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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Dec 11. 2018

바이킹 시대는 왜 막을 내리게 되었나?

1. 바이킹 시대가 막을 내리다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박해는 네로 황제 시절부터 시작되었는데, 2~3세기에 이르게 되면 전국적인 기독교 박해가 여러 번 발생한다. 그러나 4세기경에 이르면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존의 종교들로는 로마제국을 하나로 통합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황제의 권위를 강화시키는데 기독교가 적합하다는 판단을 한다. 그래서 서기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고 기독교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이후 가톨릭은 로마제국 내에 급속도로 퍼져나가 이단 논쟁에도 불구하고 테오도시우스 1세는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다. 이로써 다신교적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종교관, 세계관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그 자리에 기독교가 유일신으로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게 되면서 북유럽을 기반으로 한 바이킹 시대가 서서히 도래하기 시작한다. 서기 515년, 드디어 덴마크 왕은 서유럽을 침공한다. 그 후 9세기에 이르러 바이킹은 서유럽 전역을 강타한다. 이제부터 바이킹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바이킹은 자기들 시대가 끝날 때까지 해외에 그들이 다스리는 여러 개의 새로운 국가를 세우지만 그들은 외국인으로서, 즉 북유럽 출신 바이킹으로서 남아 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많은 바이킹 전사들이 결국 자기들이 새로 발견한 사회와 문화에 동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이 믿고 따르던 종교도 그랬다. 바이킹의 상징처럼 그들은 오딘(Odin)을 절대자로 믿고 따랐다. 그들이 따르던 종교를 토속종교인 파간(pagan)이라 하는데 새로운 정착지를 얻게 되면 오딘을 떠나 새로운 종교, 즉 현지인들 대부분이 믿는 종교로 개종을 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북쪽 해안에 위치한 노르망디를 점령한 바이킹 수장 롤로는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그리고 그의 후손인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2세(William II, 1028~1087) 역시 1066년 영국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영국 왕 윌리엄 1세로 즉위하자 곧바로 바이킹과의 관련성을 철저히 차단한다.  어쩌면 그들은 노련한 실용주의자라고 해도 될 듯싶다.   


더욱이 윌리엄은 북유럽 바이킹의 영향이 더 이상 영국에 미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고 중세 프랑스식 정치 체제와 토지 소유권제, 경제 정책 등을 사용해 새로운 봉건 시대를 연다. 따라서 “바이킹 시대가 막을 내린 어느 한 연대를 골라야 한다면 그 시기는 틀림없이 1066년”이라고, 엘세 뢰스달은 그가 쓴 「바이킹」이라는 책에서 말한다. 1066년, 노르웨이 하랄 하르드라다 왕이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죽음을 맞고, 동시에 노르망디 출신 윌리엄 공작이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영국 왕으로 즉위하는 1066년에 이르게 되면 더 이상 바이킹 이름으로 진행된 사례가 없기 때문에 사실상 바이킹 시대는 이 시기에 막을 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066년에 벌어진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그림: Peter Arbo, 1870)와 헤이스팅스 전투(1066) 전개도(우)
1066년 9월25일 하랄 하르드라다(좌)는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죽고, 윌리엄 공작(우)은 10월14일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하고 12월25일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한다.


3세기에 걸친 바이킹 역사는 그야말로 역동적이다. 하지만 단순히 칼과 도끼를 휘두르며 약탈을 일삼는 야만인이 바이킹의 모습 전부는 아니었다. 그들은 탐험심과 융통성을 발휘하여 멀리 떨어진 해외 여러 곳에 식민지를 개척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 지역의 사회와 문화에 동화되면서 왕조를 세우고 정착해 통치를 하기도 했다. 이처럼 바이킹은 배와 칼을 다루는 면에서 뿐 아니라 농사를 짓고 정치를 하는 면에서도 참으로 변신의 귀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북유럽 주민들은 바이킹 시대에 언제나 토속종교인 파간(pagan)의 신자로서 오딘(Odin)의 신하들이었다. 무지몽매한 야수 같은 힘은 바로 토르(Thor)에게서 물려받았고 오딘이 거주하는 발할라(valhalla)를 동경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기도 했다. 따라서 바이킹 사회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종교와의 관계에서 볼 수 있다. 즉 북유럽 출신 전사들이 중심이 된 바이킹들에게 전통신앙인 파간은 절대적인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이킹 시대가 진행되면서 점차 기독교(가톨릭)가 파간의 위상을 대신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바이킹 사회를 지향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바이킹 시대의 마감이라는 또 다른 현실로 막을 내리게 된다.   

