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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Nov 09. 2017

인형의 집에서 사는 남자, 입센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노르웨이  5


“나는 새처럼 자유롭다. 나는 자유다!”


오슬로는 입센의 도시이기도 하다. 도시 한복판 가장 번화가인 칼스 요한 거리 한가운데 위치한 그랜드 카페는 마치 입센을 위해 존재하는 듯싶었다. 입센의 원래 고향은 베르겐, 그러나 그는 주로 오슬로에서 활동을 했다. 왕궁 근처 그가 살던 아파트는 지금 입센 박물관이 되었고, 국립극장은 그의 작품을 공연하기 위해 1899년에 문을 연다. 그리고 그가 매일 산책하며 걸었던 칼스 요한 거리는 지금도 오슬로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다.


그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듯싶다. 아니 그의 흔적은 오히려 점점 더 오슬로의 상징처럼 자리를 잡아가는 듯싶다. 오슬로 기차역에서 10여분 걸어가면 그랜드호텔이다. 여기서 왼편 길가로 나서면 바로 입센이 살던 아파트다. 이 집은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11년간 살던 집인데,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 관광객을 맞는다. 이곳에 입센의 친필과 사진, 소지품 등 각종 입센 관련 자료들을 만날 수 있다.


입센이 작업하던 서재에는 그의 외아들 시구르드(입센은 아들에게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 이름을 지어준다)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입구 쪽에는 그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입센은 스트린드베리를 ‘네메시스’(오만에 대한 보복을 상징하는 여신)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네메시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가히 입센다운 오기다.


입센은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 많았는데, 키가 작은 입센이 그걸 감추기 위해 언제나 정장을 하고 정부가 수여한 온갖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근엄한 모습으로 집을 나섰다고 한다. 그런 입센에게 그의 부인은 가장 날 선 비판자이자 동료였다고 한다.


* 정장 차림으로 집을 나서 카페로 향하는 입센, 그가 착용한 훈장들

* 입센의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그랜드호텔 카페에 입센은 언제나 같은 시각에 나타나 매번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신문을 읽거나 사람 구경을 즐겼다고 한다.

* 오슬로의 중심가 칼 요한스 거리, 오슬로 기차역에서 왕궁까지 이어지는 길 중간에 그랜드호텔 카페가 있다.



한때 화가를 꿈꾸던 입센에게 글쓰기 재주가 더 많다는 걸 알고 집필에 집중하도록 그를 자극하고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던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부인 수잔나였다. 가끔씩 작업을 마친 입센은 부인이 읽어주는 책을 들으며 영감을 얻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녀는 근엄한 입센에게 유일하게 따스한 버팀목이 되어준 여인이다.


입센은 매일 오전 9시에 작업을 시작해 11시 반이 되면 무조건 중단하고 그랜드 카페로 향한다. 그랜드 카페에서 그가 하는 일은 사람들과 사귀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을 관찰하고 신문을 읽는 일뿐이다. 그의 아파트에서 걸어서 10분도 안되어 도착하는 그랜드 카페, 10년간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갔다가 오후 2시가 되면 어김없이 또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지금도 카페에는 그가 앉았던 테이블에 그가 즐겨 썼던 모자를 놓아두고 그를 기리고 있다.


입센은 그의 고향 노르웨이 남부에 있는 시엔(Skien)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43년 15살이 되던 해 입센은 고향 시엔을 떠나 그림스타드(Grimstad)로 간다. 그곳에서 약국 조수로 일을 배우며 수잔나를 만나고, 시구르드를 낳고 아버지가 된다.


그리고 20살에 크리스티아나(오슬로의 옛 이름)에 정착해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 수입은 없고 생활에 대한 스트레스로 점차 알코올에 빠져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린 끝에 입센은 노르웨이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1864년 가족들과 이탈리아로 간다.


1886년 로마에서 심혈을 기울여 ’ 브란드‘(Brand)를 발표하고, 1867년에 ‘페르 귄트(Peer Gyunt)'를 발표함으로써 극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다진다. 그 후 인형의 집(Et Dukkhehjem: 1879)과 유령(Gegangere: 1881) 등을 계속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위상을 확실히 다졌다. 1892년까지 28년간을 독일, 이탈리아를 전전하다 드디어 오슬로에 정착한다.


* 입센이 거주하던 아파트, 지금은 그를 기념하는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 박물관 앞에 있는 입센의 동상

* 오슬로 국립극장, 그 앞에 서있는 입센(왼쪽 동상)

* '페르 귄트’ 공연 포스터(2001년도)



그는 총 26편의 희곡과 1권의 시집을 남겼다. 그중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품은 ‘인형의 집’이지만 사실 노르웨이에서는 ‘페르 귄트’로 더 사랑을 받는다. 장대한 5막 극시 안에 노르웨이 신화는 물론 모험과 도전을 좋아하는 그들 국민성이 담긴 까닭이다.


그러나 인형의 집(Doll’s House)에서 주인공 노라(Nora)가 하는 말은 아직도 우리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나는 단지 아버지 집에서 남편 집으로 옮겨왔을 뿐이고, 아내이자 어머니라는 역할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입센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우리가 죽은 자를 깨울 때“(1899)라는 작품을 남겼다. 이 작품은 어쩌면 입센이 처음으로 자기 내면의 모습을 드러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임스 조이스는 입센의 이 작품을 읽기 위해 노르웨이어를 배운 적이 있다고 고백을 하기도 했다는데 이 작품에서 입센은 절규하듯 외친다.


“나는 자유다, 나는 자유다, 나는 자유다. 감옥에서의 삶은 더 이상 없다. 나는 새처럼 자유롭다. 나는 자유다!”

그렇게 자유를 외치고 입센은 세상을 떠나갔다. 그날은 1906년 5월 23일이었다.


오슬로 바닷가에서 맞는 바람은 자유롭다. 진분홍빛으로 물든 저녁노을은 문득 뭉크의 절규를 떠올리게 한다. 불안과 두려움의 절규가 아닌 자유로움의 절규, 그랬다. 핏빛으로 물든 저녁 하늘은 분명 자유로움을 보여주기 위한 절규였다. 뭉크의 절규가 그랬고 입센이 마지막으로 부르짖은 “새처럼 자유롭다”라고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일지 모르겠다.




* 입센의 면면을 보여주는 각종 삽화들, 그의 작품과는 상관없이 인간적인 면에서 입센은 언제나 독선적이고 고집불통이고, 심지어 북유럽 신화의 절대자 '오딘'과 맞먹는 권위를 가졌다고 평하기도 했다.

* 입만 열면 뻥이고, 그러니 누구나 그에게 쏴대려고만 하고...  

* 입센을 오딘처럼 표현하고 그런 절대자를 모두가 추종한다는 삽화들, 심지어 그의 냄새나는 발까지...

* 오슬로에서 가장 번화한 칼 요한스 거리의 사교장 그랜드호텔 카페를 입센이 쥐락펴락한다는...

* 첫 번째 사진은 칼 요한스 거리의 100년 전 풍경

* '뭉크가 바라본 입센'과 '입센의 두 여자'란 제목의 책, 입센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제는 신화 속 인물이 된 듯...

어느날  문득 오슬로 항에서 만난 저녁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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