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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Jan 13. 2018

노르웨이 최북단 도시 시르케네스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노르웨이  15


1. 시르케네스는 해방구


노르웨이 최북단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시르케네스(Kirkenes),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인구 3,500명이 광산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작은 항구 도시이다. 그런데 이 도시에 누가 관광을 하러 올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사실은 인기 있는 관광지로 손꼽을 정도라고 한다.


시르케네스는 북극권이 시작하는 곳에서부터 북쪽으로 약 5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위도가 높다 보니 백야현상이 5월 17일에서 7월 21일까지, 그리고 겨울 흑야는 11월 21일에서 1월 21일까지 각기 두 달간씩이나 진행된다. 특이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다른 도시보다 많은 셈이다. 거기에 더해 기온도 상대적으로 다른 위도 지역에 비해 덜 추운 편이다. 하지만 한 겨울 영하 35도까지 내려가고 여름에는 거의 40도를 육박하는 대륙성 기후는 그리 만만한 날씨는 아닐 것이다.

시르케네스는 노르웨이 최북단 자치주 핀마르크(Finnmark)에 속한다. 원래 도시 이름은 ‘피셀브네스’(Piselvnes)였는데 이 도시에 1862년 교회를 세우면서 ‘교회의 곶‘(Pis River headland)이라는 뜻을 가진 ’ 시르케네스‘(Kirkenes)라는 이름으로 바꾼다.(* Kirkenes는 church(kirke-)와 at the cape(-nes)를 합친 단어이다.)



시르케네스 주변 지역은 현재의 국경이 정착되는 1826년 까지 노르웨이와 러시아가 공동 관리하는 지역이었다. 당시 인구는 고작 1000명이 조금 넘는 숫자였다. 더군다나 시르케네스는 1998년까지 행정구역으로는 ‘마을’(town)이었다.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들과 어민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른 주민들은 살고 있지 않았다.


시르케네스가 발전하기 시작한 건 광산이 들으면서 부터이다. 철로가 놓이고 건물이 들어서고 도로를 닦기 시작했다. 광산개발 덕분에 20세기 시작과 더불어 시르케네스는 새로운 도약을 시작한다. 그런데 시르케네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당시 나치 독일은 노르웨이를 점령한다. 독일군이 이곳까지 진격한 것은 스웨덴 키루나의 철광석과 시르케네스에서 나오는 양질의 철광석을 확보하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 이나리를 출발해 우트스요키(Utsjoki)를 거쳐 시르케네스로 가는 중에 만난 호수들(핀란드)

* 핀란드 국경마을 우트스요키를 지나 노르웨이에 들어와 네이든(Neiden) 마을을 지나면서, 네이든 교회

* 핀란드와 노르웨이 국경지대를 흐르는 카라스요키(Karasjohki) 강을 따라 시르케네스로 가는 길



독일군은 전함을 시르케네스로 이동 배치하고 전투기와 보병부대까지 이곳에 전진 배치한다. 독일군 전략은 비단 철광석을 확보하는 것뿐 아니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련을 경계하면서 기회를 틈타 소련을 침공하려는 속셈이기도 했다. 시르케네스는 그런 의미에서 독일군에게는 당시 소련의 바렌츠 해로 나가는 부동항 무르만스크를 제압하고 소련 본토로 진격할 수 있는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을 했던 셈이다. 그러나 독일군이 시르케네스를 점령한 지 6개월이 지난 1944년 10월 25일 소련군이 진격해 옴으로써 독일군은 물러가고 시르케네스는 소련군이 점령하게 된다.


시르케네스를 소련군이 해방시키기 까지 실제 시르케네스는 적지 않은 공습 피해와 전쟁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시르케네스는 2차 대전 당시 몰타에 이어 두 번째로 공습을 많이 받은 도시이다. 당시 독일군이 점령하던 시르케네스를 소련군이 해방시키기 위해 하루에도 여러 번씩 경보를 울리고 실제 하루에 거의 한번꼴로 폭격을 하는 바람에 시르케네스 주민들은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고 한다.


