다.
[아내가 절대 마음을 돌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로 시작하는 글을 읽었다.
이혼을 했는데 아이 양육 문제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다시 합치자고 하는데 아내는 절대 안 된다며 요지부동이라는 내용이었다.
비슷비슷한 고민들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얼굴도 보지 못했던 그들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나 역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기소개 게시판에 들어가서 간단하게 소개 글을 남겼다.
[이혼한지 3년 차, 딸과 함께 살고 있고 올해 마흔 하나입니다.]
가입한지 반년여 만에 가입인사를 남기고도 한동안 눈팅족으로 글을 읽기만 했다.
공지사항이 떴다.
[정모를 개최합니다. 서로 얼굴도 익히시고 간단하게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모임 날짜를 확인하니 토요일 저녁 7시, 장소는 사당역 근처였다.
어떤 사람들이 모이는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죄다 이혼을 한 남녀가 모여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꽤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라,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참석하겠다는 댓글을 남겼다.
“안녕하세요? 북극곰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돌싱남입니다.”
“네. 노랑잠수함입니다.”
“잠자는숲속의여인입니다.”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인터넷 동호회의 모임은 본명보다 별명이 더 익숙하다. 매일 게시판에서 별명으로 만나다 보니 실명보다 훨씬 친근하게 느껴진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치고 식사와 맥주를 곁들여 옆자리의 회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불과 한두 시간 만에 제법 친숙한 느낌이 든다.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발달하면 인간관계가 매몰된다는 말을 많이 한다. 얼굴도 보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고 여전히 서로 모르는 얼굴로 살아가는 것이 어찌 인간적이냐고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인터넷을 통해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제법 친한 사이로 발전하기도 하고 가끔 이렇게 만나 수다를 떨기도 하면서 또 다른 인간관계를 맺기도 한다.
가끔은 회원들 간에 연애를 하기도 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경우도 있기는 한 모양이다. 그럴 경우 안타깝지만 동호회 규정에 의해 탈퇴를 해야 한다고 한다. 새로운 인연을 맺는 것은 축하할만한 일이지만 이혼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동호회의 성격에 맞지 않은 사람이 되었으므로 자발적으로 탈퇴를 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운영자의 권한으로 강제 탈퇴를 시키기도 한다고 한다.
물론 다른 회원들의 축복과 응원,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을 받으며 그렇게 떠나가는 것이다.
이 동호회는 각 지역별 모임도 있고, 자문 변호사의 이혼 관련 상담도 할 수 있다. 이혼하고 실의에 빠져 생활이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고민 상담을 해주기도 하고 회원들의 응원을 통해 의욕을 찾기도 한다.
다른 회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대부분 처음에는 나처럼 망설이다가 다른 회원들의 글을 읽는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글을 남기게 된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처럼 모임에 나오게 되면 그때부터는 친해져서 자주 만나기도 하고 서로 안부도 묻는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같은 아픔을 안고 있다 보니 서로에게 어떤 위로가 가장 큰 도움이 되는지 너무도 잘 알고 때로는 가족보다 더 깊이 이해를 받고 이해를 하게 되는 것이 이 동호회의 특징이라고 한다.
‘북극곰‘님은 “이 동호회 탈퇴하기 싫어서 재혼 못 한다.”고 우스갯소리를 던지고는 맥주잔을 말끔히 비운다.
‘잠자는숲속의여인’이라는 긴 별명을 가진 여성 회원에게 별명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음, 저는 중매로 결혼을 했었거든요. 중매다 보니 조건은 좋았는데 서로 전혀 맞지 않았어요. 그 사람이나 저나 서로 단 한 번도 사랑이나 정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거든요. 게다가 하는 일이 까다로워서 매일 야근이고...,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어요. 몇 년을 살아도 여전히 남 같고, 어색하고... 아이도 없고...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여자가 생겼대요. 정말 사랑한다나요? 나보고 미안하다며 이혼해달라고 하기에 미련 없이 헤어졌어요.
생각해보니까 난 아직 한 번도 제대로 사랑이나 연애를 해보지 못했더라고요.
그래서 숲 속의 공주를 깨워준 왕자처럼 나도 그런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요. “
옆에서 말없이 맥주잔을 비우던 ‘민들레홀씨’님이 웃으며 한마디 거든다.
“얘가요. 올해 벌써 마흔을 넘겼거든요. 그런데 아직도 이런 동화 같은 꿈을 꾼다니까요. 그러니 이혼한지 몇 년 되었는데 아직도 이러고 살죠. 하하...”
“그럼 민들레홀씨님은 왜 별명이 민들레홀씨예요?”
“전 그냥 편하게 이리저리 떠돌면서 살려고요. 바람 부는 대로 왔다 갔다...”
“그래도 언젠가는 어느 구석에든 자리를 잡아야 하지 않겠어요?”
“뭐, 그건 언제가 되었든 상관없고요. 어쨌든 지금은 편하게 혼자 사는 게 좋아요.
그럼 노랑잠수함은 무슨 뜻이에요? “
“전 뭐 특별한 뜻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제일 좋아하는 팝송 제목입니다. 제가 비틀즈의 Yellow Submarine을 좋아하거든요. 그걸 그냥 쓸까 했는데, 너무 길잖아요. 그래서 한글로 ‘노랑잠수함’이라고 쓰는 겁니다.”
“비틀즈를 좋아하시나 봐요?”
“무슨 그런 칠팔십 년 대 미팅 자리에나 어울리는 질문을 하세요? 비틀즈를 좋아하는 건 아니고 그냥 그 노래만 좋아해요. 신나고 재미있고 그래서요.”
제법 시간이 흘렀다.
빈 맥주병과 소주병이 제법 쌓이고, 식탁 위의 고기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자. 우리 2차 갑시다.”
‘북극곰’님이 2차를 제안하며 벌떡 일어선다.
“그러지 말고 그냥 노래방 가요. 전 술보다 노래 부르는 게 좋아요.”
‘민들레홀씨’님의 제안으로 노래방에 가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우르르 몰려서 노래방으로 향했다.
맨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북극곰’님은 별명만큼이나 우직한 걸음으로 벌써 노래방 문을 열고 들어선다.
노래방 문 앞에 서서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안 들어가세요?”
“네. 먼저 들어가세요. 전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갈게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릴 적 보았던 밤하늘엔 북극성이 있었고, 북두칠성, 카시오페아 별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2007년 10월, 서울 사당역 사거리 앞 ‘왜불러’노래방 앞에서 올려다 본 밤하늘엔 별이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별은커녕 그 비슷하게 반짝이는 빛도 보이지 않는다.
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고, 땅 위에도 그다지 나은 것은 없어 보인다.
그래도 두 시간 넘게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떠들다가 ‘왜불러’ 노래방으로 몰려간 저 사람들과의 인연은 또 다른 ‘이해’를 내게 선물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