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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May 05. 2018

아우슈비츠의 야상곡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폴란드  4


1. 피아니스트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다고 신의 뜻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그런 일이 종종 벌어진다. 그건 바로 인간말종들이 벌이는 죽음의 잔치.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Arbeit macht frei!) 오직 노동만을 강요하는 인간말종. 인간이라는 의식은 접어두고, 그 어떤 것도 생각 말고, 불평불만이 있으면 자동으로 해고, 오직 일만 해라, 일만. 그래서 오늘도 죽음의 수용소는 번창하게 된다.


2차 대전이 끝난 지 70여 년, 아직도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곳, 폴란드 남쪽 도시 크라쿠프, 도시의 한 귀퉁이에는 여전히 유대인의 혈흔이 살아 숨 쉬는 카지미에시 지구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그야말로 죽음의 잔치를 벌이던 곳. 그래서 이곳에서 영화 ‘피아니스트’를 제작한다.


영화 피아니스트는 이렇게 시작한다. 1939년 폴란드 바르샤바의 라디오 방송국 음악홀, 유명한 유태계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은 한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쇼팽의 야상곡(20번)을 연주한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의 불길이 한창 타오른 바로 그때 스필만이 연주하던 라디오 방송국이 폭격을 당한다.

피아니스트 영화포스터

유태인 강제 거주지역인 게토에서 생활하던 스필만과 가족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치에게 쫓겨 죽음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게 된다. 그러나 스필만은 사람들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한다. 스필만은 나치들 눈을 피해 숨어 지낸다.
 
그런데 스필만이 폐건물 속에서 은신 생활을 하던 중 우연찮게 순찰을 돌던 독일군 장교에게 발각되고 만다. 독일군 장교는 스필만에게 먹을 것을 주고 그가 피아니스트임을 알자 그에게 연주를 하라고 명령한다. 어쩌면 지상에서의 마지막 연주가 될지도 모르는 그 순간 스필만은 연주를 시작한다. 스필만이 연주하는 쇼팽의 야상곡을 듣는 순간 전쟁은 어느새 잊게 되고 잠시 쇼팽의 멜로디에 빠져들게 된다.
 
이 영화는 실존 인물인 스필만의 이야기인 동시에 폴란드 출신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자전적 체험이 반영된 영화이기도 하다. 폴란스키는 어린 시절 유태인 어머니가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고 혼자 살아남는 불행을 겪었다. 모두가 전쟁의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다.
 
스필만은 2000년 7월 6일 8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바르샤바'에서 계속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피아니스트’ 영화 속 인물, 독일군 장교의 이름은 빌름 호젠펠트(‘Wilm Hosenfeld)였는데 후에 밝혀진 바로는 전쟁포로가 되어 소비에트 포로수용소에서 1952년에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 Pianist OST : Chopin Nocturne C sharp minor(Arjen Seinen) https://youtu.be/aS4YDuTfJ7Y



2. 쉰들러 리스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들 중 가장 인상에 남는 영화가 하나 더 있다. 1993년작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 이 영화는 2차 대전 당시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어 많은 감동을 주었는데 아카데미 영화상 전 부문을 휩쓸다시피 한 영화로도 유명하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이 작품으로 1993년 제6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등 7개 부문에서 수상한다.


오스카 쉰들러, 그는 영화 속 주인공이자 실제 인물이다. 1939년 9월 독일군이 폴란드를 점령하자 오스카 쉰들러는 폴란드의 크라쿠프로 이주해 온다. 기회주의자에 호색한인 쉰들러는 전쟁 중 나치와 결탁해 임금을 줄 필요가 없는 유대인을 공장의 인력으로 이용한다. 이때 그가 만난 유태인 회계사 아이작 스턴은 쉰들러의 내면에 숨어 있던 양심을 일깨워준다.