6개월 간에 1000건이 넘는 경보와 320건의 공습을 겪어야 했던 시르케네스는 2차 대전이 일어나면서부터 6개월 동안 거의 매일 한건 이상의 공습을 당한 셈이다. 매일 계속되는 공습으로 도시 전체는 거의 다 파괴되고 만다. 1944년 10월 25일 독일군 수비대가 철수할 때 남아있는 기반 시설은 물론이고 주민들 가옥도 모조리 파괴되고 오직 시르케네스에는 13채의 가옥만 남아 있었다.


최악의 공격은 1944년 7월 4일 소련의 공습으로 140채의 집이 한꺼번에 불길에 휩싸이면서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시르케네스는 유럽 본토에서 가장 빈번하게 폭격을 당한 도시 중 하나가 된다. 공습이 시작되면 주민들은 해안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을 중심부에 마련된 공습 대피소 안데르스그로타(Andersgrotta)로 피신했다.


그러나 점차 소련군이 진격해 온다는 정보에 따라 시르케네스 전투를 앞두고 주민들 일부는 노르웨이 서쪽 해안 도시 트롬쇠(Tromsø)와 남쪽 지역으로 대피한다. 그러나 주민들은 대부분 그들이 기르던 가축들과 함께 광산에서 10여 일간 숨어 지낸다. 1944년 10월 드디어 시르케네스에 독일군이 물러가고 소련군이 나타난다. 독일군의 참패로 전쟁은 막을 내린 것이다. 시르케네스 광산은 2차 대전 중 시르케네스에 남은 유일한 산업시설물이었다. 드디어 노르웨이 최초의 해방 정부가 시르케네스에 세워진다.

* 시르케네스 항구 전경

* 시르케네스 시내 중심부와 교회(2차 대전 당시 파괴된 것을 1959년 재건축을 했다.)

* 2차 대전 당시 사용한 방공호 '안데르스그로타'와 ‘어머니들을 위한 동상’, 이 동상은 2차 대전을 겪으며 가장 큰 고통을 이겨낸 어머니들에게 바치는 동상이라고 한다.




2. 시르케네스의 기차


시르케네스 주민 대다수는 노르웨이 출신이며 주민 일부는 사미인(Saami)들이다. 그리고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일부 핀란드 출신도 살고 있다. 시르케네스가 노르웨이와 러시아, 그리고 핀란드 3개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최근 새로운 이민자들이 늘고 있다. 중동사태가 악화되면서 시리아 난민을 비롯한 이주민들이 러시아를 거쳐 이곳 시르케네스로 몰려드는 추세이다. 시르케네스 인구가 3,500명 정도인데 최근 유입된 이민자들 숫자가 500명이 넘는다고 하니 엄청난 증가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매주 목요일마다 무르만스크 상인들이 러시아 수공예품들을 가지고 시르케네스로 몰려와 상품을 판매하는 시장도 형성이 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값싼 물건들이기 때문에 시르케네스 주민들이나 관광객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시르케네스에는 베르네바튼(Bjørnevatn) 광산에서 채굴한 철광석을 시르케네스 항구까지 운송하는 철로가 있다. 이 철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북쪽에 설치해 운행하는 기찻길이다. 하지만 시르케네스 베르네바튼 철도(Kirkenes-Bjørnevatn Line)는 일반인들이 이용할 수가 없다. 철도노선이 다른 곳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 광산에서 나오는 철광석을 단지 시르케네스 항구까지 수송하는 목적으로 설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철도를 이용해 시르케네스로 오거나 이곳에서 출발을 하고 싶다면 러시아 국경을 넘어가 러시아 철도가 있는 마을에서부터 모스크바나, 블라디보스토크, 또는 멀리 울란바토르나 베이징까지 여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철도를 이용해 스칸디나비아 남쪽으로 내려가고 싶다면 가장 가까운 기차역이 있는 핀란드 로바니에미(Rovaniemi)까지 가야 한다.


로바니에미까지는 약 500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만일 노르웨이 쪽으로 가고 싶다면 노르웨이 최북단 철도역 나르비크(스웨덴 키루나와 이어진 철광석 철도노선)까지 가서 스톡홀름으로 내려가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르케네스는 기차보다 일반 대중교통으로는 장거리 버스를 이용하거나 승용차나 비행기를 이용하는 게 더 빠르고 경제적일 것이다.


