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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Dec 26. 2017

아이놀라의 무지개 소녀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핀란드  5


1.


1904년, 시벨리우스는 39살이 되던 해에 헬싱키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그가 그토록 동경하던 전원생활을 결행한다. 그래서 헬싱키에서 북쪽으로 4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야르벤파에 집을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50년을 보낸다. 집 이름을 '아이놀라'라고 했다.


아이놀라(Ainola)는 핀란드 말로 아이노의 집이라는 뜻인데, 시벨리우스 부인 이름이 아이노였기에 그녀 이름으로 집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아이노라는 이름 역시 시벨리우스가 즐겨 작품 소재로 삼은 핀란드 서사시 칼레발라에 나오는 아름다운 처녀의 이름이기도 하다.


아이노는 핀란드의 명문가 예르네펠트 가문의 딸인데, 그녀의 네 형제들 모두 핀란드 예술가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장남 카스퍼(Kasper)와 차남 에로(Eero)는 화가였으며, 아르마스(Armas)는 오케스트라 지휘자겸 작곡가, 막내 아르비드(Arvid)도 작가였다고 한다.


아무튼 금세기 초반 핀란드의 유명한 작가나 신인, 화가들이 야르벤파 인근에 있는 투슬라(Tuusula) 호수 근처에 많이 몰려와 살았는데 시벨리우스도 처남인 화가 에노 예르네펠트(Eeno Jarnefelt)의 권유로 헬싱키에서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이 집 설계는 시벨리우스의 친구이자 건축가인 라르스 송크(Lars Sonck)가 맡았는데, 그는 헬싱키의 칼리오 교회와 탐페레 성당, 투르크의 미카엘 교회 등을 설계한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였다.


이후 시벨리우스는 이곳 아이놀라에서 핀란드 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꾸준히 교향곡 3, 4번, 현악사중주 D단조 등을 작곡한다. 또 영국, 미국 등으로 연주여행을 다니며 전 세계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17년, 드디어 러시아 혁명을 틈타 핀란드가 독립을 하자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시벨리우스는 1923년에 교향곡 6, 7번을 잇달아 완성한다. 그런데 7번은 기존의 교향곡 형식에서 탈피한 시벨리우스만의 독창적 형식으로 만들어 걸작이란 소리를 듣는다.


그의 나이 60세가 되는 1925년, 연금은 다시 늘어나고 국민들은 그를 위해 성금 27만 마르크까지 모아 기부를 한다. 그뿐 아니라 훈장도 받고 전 세계에서 축하 메시지도 보내온다. 시벨리우스의 유명세가 가히 세계적이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작품으로 핀란드 신화를 바탕으로 한 교향시 '타피올라'를 작곡한다.


시벨리우스의 '운명'을 연극으로 보여주겠다는 포스터, 시벨리우스가 아이놀라로 이주를 한게 운명이었을까?

* 시벨리우스가 있는 아이놀라를가려면 야르벤파 역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핀란드는 산림이 우거진 나라였기에 시벨리우스는 이를 음악으로 묘사한다. 그는 음악노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북쪽 나라에 널리 퍼져있는 어두컴컴한 숲, 신비로움을 간직한 황폐한 꿈, 위대한 산림의 신이 그곳에 사네. 그 어둠 속에는 산림의 요정들이 신비를 이룬다.” 이 작품은 독일 태생 미국 지휘자 담로쉬(W. Damrosch)의 청탁으로 작곡을 했고, 1926년 뉴욕에서 처음 공개된다.


1930년 65세의 시벨리우스는 그가 어릴 적 다닌 학교에서 자신의 흉상 제막식을 거행한다는 연락을 받고 고향을 찾는다. 그가 태어나 자란 하멘린나의 집을 둘러보고 근처의 바나야베시 호수로 간다. 여름이 시작되는 어느 날, 호숫가에 석양이 물들기 시작할 즈음 시벨리우스는 호수에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어 말을 하기 시작한다. "내가 핀란디아를 작곡할 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젊은 날에 보았던 내 고향의 바로 이 경치였다"라고 밝힌다.


