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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Aug 26. 2017

덴마크의 어머니 게피욘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덴마크  1


1. 게피욘 분수로 가는 길


눈 내리는 어느 겨울날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에 도착해 기차를 타고 시내로 향한다. 기차는 30여분을 달려 시내 한복판에 내려놓는다. 역을 나서면 건너편에 곧바로 빵가게를 만난다. 예전 언젠가 이곳에서 참 맛있게 빵을 먹었던 기억이 떠올라 저녁거리로 빵을 몇 개 사가지고 시내로 향한다. 빵집 이름이 ‘안데르센’이라고 해서 더 기억이 난다. 어쩌면 코펜하겐은 이 빵집 때문에 '맛있는 안데르센 도시'로 기억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코펜하겐 역 바로 앞에 있는안데르센 삥집

1월의 시내는 내리는 눈 때문인지 불어대는 바람 때문인지 몹시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움츠리고 걷는다. 시내 번화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낯익은 모습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넓은 광장이 나오고 그 앞에 시청 건물이 우뚝 서있다. 시청사 앞에는 멋진 용으로 장식을 한 분수가 있다. 이 작품은 건축가 마틴이 1905년에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규모가 제법 크다. 시청사 건물 한복판에는 코펜하겐을 부흥시킨 주교 압살론의 황금상이 붙어있어 권위를 더한다.


코팬하겐 시청사와 용조각상이 있는 분수

또 시청사 안에 있는 옌스 올센 방에는 1955년에 만든 천문 시계가 덴마크의 기술을 뽐내고 있다. 이 시계는 3년에 0.5초 밖에 오차가 나지 않는다고 하니 대단하기는 하다. 기회가 되면 가이드 안내로 천천히 시청사를 둘러보고 지붕 위 전망대로 올라가 코펜하겐 시내를 바라보는 것도 좋은 추억거리가 될듯하다.


시청 건물에서부터 게피욘 분수가 있는 곳까지 거의 직선으로 나있는 도로에는 가장 많은 볼거리들이 몰려 있는 듯하다. 시내 중심가 스트뢰(Strøget) 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뉘 하운 거리에 다다른다. 이곳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본떠 1673년에 만들었다는 ‘새로운 항구’(뉘 하운) 동네이다. 알룩달록한 집들이 늘어선 이곳에는 맛있는 음식점과 선술집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이 곳이 더 반가운 이유는 바로 안데르센이 고향을 떠나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작품 활동을 하며 지냈다는 사실 때문이다.


뉘하운에 들어서면 맛있는 먹거리들이 즐비하다. 뉘하운 중심가에 안데르센 기념관이 있다.



안데르센은 중년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뉘 하운에서 보낸다. 이곳에는 그가 살던 집 세 채가 있다. 처음 입주해 살았던 20번지와 1845년부터 1864년까지 살았던 67번지, 그리고 말년에 2년간 살았던 18번지 집이 있다. 안데르센이 젊은 시절 글을 쓰며 20년을 보낸 67번지 집은 그를 추모하는 기념관으로 꾸며 놓았다. 하지만 안데르센의 작품과 관련된  많은 것들을 모아 만든 박물관은 그의 고향 오덴세에 마련해 놓았다.


뉘 하운 거리에서 잠시 차 한잔을 마시며 안데르센이 어린 시절 이곳에 자리를 잡으며 출세를 위한 몸부림을 치며 겪어야 했던 지난 시간들을 반추해 본다. 또다시 불빛을 따라 거리로 나선다. 코펜하겐은 거리마다 지난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어 걸으며 사색하기 좋은 곳인 듯싶다. 문득  생각해 보니 코펜하겐은 사실 스칸디나비아의 관문처럼 북유럽 여러 곳을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도시로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이런 코펜하겐의 도시 기능이 바이킹 시대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이미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코펜하겐이 북유럽 도시를 이어주는 허브로서의 기능을 많이 하고 하고 있다는 것이겠다.

* 덴마크 왕가가 거주하는 아말리엔보르 성, 그 한가운데 프레데릭 5세의 조각상이 위용을 뽐내고 있다.



잠시 후 웅장한 아말리엔보르 성을 만난다. 이곳은 1794년부터 지금의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타 2세 일가가 거주하고 있다. 성이 위치한 중앙에 말 탄 동상이 서 있는데 18세기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군주로 20년을 통치하다 나이 42살에 요절한 프레데릭 5세의 조각상이다. 특별히 신통한 업적을 남기지 않았는데도 이리 거대한 동상을 세워놓은 것을 보면 덴마크 왕가의 위엄이 대단하기는 한 모양이다.


