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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Jan 09. 2018

라플란드 숲 속 나무 요정들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핀란드  9


1. 나무 요정들과 함께


스칸디나비아 북쪽 라플란드는 언제나 음산한 기운이 감돈다. 숲이 깊어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라플란드로 들어가면 갈수록 숲 때문이 아니라 오래된 사미인들 발자취 때문이란 걸 알게 되었다. 마치 어렸을 적 트라우마로 남은 고통들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어릴 적 일들을 기억창고에서 끄집어내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인간의 기억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고 했던가? 하지만 때로는 그렇지 못해 고통을 받게 되고 심지어 죽음에 까지도 이르게 된다고 하지 않던가. 잊어야 하는데 잊을 수 없다면 그보다 더한 고통이 없을 것이다. 마치 첫사랑 기억처럼 말이다.


라플란드가 그랬다. 라플란드를 달리면 달릴수록 마치 첫사랑처럼 달콤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진한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그걸 감추려고 한밤중 오로라가 그리도 빛을 뿜어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로바니에미를 떠나 북쪽 라플란드의 관문 이발로를 향해 달린다. 로바니에미에서 이발로 까지는 자동차로 대략 3시간 반 정도 거리, 하지만 중간중간 숲을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에 정확히 얼마가 걸릴지는 모른다. 어쩌면 한밤중에 숙소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건 이발로 못 미쳐 사리셀카에 도착했을 때였다. 이곳은 휴양지로 좋은 리조트 시설을 갖춰 놓았다.


그러나 그보다 나를 끌어당긴 곳은 따로 있었다. 사리셀카 리조트 못 미쳐 언덕을 돌아올 때  벌판에 비치는 조각 햇볕이 나를 사로잡았다. 마치 작은 나무들이 요정들처럼 서있는 그 사이를 구름 속에서 나온 해가 조금씩 비추더니 이내 사라지고 또 잠시 후 다시 비추고 그랬다. 마치 해와 나무가 숨바꼭질을 하는 듯했다.


벌판에 서있는 나무들은 햇볕이 비추는 사이로 마구 뜀박질을 해대며 내게 달려오는 듯했다. 그리고는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그렇게 놀이판을 즐기고 있었다. 한참을 길가에서 요정들 숨바꼭질 구경하다 보니 정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가끔 그런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이날은 나무 요정들 때문에 진짜 꿈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간신히 꿈에서 깨어난 건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였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그냥 이발로로 향했다. 작은 통나무집에 도착한 건 어둠이 짙게 깔리고 나서였다. 내심 밤이 더 깊어지면 하늘이 열려 별과 오로라를 볼 수 있으려니 하며 늦은 밤을 기다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눈이 질펀하게 내린다. 아마 요정들하고 노느라 피곤할 테니 일찍 잠자리에 들라는 계시처럼 보였다.


* 로바니에미(Rovaniemi)에서 이발로(Ivalo)로 가는 사이에 만난 풍경들




2. 숲으로 가야 하는 이유


드리어드(Dryad)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무 요정, 또는 나무 정령이다. 드리이(Drys)는 그리스 참나무를 의미하고 드라어드(Dryads)는 참나무 애벌레를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은 흔히 모든 나무들 요정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무 요정의 특징은 누구 앞에서 건 언제나 수줍어한다는 점이다. 그 때문인지 나무 요정은 쉽사리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거나 그 모습을 잘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드리어드(Dryads)는 다른 님프들과 마찬가지로 초자연적으로 오래 산다. 이들은 나무와 공동운명체이다. 나무가 죽으면 나무요정인 하마드리어드(hamadryad)도 같이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 요정 드리어드와 그리스 신들은 나무 요정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나무를 해치는 자들에게 엄한 벌을 준다.


어쩌면 그리스 신화 속 나무 요정들처럼 북유럽 신화 속 나무 요정들도 원래 수줍음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수줍음 많은 사연들이 어쩌면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 속 장면으로 구현된 것은 아닐까라는 호기심 같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익명의 작가가 그린 나무 요정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에서 숲을 지키고 자연을 보존하는 엔트(Ent)족, 아마 나무를 지키는 요정쯤 되겠지 싶은, 이들은 고대 팡고른 숲의 주인이다. 하지만 점차 숲이 줄어들면서 이들 세력도 어쩔 수 없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오크족들 때문에 엔트족이 점차 위험에 처할 위기에 봉착하자 엔트족은 드디어 사루만이 이끄는 오크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엔트족은 오크족과 싸움에서 결국 승리한다. 엔트족으로 변신한 나무들의 거대한 몸짓과 특유의 나무 모습을 한 엔트족이 오크족을 짓밟는 장면은 통쾌함을 넘어 신비한 느낌마저 준다. 단순히 판타지라고 하기보다는 자연 파괴자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를 담은 엄한 꾸지람 같은 메시지를 한 무더기 받아 들은 느낌이었다. 영화를 보고 났을 때 어쩌면 나무 요정들이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게 틀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지의 제왕은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북유럽 창조설화 중 최초의 인간 탄생이 나무로부터 시작한다. 아스가르드의 주인공 오딘(Odin)과 그의 형제들이 해안가에서 나무 조각 2개를 발견하고 이것으로 최초의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태초의 인간들


에다(Edda)를 쓴 스노리 수투룰손(Snorri Sturulson)에 따르면, 창조주들인 보르(Bor), 또는 부르(Bur)의 3 아들인 오딘(Odin)과, 빌리(Villi), 그리고 베(Vé)가 해변에서 두 개의 나무 조각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최초의 인간을 만들고 이들에게 정신과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한다. 그다음, 마음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주고, 마지막으로 듣고 말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고 한다.


