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폴란드 2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2.19.-1543.5.24.), 당시 폴란드 지배하에 있는 프러시아의 토른(Thor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크라쿠프의 상인이었고 어머니 역시 크라쿠프에서 장사를 하는 부잣집 딸이었는데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다.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주장한 천문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강조한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을 통해 근대 자연과학이 획기적 전환을 이루게 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그의 주장처럼 발상의 전환을 이야기할 때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말한다.
코페르니쿠스는 18살이 되던 1491년 당시 독일 작센에 속했던 폴란드 남부지방에 있는 도시 크라쿠프 대학에 입학한다. 그가 크라쿠프 대학에서 4년간 학문을 익히는 기간은 그의 사상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가 나중에 제기하는 ‘우주의 형성 원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기본적 이론 틀을 세우는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크라쿠프 대학에서 4년간 수학한 뒤 대학 졸업장도 안 받고 1495년 이탈리아의 볼로냐로 간다. 이번에는 신학과에 입학해 교회법을 공부한다. 그러던 어느 날 1497년 초, 코페르니쿠스는 볼로냐 대학의 도메니초 마리아 다 노바라 천문학교수의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된다. 그 덕분에 노바라 교수의 천문학 관측을 도우면서 천문학적 지식을 넓혀간다
1500년 여름, 코페르니쿠스는 볼로냐 대학에서 4년 동안의 법률 공부를 마치고 로마로 여행을 떠난다. 그러다 일 년이 지나자 1501년 10월, 코페르니쿠스는 파도바 대학의 의학 과정에 등록을 한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행보는 1503년 5월 31일, 볼로냐에서 멀지 않은 페라라 대학에서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러나 그동안 천문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인 코페르니쿠스는 드디어 누구도 의심하지 않던 로마 교황청의 우주관에 정면으로 도전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 지구를 중심으로 한 우주관이 태양을 중심으로 한 우주관으로 그 위치를 바꿈으로써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천명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도전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은 그 위에 사는 존엄한 존재이며 달 위의 천상계는 영원한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중세의 우주관을 폐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당시 코페르니쿠스가 행했던 인간 중심의 지구중심설에서 우주 과학적인 태양중심설로 발상의 전환을 이룬 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부른다. 흔히 대담하고 획기적인 생각을 이르는 말로 쓰이기도 하는데, 그만큼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1542년,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을 출판한다. 이 책에서 그는, 우주와 지구는 모두 원형이며 천체가 원운동을 하는 것처럼 지구도 원운동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616년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만 이 책을 금서목록으로 지정하고 만다.
그러나 조만간 이 책이 천문학과 물리학이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이 됨으로써 새로운 학문적 시각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다행히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체계가 관측 결과와 완전히 부합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후 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계속 수정되고 보완되어 오늘날 천체물리학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우주의 중심에 있던 지구와 달의 위치를 태양과 바꾸고,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오게 하는 일, 참 쉬우면서도 대단한, 그야말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일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변혁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지배적인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의 전체 골격은 그대로 두고 세부만 바꾼 변혁이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천구는 그대로 존재했고, 행성과 지구는 여전히 이 천구들에 고정되어 돌도록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원을 중요시하는 경향을 그대로 고수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가장 자연스러운 운동은 등속 원운동이라고 생각하여 그에 부합하지 않는 관측 데이터에 맞추기 위해 주전원, 이심 등을 그대로 도입하였다. 그런데도 많은 역사가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가 출판된 1542년을 과학혁명이 시작된 시기로 생각한다.
태양중심설은 지구와 그곳에 사는 인간의 우주적 의미를 보잘것없는 차원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정말로 신의 사랑을 독치지 하는 존재인가에 대한 의문을 자아내기에 충분해 보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그래서 서양 중세의 우주관, 인간관, 세계관의 뿌리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이런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패러다임의 전환”을 말한 토마스 쿤 역시 “최초의 근대 천문학자이면서 마지막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자였다”라고 평을 한다.
코페르니쿠스는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태양을 중심으로 한 행성 체계를 설정함으로써 ‘행성들의 관계’를 부여한 것이다. 후에 이런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모델은 케플러가 행성 운행에 대한 세 가지 법칙을 찾아내는데 바탕이 되었으며 갈릴레이, 뉴턴에게 까지 영향을 미친다. 비록 코페르니쿠스가 성직자로 평생을 살았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천문학에 대한 열정을 불사르며 전통적인 우주관을 넘어 지구가 단지 우주에서 하나의 행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힌 위대한 과학자였다. 어쩌면 그가 있어 여전히 지구가 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후 고고학자들은 수 세기 동안 전혀 그의 유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2005년 8월 어느 날, 14세기에 건축된 플라우엔부르크 대성당 재건축을 하던 중 제단 아래를 파고 들어가자 여러 구의 유골을 발견하는데, 그중 어떤 유골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유전자와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된다.
2008년 11월 20일 스웨덴 웁살라 대학의 유전학 전문가 마리 알렌은 기자회견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책에서 나온 두 가닥 머리카락 DNA가 바로 그의 유해로 추정되는 뼈의 DNA와 일치한다'라고 밝힌 것이다. 유해의 보존 상태는 좋지 않았는데, 특히 아래턱 부분은 소실된 상태였지만 뼈의 상태를 조사한 결과 약 70세가량 노인의 것으로 확인되었고 이는 코페르니쿠스가 죽었을 때의 나이와 일치했다.
2010년 5월, 바르샤바에서 그의 장례식이 열린다. 코페르니쿠스가 죽은 지 거의 500여 년만에 그의 조국에서 장례식을 치른 것이다. 폴란드 국민과 고위 성직자들은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기리며, 최고의 예우를 한다.
그런데 문득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행불자로 있었다는 게 여전히 신기하고 궁금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떠오르는 건 왜 일까? 코페르니쿠스를 기리고 추모하는 방식 역시 어쩌면 그가 말한 대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이 필요한 지 모르겠다. 그래서 생각한 건데, 혹시 그의 책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이제껏 금서로 지정해 놓았던 이유와 같은 맥락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