그 덕분에 쉰들러는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그들을 강제수용소에서 구해내기로 결심한다. 수용소 장교에게 뇌물을 주고 유태인들을 자신의 고향인 체코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구출할 유태인 명단을 작성한다. 결국 그는 자기가 모은 전재산을 모두 쓰고서 아우슈비츠로 가야 할 운명에 처한 1098명의 목숨을 구한다. 종전이 되자 생명을 구한 유태인들은 그들의 금이빨을 뽑아 ‘한 생명을 구한 자는 전 세계를 구한 것이다’라는 탈무드의 글귀가 새겨진 반지를 쉰들러에게 선물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노동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라는 문구가 자꾸만 눈을 어지럽힌다. “Arbeit macht frei!” 이 말은 원래 19세기부터 독일에 전해오는 말로 노동의 가치를 대변하고 있는데, 로렌츠 디펜바흐(Lorenz Diefenbach)가 1873년 ‘Arbeit macht frei’라는 제목으로 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 후 이 문구는 스위스, 프랑스 등을 포함해 거의 전 유럽에 퍼져 나갔는데 특히 1920년대의 바이마르 공화국에 이르러 대중 동원을 위한 선전문구로 사용되기에 이른다. 그 후 1937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SS친위대는 유태인을 학살하고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슬로건으로 또다시 ‘Arbeit macht frei’라는 문구를 내걸게 된다. 수없이 많은 유태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문구 ‘Arbeit macht frei!’


현재 이 문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 정문에 그대로 걸려 있다. 이곳에 들어서면 죽음의 그림자가 깊게 새겨져 있어 전율을 느끼게 된다. 독일식 이름은 아우슈비츠(Auschwitz), 폴란드식으로는 오시비엥침(Oświęcim)이다. 크라쿠프에서 80Km 서쪽에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식 명칭은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국립박물관이다. 오시비엥침 이외에 인근 도시에도 수용소가 있었는데 각기 비르케나우(Birkenau), 모노비츠(Monowitz)라고 불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홈페이지 참고: http://auschwitz.org/en/)


오시비엥침 수용소를 세운 건 1939년이다. 당시 이곳에는 처음부터 유태인을 수용하지는 않았는데 1942년부터 유대인을 끌고 와 이곳에 수용하고 처형하기 시작했다. 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초 소련군이 이곳에 제일 먼저 도착해 수용소 문을 열고 유태인들을 해방시킨다. 그 후 1947년 폴란드 정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박물관으로 개조할 것을 결정한다. 그리고 1979년 이곳은 홀로코스트의 상징적 공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40년 4월 27일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은 비밀리에 이곳에 거대한 수용소를 건설한다. 그해 6월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확장되어 3개의 파트(아우슈비츠 1호, 아우슈비츠 2호-비르케나우, 그리고 아우슈비츠 3호-모노위츠)로 나뉘게 된다. 폴란드 크라쿠프는 유럽의 교통 요충지로 유럽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독일군은 교통의 편리함을 들어 아우슈비츠 감옥을 이곳에 짓는다. 그 후 독일군은 유럽 전역에서 유태인과 각종 범죄자들을 이곳으로 이송해 처벌을 한다.


그러나 독일군이 전쟁에서 패하자 3호 모노위츠 수용소를 황급히 폐쇄하고 도주한다. 하지만 바르케나우 2호 수용소는 일부만 폐쇄하고 관람이 가능한 지역은 여전히 남아있다.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으로 치장한 수용소, 이곳을 빠져나가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이 되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수용소 건물 밖은 온통 가시철망과 고압전류만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곳은 인간의 야만을 저장하고 은닉한 곳일지도 모른다. 죽음의 흔적뿐 아니라 인간의 무지와 야만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수용소 안을 유심히 살펴보면 기차가 한 칸 서있는 것이 보인다. 유태인들이 기차를 타고 이곳으로 이송될 때 사용했던 것이다. 가슴에 육각형 별을 단 사람들이 마치 소풍을 가듯 함께 왔을 것이고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어른들을 따라나섰을 것이다.


수용소 안에는 남녀가 함께 사용하던 화장실도 있다. 그런데 휴지조각은커녕 물 한 방울 구경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그 안에서 어찌 지냈을 것인가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더구나 대부분 아녀자들과 어린아이들은 거의 들어오자마자 소위 '샤워실'(독가스실)로 직행을 하고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전시실에는 유태인 학살에 사용된 수많은 독 가스통들이 보인다. 작은 흰돌 조각들은 '사이클론 B'라는 독가스의 원료인데 한 줌만 있으면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는 독가스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전시실에는, 여자들 머리카락으로 직조한 천조각과 그 원재료인 여자 머리카락들이 보인다. 머리카락은 1Kg에 50 페니히(당시 250원 정도)였다고 하는데 모직 원료로 제공되었다고 한다. 누군가의 의복으로 사람의 천연모가 사용되었다는 말이다. 이외에도 유태인들이 사용하던 의족과 신발들, 그리고 이름이 적힌 가방과 인형, 안경들도 전시되어 있다.