아말리엔보르 성 맞은편에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음향효과를 자랑하는 코펜하겐 오페라극장이 있다. 특히 밤경치가 아름다운 오페라극장은 세계 음악 애호가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아마 음향시스템이 좋아서 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조금 더 가면 덴마크 거대 해운기업 몰러 머스크 그룹 본사가 나온다. 전 세계 9만여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130여 개 국에서 주로 해상화물운송 영업을 하고 있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규모의 기업이다.


* 세계 최고의 음향시설을 자랑하는 코펜하겐 오페라 극장, 물가에 비치는 밤 풍경이 한폭의 그림 같다. 



도로에는 어둠이 깔리고 눈발이 날리지만 어느새 ‘성 알반교회’가 있는 곳까지 왔다. 이 교회는 그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코펜하겐에 있는 유일한 성공회 교회인데 1885년 코펜하겐에 있는 영국인들을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교회 내부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예쁘게 장식을 했는데, 눈 내리는 겨울 저녁 교회의 모습이 마치 크리스마스 카드에 그려진 모습처럼 포근하고 예쁘다.


드디어 '성 알반 교회' 뒤로 돌아서면 게피욘 분수를 만난다. 코펜하겐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한 분수, 한 겨울 어둠 속에서도 황소들의 씩씩거리는 숨결이 뜨겁게 느껴진다. 이 분수는 덴마크의 유명한 맥주회사 칼스버그가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진행한 프로젝트의 결과물 중 하나이다. 덴마크 건축가 안드레아스가 제작한 게피욘 분수는 스칸디나비아 신화 속 안주인이자 다산의 여신 게피욘이 황소를 몰고 밭을 일구는 모습으로 1908년에 만들었다. 그 규모가 제법 웅장하고 멋지다.


* 코펜하겐에 있는 유일한 성공회교회,  ‘성 알반교회'



게피욘(Gefjon)은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프레이야 여신의 여러 이름 중 하나인데, 그녀의 이름은 “번영과 행복을 주는 사람“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특히 게피욘은 스웨덴 작가 엘레오노라(Eleonora Charlotta d'Albedyhll: 1770–1835)가 낭만주의 서사시 게피욘(Gefion) 제4장에서 40페이지나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신화 속 어머니로 묘사하고 있어 건국 시조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따라서 게피욘 분수는 오늘날 덴마크 건국신화와 직접 연관이 있을 뿐 아니라 스웨덴과의 관계도 집작케 하는 상징적으로 중요한 건축물이다.


코펜하겐의 게피욘 분수



2. 덴마크 건국신화와 게피욘


아주 먼 옛날 스웨덴의 길피 왕이 여행을 다니다 하루는 동굴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동굴 속에서 옷차림이 남루한 어떤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 여인은 (발할라에 거주하는) 신들의 이야기도 잘 알고 세상 일도 두루 아는지라 길피 왕이 그녀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어 밤을 지새운다.


날이 밝자 길피 왕은 길 떠나기 전 밤새도록 말동무가 되어준 그 여인에게 답례로 하루 동안 갈 수 있는 만큼의 땅을 주겠다고 한다. 사실 이 여인은 아스가르드에 거주하는 게피욘 여신이었다. 게피욘 여신은 길피 왕의 제안을 듣자마자 거인과 결혼해 낳은 황소 자식 넷을 데리고 땅을 갈기 시작하더니 스웨덴 쪽 땅을 파내어 서쪽 바다에 갖다 놓는다. 그 섬이 지금의 코펜하겐이 속한 질랜드라는 이름의 섬(현재 덴마크 영토)이고, 스웨덴 쪽 땅을 파낸 원래의 자리에는 물이 고여 말라렌 호수(Mälaren: 현재 스웨덴 영토)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덴마크가 스웨덴으로부터 분리된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 어느새 덴마크 작품 속에서는 게피욘이 원래 처녀였기에 덴마크 왕 스크욀드르(Skjöldr)와 결혼을 하고, 덴마크 레이르(Lejre) 지방에서 함께 거주하며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덴마크의 건국신화가 이렇게 해서 탄생하는데 북유럽 신화의 안주인이자 풍요의 상징인 게피욘은 결국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제치고 덴마크가 차지한 셈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게피욘 분수는 바로 덴마크 건국신화를 작품화하면서 대외적으로 덴마크 국가 이미지를 강화하는 역할까지 한 셈이다. 역시 게피욘은 신화의 주인공으로서 뿐만 아니라 덴마크의 번영과 풍요로움을 빛낼 상징으로서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더구나 게피욘의 스토리텔링이 그 역할에 아주 잘 어울리고 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게피욘여신Gefjon)이 스웨덴 지역에서 빝을 일구고 있다.  by Frølich, 덴마크 Hilleroed의 Frederiksborg 성의 벽화일부