그렇게 시벨리우스는 여전히 고향 하멘린나의 호수를 잊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바나야베시 호수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었나 보다. 그러니 하멘린나의 바나야베시 호수를 닮은 야르벤파의 호수 ‘투술라’를 내려다보며 시벨리우스는 유년시절부터 자신의 조국 핀란드의 자연을 떠올리며 작품에 담으려 했었나 보다.


시벨리우스는 1957년 자택에서 92세로 숨을 거둔다. 아내 아이노 시벨리우스(Aino Sibelius, 1871-1969)는 그가 죽은 후 12년을 더 살다 98세에 남편곁으로 간다. 시벨리우스가 죽자 헬싱키 교회에서 핀란드 전 국민의 애도 속에 장례식을 치른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장례식을 치른 후 그의 유해는 아이놀라 자택 앞 뜰에 묻혔다. 부인도 죽은 후 그의 곁에 묻혔다.


아이놀라'에 딸린 숲은 4헥타르나 된다. 아이놀라에 들어서면 입구에 사무실 겸 안내소가 있고 그 곁으로 시벨리우스가 살던 집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잠시 오르면 언덕 위에 목조로 된 하얀 집이 한 채 보인다. 근처 야산에서 뻗어 내린 언덕에 시벨리우스가 거처하던 전망 좋은 집이다. 이 집에서 내려다보면 멀리 투슬라 호수가 보인다.


집 곁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서면 작은 공터가 나오는데 그곳에 시벨리우스 무덤이 있다. 그 무덤에는 시벨리우스와 부인 아이노가 함께 묻혀있다. 정사각형의 돌로 만든 비석은 사위인 건축가 블롬슈테트가 디자인했다. 자연을 사랑하던 시벨리우스는 그렇게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숲 속 언덕 한편에서 쉬고 있었다.


* 시벨리우스가 살던 '아이놀라'와 부부가 함께 묻힌 무덤




2.


후손들은 시벨리우스 부부가 모두 세상을 떠나자 1972년 아이놀라와 집안의 가구들을 모두 핀란드 정부에 팔았다고 한다. 그 후 핀란드 정부는 아이놀라 재단을 설립하고 1974년 야르벤파의 시벨리우스가 살던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하고 일반인에게 공개한다. 아이놀라 집은 시벨리우스가 살았던 상태대로 보존되고 있는데 4개의 방과 부엌 등 1층을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아이놀라를 찾던 날 야르벤파의 기차역에서부터 아이놀라까지 눈 오는 길을 1시간이나 걸어서 찾아갔다.(* 겨울철 버스 배차간격이 너무 길다.) 아이놀라에 도착해 사무실로 향했다. 실내에는 여러 명의 젊은 남녀가 음악을 틀어놓고 환담을 하고 있었다. 그때 어떤 여성이 나타나 “오늘은 사적인 행사가 있어 시벨리우스의 집은 관람할 수 없다”라고 한다. 안내를 해주어야 하는데 못하겠다는 말이다. “대신 이곳 아이놀라 집터는 마음대로 둘러보아도 된다.”며 가보라는 시늉을 한다. 순간 아무 말도 못 하고 밖으로 나와야 했다. 입구에 붙어 있는 안내문에는 분명 오후 5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다고 되어 있었고, 필자가 도착한 시각은 2시쯤이었다.


시벨리우스가 살던 집을 국가에 팔고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면 추측컨대 시벨리우스 식구들 중 한 사람, 나이로 보아 손녀딸일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뭐 아무리 겨울에 찾아오는 관광객이 없더라도 해야 할 공적인 임무, 사무실을 지키고 안내해야 하는 업무를 무시하고 근무시간에 사무실에서 파티를 하다니, 시벨리우스가 알면 버얼떡 일어날 지도 모르겠다.