보르의 아들들은 또한 이들에게 생동감 넘치는 나무로 만든 옷과 그들에게 아스크(Ask)와 엠블라(Embla)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다고도 했다. 그리고 이들이 인류의 기원이 되도록 자손을 퍼뜨릴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초의 인간 이름이 ‘아스크’(Ask)는 물푸레나무(Ash tree)를 의미하는 것은 알겠는데 ‘엠블라’(Embla)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느릅나무’(Elm tree) 일 가능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언어 뿌리가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가능성 있는 나무로 ‘포도나무’(vine)를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나무 조각으로 인간을 만들었을지 궁금하긴 하지만 중요한 건 다름 아닌 나무로 인간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상상력이다. 많은 대상을 두고 하필이면 나무였을까라는 궁금증이 들지만 이로 인해 스칸디나비아 숲 속 나무 요정, 또는 나무 정령은 인간의 다른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는 가정이 성립한다. 그러니 숲으로 가야 할 이유가 더욱 분명해졌다. 모지리들이 판치는 세상보다 숲으로 가면 태초의 인간 조상인 나무 요정들을 만나 함께 숨바꼭질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말이다.


* 라플란드 렘멘요키 국립공원 지역으로 가는 중에

* 길가 버스정류장에 잠시 앉아보고 싶다는... 사리셀카 리조트에 있는 사무실 건물

* 렘멘요키 국립공원 내에 사미인들이 운영하는 숙소들이 많다. 호수가 통나무집이 숙소




3. 나무 요정들 사이로 빛나는 오로라


다음날, 이발로를 출발해 핀란드에서 가장 큰 렘멘요키 국립공원(Lemmenjoki National Park)으로 갔다. 숙소는 렘멘요키 국립공원 안에 있다. 그곳으로 가면서 중간에 사미인들의 애환을 알 수 있는 이나리에 있는 박물관과 ‘사미 의회’도 들러 본다.


렘멘요키 국립공원은 핀란드에서 가장 넓은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곳이다. 그 넓이만큼 많은 허브와 희귀 식물들이 자라고 있고 순록들 먹이로 가장 좋은 이끼류들이 잘 자라기 때문에 보존가치가 그만큼 크다는 게 국립공원 지정 이유이다.


핀란드 북극권 지역은 대부분 사미인들 거주지역이다. 물론 이곳에 핀란드인이나 다른 외국인 출신들도 함께 거주하고 있을 테지만 대부분 가축 사육권이 우선적으로 사미인들에게 있기 때문에 사미인들 보호지역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국립공원 내 대형 사슴 목장이 여러 개 존재하는데 모두가 사미인들이 운영하는 목장이다. 이곳에서 일반 관광객들이 숙소로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더구나 이 지역이 관광객들에게 좋은 이유는 무엇보다 별도의 오로라 관광료(15만원 내외)를 지불하지 않고 숙소에서 바로 오로라 사냥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근에 도시 불빛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커다란 호수와 강이 흐르는 곳이 많기 때문에 오로라 촬영지 선택을 잘하면 멋진 사진을 촬영할 가능성이 많다. 물론 날씨가 좋아야 하는 건 필수이겠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핀란드가 가장 북쪽에 위치한 라플란드 지역을 1) 발할라(Saariselkȁ)와 2) 우트가르드(Inari), 그리고 최북단 노르웨이 국경지대인 우트요키(Utsjoki) 인근 지점을 3) 아스가르드라고 명명해 오로라 관광단 모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라플란드 지역이 그만큼 오로라를 볼 확률이 높다는 이유일 것이라 생각한다.


핀란드가 이처럼 재미난(?)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역시나 마케팅 전략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중 가장 뛰어난 마케팅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핀란드 민속설화와 달리 북유럽 신화가 가지고 있는 전파력이 높다 보니 자신들과 관련이 없는 신화임에도 관광객 호객행위를 위해 북유럽 신화를 차용하는 것이다. 그런 게 마케팅이라는 듯이 말이다.


아무튼 그것이 맞든 그르든 라플란드로 올라갈수록 모든 것이 평온한 느낌이 든다. 그만큼 인적이 드물고 발트해의 상대적으로 따스한 공기가 음산한 라플란드를 감싸며 나무 요정들에게 다른 정령들의 노래를 전해주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가를 따라 숙소로 가는 내내 라플란드 숲에서는 나무 요정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 참고 자료

- 영화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 Wikipedia


ᚹᚺ: The Enchanted Forest: https://youtu.be/5DaVhL4PQGY



* 아래 오로라 사진들은 모두 렘멘요키(Lemmenjoki) 국립공원 안에 있는 호숫가 숙소에서 촬영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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