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변명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했던가? 아내가 친정으로 가고, 내가 아이와 함께 지내는 날들이 계속 되면서 우리 부부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주위에서 알게 되었다. 가끔 위로한답시고 내게 말을 건넬 때, 빠지지 않는 말은 이런 것이다.
“아니, 다른 부부도 아니고 802호가 그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네. 얼마 전까지도 전혀 그런 내색 없었잖아?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아기 아빠 바람이라도 피웠어?”
이혼율이 50%를 훌쩍 넘겼다는데도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하다. 이혼의 가장 큰 이유가 배우자의 불륜이라고 생각한다.
또 이런 말도 듣는다.
“그런데 아이는 왜 아빠랑 있어? 엄마한테 안 보내?”
사실 이혼을 하면서 아이의 양육을 엄마가 책임지고 아빠는 양육비를 보내는 경우가 그 반대의 경우에 비해 더 많기는 하다.
나 역시 아이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던 것도 사실이고 아내도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고 해서 갈등을 했었다.
외할머니는 몸이 불편하셔서 아이를 보살펴주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아내는 사회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내 어머니께서 아이를 봐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처음부터 부모님께 아이를 맡길 생각으로 양육권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본 결과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 최악의 경우가 생각보다 너무 일찍 찾아오긴 했지만 말이다.
아내에게 이런 부분을 충분히 이야기하고, 언제든 아이가 보고 싶을 때는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현실적으로 아이를 키우면서 생활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아내는 어렵게 내 결정에 동의를 해 주었다.
이혼 결정을 하면서 많은 부분에서 서로 간에 약속을 한 부분들이 있다. 이게 생각보다 꽤 많은데다가 내가 성질도 급하다 보니 언젠가는 헷갈려서 실수를 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이 양육, 아내와 아이가 만나는 방법, 아파트 처분에 관한 문제....... 이런 부분에 대해 목록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내와 마주 앉아서 내용을 확인하고 도장을 찍었다.
이름하여 ‘이혼 후 할 일에 관한 확인서’를 작성한 것이다. 남들은 흔히 이혼 전에 이런 내용을 정리한다고 하는데, 우린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아이를 챙겨서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출근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촉박하고 아이가 유치원에 머물게 되는 시간이 길어지긴 했지만 견디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유치원에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내가 퇴근을 하고 제아무리 빠르게 움직여도 유치원에 도착하는 시간은 밤 여덟시 정도였다. 다른 원생들과 선생님들은 모두 집에 가고, 유치원 원장님만 아이와 함께 남아있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유치원에서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문제는 아이가 받는 스트레스였다. 친구들은 다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혼자 남아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예전엔 쾌활하고 명랑한 아이였다. 오히려 너무 장난이 심하다고 선생님들이 불평 아닌 불평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이가 얌전해지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은 아이가 얌전해지고 말도 잘 듣는다며 칭찬을 했다. 하지만 아이는 눈치를 보는 것이었고, 외로워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유치원 현관에서 아이를 부르면 원장님보다 먼저 가방을 메고 쪼르르 달려오던 아이는 어느새 얌전히 가방을 들고 발소리 죽이며 조심스레 나오기 시작했다. 원장님께 90도로 꾸벅 인사를 하고나면 아이는 내 옆에서 얌전히 나를 따라온다. 그러다가 골목길을 돌아서 유치원이 보이지 않으면 그제야 내 손을 잡는다. 그리곤 쉴 새 없이 조잘댄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이는 내 손을 절대 놓지 않았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평소에 안면이 있던 402호 아이엄마에게 매달 약간의 돈을 드리기로 하고 아이를 맡겼다. 유치원 종일반에 아이를 보냈었는데 반일반으로 바꾸고 나머지 시간은 402호에서 봐주기로 했다.
아침에 출근할 때, 유치원에 갈 준비를 해서 402호에 데려다 주고 출근을 한다. 402호에서 아침과 저녁 식사를 먹여주고, 점심은 유치원에서 해결을 하는 덕분에 내가 훨씬 여유 있게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하루는 아이에게 저녁밥은 뭘 먹었느냐고 물어보았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서 기념으로 스파게티를 먹었다고 한다. 아이는 양식을 참 싫어하는데 스파게티를 먹었다는 것이 의외였다.
“너 스파게티 싫어하잖아?” 하고 물었다.
아줌마가 먹으라고 주시는데 잘 먹어야지 착한 아이 아니냐고 묻는다. 맛이 있었냐고 했더니 다른 아이들은 맛있다며 잘 먹더라고 한다.
“너는? 너도 맛있게 먹었어?”하고 물으니 고개를 젓는다. 먹기 싫었는데 안 먹으면 아줌마가 슬퍼할 것 같아서 다 먹었단다.
이제 여섯 살밖에 안 된 아이가 그런 걸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 아팠다.
시계를 보니 밤 열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망설이던 나는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전데요. 주무셨어요?”
“아범이냐? 아직 안 잤다. 집이냐?”
“네, 잘 지내시죠?”
“우리야 잘 지내지. 넌 어떠냐? 아이하고 생활하기 힘들지 않아?”
별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인사를 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는데 어머니께서 부르신다.
“애비야. 아무래도 내가 맘이 쓰여 안 되겠다. 내일 올라가마. 가서 이야기하자.”
어머니는 벌써 아들이 전화한 이유를 다 알고 계신 것이었을까?
다음날 퇴근해서 집에 오니 어머니는 아이와 놀아주고 계셨다. 아이가 할머니와 노는 모습을 보니 몇 달 전, 그러니까 아이엄마와 이혼을 이야기하기 전의 그 때가 떠올랐다. 아이는 그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장난이 심한 말괄량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애비야. 좀 멀어서 힘들긴 하겠지만 내려와라. 같이 살자. 아이한테도 그게 나을 것 같다.”
“어머니 힘드셔서 안 돼요. 저 녀석이 얼마나 사고뭉친데요.”
“어차피 이 집도 에미한테 넘겨주기로 했다면서? 언젠가는 아파트도 비워줘야 할 것 아니냐? 빨리 날 잡아서 짐 옮기자.”
그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두 눈은 빨개져 있었다.
어차피 내린 결정,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영등포에서 인천, 그다지 먼 거리도 아니고 내가 출퇴근 시간이 좀 길어지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할 것 같았다.
결국 해가 바뀌고 1월 5일, 새해 벽두의 추운 겨울날에 아이와 함께 인천, 부모님의 집으로 들어갔다.
비어있던 방을 채우는 반쪽짜리 이사였지만 짐정리가 다 끝나고 나니 배가 출출했다. 아이에게 물었다.
“뭐 먹고 싶어?”
“아빠! 나 설렁탕.”
반 옥타브쯤 올라간 코맹맹이 목소리로 아이가 크게 외친다.
그래, 이게 바로 내 딸의 입맛이다.
이사하는 반나절 만에 아이는 된장찌개, 설렁탕에 김치전과 마늘장아찌를 좋아하는 예전으로 돌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