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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Apr 14. 2018

크라쿠프의 나팔소리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폴란드  3


1. 크라쿠프의 탄생 설화


크라쿠프 중심에 자리 잡은 바벨 성과 성 앞을 흐르는 비스와 강 사이에 불을 뿜는 용 동상이 있다. 이 용 동상은 크라쿠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폴란드인들이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0세기를 전후한 시기이다. 그런데 이때 마을에 용이 나타나 마을에 거주하는 처녀를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고 가축들을 잡아먹는다. 이 무서운 용을 처치하지 못하고 주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는데 문득 한 소년이 용감하게 용을 잡겠다고 나선다. 이 소년의 이름은 크라크(Krak), 또는 크라쿠스(Krakus)라고 불렀다.


이 소년은 마을에서 사람들 구두를 고쳐주며 생계를 꾸려가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는데 용을 잡겠다고 나서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소년은 마을 사람들이 미쳐 생각하지 못한 묘수를 생각해 내고 용을 잡으러 간다.


이 소년은 양 한 마리를 가져와 배를 가르고 그 안에 유황을 잔뜩 넣은 후 다시 원래대로 꿰맨다. 그리고는 이 양을 용이 사는 동굴 입구에 몰래 갔다 놓는다. 다음날 이른 아침 먹잇감을 구하러 동굴에서 나온 용은 예상대로 입구에 놓인 양을 보자 단번에 잡아먹어 치운다. 유황을 채운 양을 먹은 용은 그만 뱃속에서 열불이 나 어쩔 줄을 모르고 강으로 달려가 강물을 먹어보지만 결국 실패하고 배가 터져 죽고 만다. 


이 소년의 기지로 용을 물리친 마을 사람들은 기쁨에 들떠 축제를 벌리고 소년의 기지를 축하한다. 이 소년은 영웅이 되고 드디어 공주와 결혼을 하게 되어 왕국을 물려받는 경사까지 벌어진다. 마을 사람들은 용이 살던 동굴 위에 바벨성을 세우고 이 마을 이름을 소년의 이름을 따서 크라쿠프(Krakow)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비스와강변에 있는 바벨성
바벨성 아래 비스와 강변에 있는 바벨용 동상



크라쿠프 탄생설화의 주인공 ‘바벨용’(Wawel Dragon)은 오늘날에는 크라쿠프 도시를 지키는 수호천사처럼 크라쿠프의 가장 의미 있는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다. 어찌 보면 많이 듣던 이야기일지 모르는데, 사실 이 용에 관한 전설은 기독교 전파과정에서 언제나 주요한 이야기 소재로 등장한다. 즉, 기독교 전파과정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전해지는 이야기 중 하나라는 말이다. 물론 용에 관한 전설이 지역에 따라 조금씩 그 내용이 달라지지만 용을 잡은 기사는 대개 신화의 주인공으로 자리를 잡고 그 지역의 군주로 변신을 하기도 한다. 그래야 영웅이 지배하는 강한 나라의 이미지를 지닐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용을 잡는 주인공은 때로는 공주와 결혼을 해서 왕이 되거나 가톨릭 신화의 주인공처럼 가톨릭 성인으로까지 자리를 잡는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스웨덴 스톡홀름 거리와 성당에 세워놓은 성 조지와 용(St. George and the Dragon)의 동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성 조지는 라틴어로 게오르기우스(Georgius, ? - 303년)인데, 그는 초기 가톨릭 순교자이자 14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제오르지오 혹은 조지라고도 한다. 기사 게오르기우스가 용과 싸우는 모습은 중세 때 유럽에 ‘황금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무서운 용 한 마리가 리비아의 작은 나라 실렌(Silene)에 나타나 매일 인간을 제물로 요구했다고 한다. 실렌의 왕은 매일 젊은이들을 산 제물로 용에게 바쳤지만 왕의 외동딸까지 바쳐야 할 지경에 이른다. 이때 카파도키아에서 온 젊은 기사 게오르기우스가 말을 타고 달려와 긴 창으로 일격에 용을 찔러 무찌른다. 게오르기우스의 활약을 본 실렌 사람들은 그가 말하는 대로 기독교(가톨릭)로 개종을 한다. 그러나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로 조지 기사는 후에 체포되어 참수된다.(* 이때는 아직 로마가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던 시기였다.) 그 후 그는 가톨릭 성인으로 추대된다.(*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 역시 용의 전설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벨성은 현재 폴랜드 왕가와 유명인들을 모신 장소로 사용하고, 각종 문화행사를 개최하는 장소로도 이용하고 있다. 비스와강변 의 바벨성 건너에 신시가지가 보인다.