잠시후 전시실을 지나 독가스실로 들어선다. 이곳에 누군가 꽃다발을 갖다 놓았다. 이곳에서 한 번에 2백여 명씩 '샤워'를 시켰다고 한다. 그리 크지도 않은 가스실에서 죽음의 샤워를 마친 시체들은 바로 옆 소각장으로 옮겨 소각을 한다. 유태인은 지구 상에서 사라져야 할 종족이라는 망언과 함께 사라진 그들, 이제 그들은 영정으로 남았다.


수용소 건물 밖은 온통 가시철망과 고압전류가 건물을 감싸고 있다. 감시탑에서는 나치의 눈동자가 감시의 눈 화살을 겨누고 있기에 그들의 눈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소각장에서 연기로 사라지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지하 감방도 나치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더구나 어두운 지하에는 전등조차 없었다. 그뿐인가? 남녀가 함께 사용하던 화장실에는 인간의 수치심은 아랑곳없었고 물 한 방울 안 나오는 건 뭐라 말할 수도 없다. 더구나 생리대는커녕 종이조각 하나 없이 닭장 같은 곳에서 죽음의 차례를 기다리기만 했을 뿐이다.


여자아이들이 사용하던 수용소 내부를 보면 눈물은커녕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생리 중인 아이들은 나무 침상처럼 만들어 놓은 곳에서 그곳에 널브러져 있는 지푸라기를 이용할 뿐 다른 방도가 없었다고 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굴뚝과 건물들은 더욱 음산하고 을씨년스럽게만 보인다.


아우슈비츠 1호 수용소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비르케나우 수용소,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처음에는 폴란드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용도로 이용했다고 한다. 그 후에는 소련의 전쟁포로들과 로마의 집시, 그리고 다른 소수 민족 죄수들이 이곳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2년부터는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유태인 인종 청소를 아우슈비츠에서 시작한다.


기차를 타고 저 '죽음의 문'을 들어서면 서서히 기차는 철길에 멈춰 서고, 잠시 후 기차에서 내려 철길을 걷는 사람들, 그리고 죽음의 샤워실로 향하는 사람들. 엄마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어린아이들.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산 자와 죽은 자가 갈라 서게 된다.




그렇게 영화는, 아니 실제 죽음의 행렬이 이어졌다. 비르케나우 수용소에는 당시 300개 이상의 막사와 독가스실이 있었다고 한다. 이제는 단지 관광지가 되어버렸지만, 누군가 꽃다발을 가져다 놓은 것을 보고 있으려니 눈물과 한숨만 나온다. 인간말종이 내뿜는 거친 숨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듯도 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나치는 그들의 범죄 행위를 감추기 위해 가스실과 화장터를 비롯한 건물들을 부수고 자료들을 소각시켰다. 특히 비르케나우 수용소를 둘러보면 독가스실이 있던 곳을 파괴하고 남은 흔적들을 볼 수 있다. 쉰들러 리스트 영화 속에서 여자죄수들이 벌거벗고 줄지어 독가스실로 가던 바로 그 장면의 장소들이다.


또한 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 기차를 하나 볼 수 있다. 마지막 기차라는 별명이 붙은 기차인데 이 열차는 사람을 태우기 위한 게 아니라, 실은 독가스의 원료인 사이클론을 실어 나르던 기차였다. 이와 함께 전시실에는 나치 수용소 통행증도 있다. 이 통행증은 1943년 7월 30일에 발행한 것인데, 다름 아닌 ‘사이클론’을 가지러, 즉 유태인을 죽일 독가스 원료를 수송하기 위한 열차 운행 허가증이었던 것이다.


죽음의 문, 그리고 죽음의 행렬, 누군가는 "참혹한 기억은 빨리 잊는 게 낫지 않으냐”고 한다. 그러나 이 음산한 풍경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할 줄 아는 자만이 인간 존엄의 의미를 알 수 있지 않을까?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구호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역설적 진리이다. 그러니 어쩌면 아우슈비츠는 우리 안에 내재하는 야만의 뿌리, 또는 쉰들러 리스트 같은 존엄의 실타래를 끄집어낼 수 있는 희망의 장소일 수 있을 것이다.


아우슈비츠는 이러면에서 인간의 잔악함과 야만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극단의 충격적 토템이다. 그래서 1947년 7월 2일, 폴란드 의회는 잔존하는 아우슈비츠 1호와 아우슈비츠 2호-비르케나우 수용소를 박물관으로 건립한다. 그리고 유네스코는 '아우슈비츠'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한다.


* Schindler's List Soundtrack : https://youtu.be/-c0gLBZ4C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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