게피욘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는 13세기 아이슬란드 역사가 스노리 스투루손(Snorri Sturluson)이 사가(북유럽 신화)에 기록한 것을 바탕으로 한다. 스노리의 북유럽 신화에 대한 평가는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게피욘(Gefjon)에 대한 그의 설명에는 분명히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지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번영의 여신’과 ‘쟁기질’이라는 행위와의 관계는 북유럽과 다른 게르만 민족의 기독교 이전 시대에 존재하는 설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대개의 경우 지상의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여신들은 언제나 하늘의 신과 ‘hieros gamos’(신성한 결혼)을 통해 ‘땅을 비옥하게’ 한다.


이처럼 땅과 하늘의 공생관계는 가장 기본적인 설화의 주제이기도 한데 스칸디나비아에서 점차 바이킹 시대가 도래하게 되자 비옥한 "땅"을 염원하는 그들에게 그와 유사한 의미의 동의어가 생겨나게 된다. 고대 유럽에서 사용하던 ‘밭고랑’(furrow)이라는 말에서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 ‘Fjorgyn’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신화 속 주인공들은 대개의 경우 인간의 삶을 다른 형식으로 표현하는 아이콘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Mother Denmark by E. Jerichau-Bauman,  1851,  칼스버그 미술관 소장

한편, 고대 북유럽 문학에서 게피욘(Gefjon)에 대한 내용은 에딕(Eddic)이 쓴 서사시 ‘로카센나’(Lokasenna)에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아스가르드의 말썽쟁이 로키(Loki)는 게피욘(Gefjon)이 귀한 보석에 대한 욕심으로 스웨덴의 길피 왕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비난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 게피욘은 바로 프레이야 여신을 가리키기 때문에 풍요와 번영을 나타내는 고대 북유럽 여신으로서 게피욘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게피욘(Gefjon)은 간혹 "Gefjun", 또는 "Gefiun"이라고 쓰는데, 이 말은 모두 "평화와 풍요로움"의 여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북유럽 신화의 주인공들이 모여있는 아스가르드에 거주하는 프레이야 여신이 바로 게피욘이이라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강조될 수밖에 없다. 사실, 프레이야의 다른 이름 중 하나가 바로 게픈(Gefn)이며, 북유럽 고어인 동사 ‘gefa’에서 파생된 것으로, "to give(주다)", 또는 “Giver(주는 사람)”, 또는 “관대한 사람”(Generous One)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피욘이 다른 사람과 동침을 한 것을 알고 있는 역사가 스노리는 게피욘의 행위를 단지 순결이라는 차원의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원시사회의 자손 증대와 지상의 풍요로움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여전히 신화 속 주인공으로서 아름다움을 간직한 순수한 처녀 여신으로 존재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했다.


게피온은 게르만 신화에 등장하는 어머니 스타일의 여신들, 즉 프레이야(Freya)와 프리그(Frigg), 네서스(Nerthus), 피요르진(Fjorgyn), 그리고 요르드(Jord)와 시프(Sif) 같은 여러 다른 여신들과 비교해 볼 때 기본적인 역할이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이것은 그녀들이 모두 똑같은 여신으로 간주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동일한 유형의 여신들이 약간씩 다른 역할이 추가되거나 변형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처럼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지상의 어머니"는 바로 게르만 정신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신성한 여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여신은 인간에게 이로운 형태라면 어떤 형태로든 표현될 수 있고, 현재화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강조된다는 점을 기억하면 좋겠다.



○ 참고자료


- wikipedia/ Gefjon

- facebook page/ The Viking Warriors-Folk/Viking/Celtic/Pagan Metal

- 칼스버그 미술박물관 소장 자료 설명서


덴마크의 어머니 게피욘, 눈내리는 한 겨울에도 밭을 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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