2. 크라쿠프의 나팔수


크라쿠프는 1038년부터 1596년까지 폴란드 수도였다. 폴란드 역사의 산실인 셈이다. 화려한 도시의 역사는 16세기 스웨덴의 침입과 수차례 발생한 역병으로 피해를 입게 되자 1596년 지그문트 3세가 바르샤바로 수도를 옮긴다. 바르샤바로 수도를 옮기게 되면서 크라쿠프는 고도로 남는다. 그러나 크라쿠프는 여전히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독일과 소련 등 주변의 강대국들의 침공으로 수많은 외침과 혼란을 겪으며 오늘에 이른다. 심지어 2차 대전 때는 도시의 남쪽 지역 카지미에시에 거주하던 유대인들 대부분이 학살을 당하기도 한다. 


1880년까지 크라쿠프 남쪽 유대인이 살던 카지미에시 지구는 다른 도시들에서 볼 수 있듯이 유대인 지역으로 자리를 잡고 독특한 문화가 발달해 있었다. 크라쿠프의 카지미에시 역시 유대인들로 인해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곳에 살던 64,000명가량의 유대인들은 모두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강제 이송되어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고 전쟁이 끝나자 겨우 6,000명만 돌아왔다고 한다.

유대인 공동묘지

폴란드는 1945년 1월 9일이 되어서야 소련이 폴란드를 해방시킨다. 그러나 이 역시 크라쿠프의 자주권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여전히 새로운 제국주의의 깃발 아래 놓였기 때문이다. 바로 소련 공산당 휘하에 폴란드 정권이 유지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1990년도에 이르러서야 유럽을 휩쓴 개방화 물결에 힘입어 뒤늦은 독립을 이루게 된다. 어찌 보면 신생 독립국가라고 해야겠지만 그 역사적 자태를 보면 분명 유럽 다른 나라들처럼 꽤나 오래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국가임에 틀림없다. 오래된 술이 맛있듯 오래된 국가의 문화 역시 아주 멋진 면모들을 보여준다. 


크라쿠프는 유럽 문화의 중심지이자 예술의 도시로 군림했던 곳이다. 과거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손상되지 않아 다양한 시대의 고전 건축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게다가 이 도시는 1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 거의 새로 지은 건물이 없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유네스코는 1978년 도시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다.


크라쿠프 구시가지에는 야기에오 대학이 있는데 바로 이곳에서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가 수학을 했다. 또 2005년에 타계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이 대학에서 수학했고 졸업 후에는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야기에오 대학은 세계에서 2번째로 오래된 대학으로 전신은 크라쿠프 대학 아카데미였다고 한다.


이런 역사뿐 아니라 크라쿠프에는 정말 이야깃거리가 많다. 크라쿠프의 건국신화인 용의 전설은 물론 여신이 지배하는 나라답게 크라쿠프 인근에 있는 비엘리츠카 소금광산의 킹가 공주 이야기 등 이야깃거리가 적지 않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꼭 기억해야 할 이야기는 바로 크라쿠프 광장에 우뚝 서있는 성모 승천 교회의 나팔수 이야기이다.