* 소련 병사 시르케네스 해방기념 동상과 죽은자들의 쉼터

* 전쟁박물관 앞에 설치한 동상과 전시물(가운데 사진은 공습 장면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 시르케네스에도 해마다 12월 초에 개장하는 얼음호텔이 있다.(얼음호텔 사진들은 홈페이지에서 빌려왔다.)




3. “엘리시프 베쎌(Ellisif Wessel: 1866-1949), 경계선상의 삶과 일”


베쎌은 오슬로 인근 가우달(Gausdal)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집안은 부유했다. 그녀가 20살이 되자 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다. 1886년 3월 4일 그녀는 결혼식을 마치고 곧바로 시르케네스로 여행을 떠난다. 그녀는 이곳에 지역 담당의사로 부임을 한 것이다.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마련된 “태양의 집”(Solheim)에 입주를 하고 신혼주부 겸 의사로서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시르케네스는 너무 가난했다. 당시 주민들 숫자도 겨우 1400명 정도에 불과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그녀가 있기에는 모든 게 부족하고 힘들기만 했다. 그래서 그녀는 의사뿐만 아니라 지역유지로서 주민들 이해를 대변하는 일을 도맡아 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정치가로도 나선다. 노르웨이 국회의원이 되어 국회에서 마을 주민들을 위해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언제나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은 사진기였다. 그녀가 일을 할 때에도 사진기는 언제나 그녀 곁에 함께 있었다. 그녀는 사진기를 가지고 글을 썼고, 사진기로 시를 썼다. 그리고 기사를 쓰면서도 사진을 같이 찍어 삽화처럼 사용했다. 그녀에게 사진은 단순한 기록물이 아니었다. 사진을 통해 그녀는 모든 감정과 느낌들을 기록하고 전달하려 한 것이다.

마르크트광장에 전시중인 엘리시프 베쎌 사진전 안내글

그녀는 그녀가 살고 있는 시르케네스의 모든 주민들과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가난에 찌든 모습을 담아냄으로써 그들과 함께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더욱 사진기로 기록을 남긴 것이다. 하루는 그녀가 시골로 왕진을 떠날 때였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그녀는 남편과 함께 사진기는 물론 삼발이 까지 가지고 갔다. 모든 사진은 그녀가 직접 현상을 했고 사진첩을 만들어 보관을 했다.


그녀는 거의 시르케네스 밖을 나가보지도 못했다. 그녀가 83살의 나이에 숨을 거둘 때까지 그녀의 모든 삶은 시르케네스에 바쳤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녀가 살던 언덕 위 태양의 집은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불타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녀가 그렇게 애정을 갖고 담아낸 사진들을 가지고 만들어둔 사진첩까지 함께 불에 타버리고 만 것이다.


그녀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비단 그녀가 소유했던 양로원이나 병원 등이 아니다. 그녀가 진정 우리에게 물려주려 한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 그것이다. 상류 사회 출신 소녀 한 사람이 시르케네스처럼 가난과 고통에 몸부림치던 마을을 사랑과 애정이 넘치는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 수 있었다는 게 실로 놀랍고 고맙지 않은가.


그녀가 1886년 3월 22일 시르케네스에 온 이래 그녀가 담은 사진들은 이제 시르케네스뿐 아니라 노르웨이 국보급 보물이 되었다. 그녀의 사진은 핀마르크(Finnmark) 자치주의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전하는 그녀만의 독특한 시각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전시회에서 걸어둔 사진들은 모두 그녀가 촬영한 사진들이며, 그녀가 우리에게 선물을 한 것이다. 그녀의 사진들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이 인생이고 어떻게 사는 게 멋진 삶인지를 그녀의 사진들을 통해 알 수 있으니 이 또한 행복한 일이 아닌가.




* 아래 사진들은 베셀의 작품들이며 마르크트 광장에 전시 중인 작품들을 촬영한 것들이다.

* 사진들은 모두 1900년도를 전후한 시기에 촬영한 것들로서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과 치료차 방문한 지역 사람들을 촬영한 것들이다.

* 마지막 사진은 아버지가 일러주던 삶에 대한 교훈을 언제나 가슴에 새긴다는 내용을 사진과 함께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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