시벨리우스 흔적을 좇아 지구 반대편에서 여기까지 찾아온 나그네는 그가 살던 집 내부는 끝내 보지 못하고 인터넷을 뒤져 집구경을 하게 되었다. 한 사람의 ‘파티’ 때문에 발길을 돌려야 하다니, 야르벤파의 시벨리우스 기념관을 지키는 아가씨, 휘바 휘바!


문득 그녀의 모습에서 시벨리우스가 작곡한 ‘포흐욜라의 딸’이란 작품이 연상되었다. 1904년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야르벤파의 아이놀라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한 시벨리우스, 그가 사랑하던 대자연의 느낌을 작품으로 옮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더니 드디어 핀란드의 신화 ‘칼레발라’를 바탕으로 ‘포흐욜라의 딸’(1906)이란 작품을 완성한다.


* 눈 내리는 길을 한시간 정도 걸어서 도착한 아이놀라

* 아이놀라 1층 내부



포흐욜라는 핀란드 신화 칼레발라에서 춥고 음산한 북쪽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포흐욜라의 딸’이란 작품의 서두에서 들려오는 호른과 파곳 소리는 추운 북쪽 지방 분위기를 묘사하려는 듯 애처롭게 울려 퍼진다. 그리고 아름다운 무지개 소녀 포흐욜라의 딸을 보여주려는 듯 첼로 연주가 이어진다. 그러나 이 첼로 소리는 조만간 쿨레르보에게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암시가 들어있어 다소 으스스한 느낌으로 불안감을 담고 전개된다.


포흐욜라의 딸 무지개 소녀는 칼레발라에 나오는 베이네뫼이넨과 일마리넨, 그리고 레민카이넨 세 영웅들이 서로 아내로 맞으려고 경합을 벌리는 와중에 대장장이 마법사 일마리넨에게 암시를 주어 자기 어머니이자 포흐욜라의 지배자인 마녀 로우히가 원하는 마법의 맷돌 삼포를 만들게 한다. 그 덕분에 일마리넨은 포흐욜라의 딸 무지개 소녀와 혼인할 수 있게 된다.


시벨리우스는 ‘포흐욜라의 딸’에 등장하는 강인한 영웅들 모습을 금관악기로 표현하면서 바이올린과 첼로를 가지고 현악기의 선율로 대비를 이루며 음산한 북쪽 지방의 겨울 풍경과 아름답고 교활한 포흐욜라의 딸을 놓고 벌이는 신들의 신부 쟁탈전 같은 장면들을 연주해간다.


나중에 칼레발라의 주인공 베이네뫼이넨이 포흐욜라의 딸 무지개 소녀뿐 아니라 아이노에게까지 청혼을 거절당하는 서글픈 심정을 시벨리우스는 현악기로 긁어댄다. 그리고 베이네뫼이넨이 포흐욜라의 딸 무지개 소녀를 얻기 위해 마지막 과제를 수행하다 도끼로 자신의 무릎을 찍게 되어 무지개 소녀를 얻기 위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드디어 ‘포흐욜라의 딸’은 서서히 끝나고 만다.


시벨리우스가 칼라발라 신화중 포흐욜라의 딸과 벌이는 세명의 영웅들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들었는데 이 작품의 줄거리는 사실 그다음이 더 흥미롭다. 나중에 일마리넨과 혼인을 하는 무지개 소녀는 결국 그의 노예 쿨레르보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아이놀라의 사무실을 지켜야 할 그 아가씨도 바로 포흐욜라의 딸 무지개 소녀처럼 지나친 자기중심적 행동으로 어쩌면 뜻하지 않게 쿨레르보에게 죽임을 당하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놀라의 그녀가 왠지 포흐욜라의 딸 무지개 소녀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건 무슨 연유일까?


* 말년의 시벨리우스 부부의 정다운 모습들

시벨리우스는 어릴적 하멘린나에서 보았던 바나야베시 호수를 그리며 인근에 있는 투슬라 호수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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