1241년 4월 9일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가 이끄는 몽고군이 폴란드 남서부 바르슈타트 평원에서 폴란드와 독일 기사단 연합군을 물리친다. 유럽 사람들은 몽고군을 타타르인이라고 불렀는데 타타르 군이 드디어 코라쿠프 도시로 쳐들어온 것이다. 이때 성모 마리아 성당 꼭대기에서 망을 보던 나팔수가 몽고군의 습격을 알리는 나팔을 불다 몽고군이 쏜 화살을 맞고 죽고 만다.


크라쿠프를 상징하는 나팔소리는 800년이 지난 지금도 정오에 나팔을 불고(헤이나우/ Heinau) 그 소리를 라디오에서 생중계한다. 더군다나 나팔수가 적의 화살을 맞고 나팔을 불던 것을 멈춘 그 부분까지만 연주를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며 지난 시기를 기억하려는 폴란드 사람들의 치열한 회한이 가슴 뭉클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성모 승천 교회와 삼단 펼침막, 성당 꼭대기 전망대에서 지금도 매일 정오에 나팔(헤이나우)을 분다.



3. 크라쿠프의 상처들


크라쿠프 옛시가지를 들어가려면 바르비칸성 입구 플로리안 게이트를 지나야 한다. 바르비칸 성은 중세시대에 설치된 3Km에 이르는 성벽에 8개의 성문을 설치했다. 지금은 유일하게 플로리안 게이트 하나만 남아있는데 이곳을 통과해 시내로 들어간다. 거리 이름 역시 성문 이름을 본떠 플로리안스카, 크라쿠프에서 가장 활기찬 곳이다. 이 거리를 걷다 보면 여행자들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지금 내가 중세의 거리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건가라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플로리안게이트, 저곳을 지나 구시가지로 들어온다.

그런데 성안으로 들어가는 성문 근처를 지나는 순간 어디선가 문득 쇼팽의 폴로네이즈가 들린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잠시 뒷걸음질을 쳤더니 음악이 멈추고, 그러기를 몇 차례 하다 보니, 아 바로 내 앞에 놓여있는 피아노 작품(?)에서 소리가 나오는 거였다. 전시 작품에 센서장치가 달려있어 사람이 다가가면 음악이 나오고 멀어지면 음악이 안 나오는 거였다. 


거리에 작품으로 설치된 부서진(?) 피아노 작품은 ‘The Fallen Piano’라는 제목으로 폴란드의 알렉산더 야니클(Alexsander Janickl)이 제작한 것이다. 작품 이름을 우리말로 그냥 ‘작살난 피아노가 들려주는 행복한 선율’이라고 하면 어땠을까? 

피아노 설치작품

폴란드 어느 곳을 가던 쇼팽을 길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는 게 참 좋다. 거리에서 그렇게 쇼팽을 만나는 순간 문득 행복, 즐거움, 이런 단어가 자연스레 떠오르니 말이다. 참 기발한 작품으로 쇼팽과 만나게 해주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아무튼, 성안으로 들어서니 넓은 광장이 나온다. 바로 중앙시장 광장이다. 가로 세로 각 200m씩 되는 규모를 가지고 있다. 13세기에 조성된 중앙시장광장은 당시 그 규모가 유럽 어느 광장보다 컸고 번화했을 것이다. 북쪽의 발트해와 서쪽의 독일, 그리고 남쪽의 동로마 후예들이 크라쿠프 인근의 바엘리츠카에서 나오는 소금을 얻으러 이곳으로 몰려들었을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아무튼 중앙시장광장 한가운데 있는 직물 회관 건물 역시 당시의 실크로드 역할을 반영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수키엔니체(Sukiennice)라 부르는 직물 회관(The Cloth Hall)은 14세기에 세워진다. 그런데 이 건물은 화재가 나자 길이 100m, 양쪽이 대칭인 지금의 건물을 1555년도에 다시 세운다. 아마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쇼핑몰이라고 해도 될 듯싶다. 섬유나 의복을 사고팔던 곳이라 직물 회관이란 이름이 붙었다. 현재 2, 3층은 박물관 등으로 사용하고 1층은 선물가게가 대부분이다. 


크라쿠프 중앙광장
구시청사와 직물회관 모습  
중앙광장 주변에 주요 건축물들이 모두 몰려 있다.



광장 한쪽에는 구시청 탑이 서있다. 이 건물은 예전에 불탄 것을 복원해 지금은 시청 건물의 일부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박물관으로 사용한다.(* 여름에만 문을 연다고 하니 방문하려는 사람들은 시기 조절을 잘 해야 할 것이다.) 광장 주변에는 적지 않은 역사의 유물들이 즐비하다. 광장에서 폴란드의 중요한 건축물들을 모두 볼 수 있다는 건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른다. 


제일 눈에 띄는 건물 역시 뾰족한 첨탑을 가지고 있는 성모 승천 교회(St. Mary’s Basilica)이다. 이 성당은 13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타타르족의 침입으로  무너지게 된다. 그 후 한 세기가 지나 다시 고딕 양식으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당 내부 중앙에는 3단 펼침막으로 장식한 제단이 있는데 유럽에서 가장 큰 목조 제단이다. 이 제단 양쪽에 달린 날개는 열고 닫을 수 있게 만들었다. 삼단 막에 있는 그림은 성모 마리아 탄생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기 까지를 그린 것이다. 성모승천을 그린 그림은 그다지 많지 않은데 이곳 성모 마리아 승천도는 그림이 아니라 일일이 조각으로 제작을 한 것이기에 더 특별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듯싶다. 


이 제단은 1477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온 조각가 바이트 스토스( Veit Stoss)가 제작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삼단 막은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의 욕심 때문에 베를린으로 납치(?)되었다가 종전이 되자 다행히 되돌려 받았다고 한다.


크라쿠프는 어쩌면 독일군의 만행이 가장 심각했던 곳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건 어쩌면 폴란드인들의 끈질긴 인간적인 면모와 지적인 인간상을 시기하던 주변국들 모두 마찬가지였다는 점에서 쉽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광장 중심에 있는 직물 회관(The Cloth Hall) 수키엔니체(Sukiennice) 바로 앞에 동상이 하나 우뚝 자리를 잡고 있다. 폴란드 민족시인 미츠키에비치(Adam Mickiewicz) 동상이다. 그는 러시아 식민지 시절 독립운동을 하면서 민족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독일군이 폴란드를 점령하자 그는 폴란드를 떠나 유랑생활을 한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끝내 파리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폴란드 정부는 전쟁이 끝나고 그의 시신을 이곳으로 모셔와 바벨성에 안치하고 그를 기리는 동상을 그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1898년 6월 26-27일에 광장 한가운데에 세운다.


폴란드 민족시인 미츠키에비치 동상
독일군의 미츠키에비치 동상 해체 작업 모습과 복원된 동상



그러나 이 동상은 또다시 불행을 겪게 된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8월 17일, 도시를 점령한 나치는 이 기념비를 파괴한다. 더구나 독일군은 동상을 해체해 고철로 만들어 독일로 가져가 버린다. 그 후 종전이 되자 독일 함부르크 폐차장에서 고철더미로 남아있던 것을 찾아내고, 가져와 다시 동상을 재건한다. 그리고 그의 죽음 100주년이 되는 해에 이 동상을 다시 세운다. 재건축된 동상은 1955년 11월 26일 시인이 죽은 후 100주년이 되는 기념일에 열렸다.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폴란드 낭만주의 민족시인 아담 미키에비츠는 그의 생애만큼이나 죽어서도 수난을 당했다.


광장 또 다른 쪽에는 성 보이치아 교회(아달베르트 교회라고도 부름)도 보인다. 10세기경 지은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인데 순교자 보이에비치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광장 한쪽에는 누워있는 얼굴 조각상도 있다. 폴란드 출신 이고르 미토라이(Igor Mitoraj)가 제작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바르텍 오코(Bartek Oko/ 바르텍의 문)란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폴란드의 민주화운동을 상징한다고 한다.


폴란드는 오랜 시간 외세에 억눌려 지내다 보니 슬픈 이야기가 많다. ‘카틴 숲의 학살’로 알려진 이야기도 그중 하나이다. 1939년 9월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은 동시에 경쟁하듯 폴란드를 장악하기 위해 침공을 감행한다. 양쪽에서 침공을 당한 폴란드는 많은 전쟁포로가 발생했고 모두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죽음을 맞는다.


그런데 그 후 1940년 4월 13일 독일군이 러시아의 스몰렌스크 근교에 있는 카틴 근처의 숲에서 소련 비밀경찰(NKVD)이 학살하고 암매장한 4,000여 구의 시신을 발견한다. 독일 정부는 조사를 통해 총 2만 2천 명 이상의 폴란드군 장교, 경찰관, 공무원, 지역유지 등의 매장된 시체를 발굴한다. 그러나 소련은 독일군의 만행이라고 우겼는데, 독일 측 조사로 소련 측이 행한 학살임이 입증된다. 당시 카틴 사건의 주동자인 스탈린은 "폴란드가 독립국으로 일어설 수 없도록 폴란드 엘리트들 씨를 말릴 것"을 명령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크라쿠프 중앙역 부근에 그룬발트 전투 기념비가 있다. 1410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연합군이 폴란드 북부 그룬발트에서 독일 튜턴 기사단을 맞아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탑이다. 기념비는 1910년 세워졌는데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일 먼저 이 기념비를 폭파해 버린다. 그 후 40여 년이 지난 1976년 폴란드 정부는 이 기념비를 다시 복원한다.


그룬발트 전투 승리 기념탑



이 기념비의 주인공은, 당시 전투를 직접 참전한 폴란드 왕 야기엘론스키(Jagiellonski)가 말을 타고 있고 리투아니아 왕자가 그 앞에 서있다. 그리고 그의 발치에는 독일 기사단 수장이 비참하게 쓰러져 있다. 그러니 나치 독일군 자존심이 상했을 만도 했겠다.


아무튼, 이처럼 당시 소련과 독일을 비롯한 전체주의 국가들이 유럽에서 가장 문명화된 폴란드의 엘리트들을 미워했다. 그러고 보니 폴란드에는 유독 유명한 예술가나 과학자들이 많다. 퀴리부인, 쇼팽, 그리고 노벨 평화상과 문학상을 받은 적지 않은 유명 작가들까지 포함하면 정말 많은 인재들이 있는 나라라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크라쿠프에는 오스카 쉰들러의 공장도 있다.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로도 잘 알려진 오스카 쉰들러 공장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로 알려지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크라쿠프와 폴란드 거주 유태인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박물관인 셈이다. 


쉰들러 공장은 2차 대전 당시 쉰들러가 살려낸 1000명의 유대인들, 바로 그들을 쉰들러가 위장취업(?)을 시켰기에 살아날 수 있었던 곳이다. 그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유대인 거주지역을 숨 가쁘게 오가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그는 영화의 무대가 된 크라쿠프의 카지미에시 지역을 방문하고 수많은 유대인을 하늘나라로 보낸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찾아다니며 무수한 회한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크라쿠프는 지난 시간을 그저 조용히 기념하는 역사의 도시가 아니다. 역사의 성격과 정신을 하루하루 되새기며 살아가는 격정의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라쿠프 광장을 거닐다 보면 밤이 깊어지는 줄도 모를 정도이다. 너무 많은 상처와 감동이 곳곳에 배어있어 추스르기 힘들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역시 밤이 낮보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슬픈 역사는 오히려 어두울 때 더 그 빛을 빌하는지도 모르겠다. 크라쿠프의 거리는 그래서 여전히 밤이 아름답다.

1498년 지어진 바비칸(Barbican): 요새화 된 전초 기지 세 곳 중 하나인데 현재는 전시회 등을 하는 관광 명소이다.
직물회관 야경
크라쿠프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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