   

바이킹 시대에 바이킹 전사들을 이끌던 수장들은 단순한 지도자가 아니라 대부분 지역을 통치하던 영주였는데 점차 왕이라는 신분으로 부상하면서 절대군주로서 위용을 갖추기 위해 새로운 종교, 즉 가톨릭으로 개종(몇백 년 후에는 개신교로 개종)을 하고 주민들에게도 가톨릭으로 개종을 강요한다. 이런 상황은 결국 대부분의 북유럽 지역에서 공통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고, 북유럽 사회 전체가 기독교(가톨릭)라는 종교를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과정으로 전환하게 된다. 특히 북유럽 국가들 모두가 위로부터의 종교 개종을 강제로 시행하면서 한 세기가 지나는 시점에 이르게 되자 결국 북유럽 사회 전체가 가톨릭으로 개종을 달성하게 된다. 더 이상 토속종교인 파간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제 바이킹 흔적은 바이킹 시대가 끝날 무렵 기독교 세력권 속에서 그 자취가 거의 사라지게 된다. 정말 특이하고 놀라운 현상이다. “기독교라는 종교와 바이킹 시대와의 관련성, 인간의 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관계를 따져보는 그저 좋은 사례”의 하나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희생과 역사적 시간이 길었던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다.          



2. 바이킹 해외 원정 연보     


1) 789년 바이킹 시대 개막

바이킹 시대의 개막 시기가 언제인가를 규명하는 것은 여전히 논쟁이 분분하다. 따라서 북유럽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해석을 필요로 한다. 이와 더불어 바이킹에 대한 의미와 그들이 미친 영향 등에 대해 지속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789년 웨섹스(Wessex)에서 덴마크 배 세 척이 영국을 침공한 후 793년 노르웨이 바이킹이 계속해서 노섬브리아(Northumbria)에 있는 린디스판(Lindisfarne) 수도원을 침공한다. 이후 바이킹 활동은 3세기 동안 그 활동 규모와 범주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8세기 말 북유럽 국가들 지배지역


2) 878년 바이킹 잉글랜드 정복

바이킹은 869년 잉글랜드 동부 앙글리아(East Anglia)와 873년에 남쪽 머시야(Mercia)까지 점령을 한다. 그리고 878년 잉글랜드 정복을 마친 바이킹은 그 후 스코틀랜드 북부에 있는 오크니 제도와 셔틀랜드 제도, 그리고 아일랜드의 더블린 지역까지 정복을 한다. 그 후 계속해서 페로 제도와 아이슬란드에 최초로 정착촌을 세운다. 동쪽에서는 스웨덴 출신 바이킹(바랑기안: Varangians)이 지금의 우크라이나 키예프 지방까지 들어가 키예프 루스 제국(러시아 제국)을 설립하고 러시아 내륙 강을 따라 자리한 주요 무역항 도시들을 지배한다.     


9세기 말 북유럽국가들 지배지역


3) 972년 루스(Rus) 제국 설립

덴마크 바이킹이 프랑크로 관심을 돌리자 911년 프랑크의 ‘찰스 더 심플’ 왕은 바이킹 롤로에게 노르망디를 내주고 더 이상 침략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롤로는 세례를 받고 프랑크 왕국의 가신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땅을 차지한다.     


북유럽에서 찾아온 아이슬란드 정착민들은 930년 섬 전체를 관할하는 팅(Thing)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주민 모두가 직접 참여하는 현대식 의회민주주의 제도를 정착시킨다. 한편, 이 시기에 스웨덴 바랑기안 바이킹은 대단한 활약을 펼친다. 이들은 대부분 스웨덴 루스(Rus) 지방 출신으로 882년 바이킹 수장 루리크의 지휘 아래 지금의 우크라이나 키예프를 장악하고 이들이 장악한 루스(지금의 러시아) 지역의 모든 정착지를 통치하는 제국의 수도로 삼는다. 그러나 바랑기안이 설립한 루스 제국은 점차 현지 슬라브 사람들과 동화되어 간다.    


10세기 말 북유럽국가들 지배지역


4) 1028년 크누트(Cnut) 왕 북해제국 건설

11세기 초 바랑기안의 동방과의 교역은 점차 러시아 출신 상인들이 맡게 된다. 그러나 서쪽에서는 바이킹 활동이 증가하고 있었다. 1016년까지 덴마크 하랄드 블루투스 왕의 손자인 크누트 왕이 드디어 잉글랜드 전역을 정복한다. 

     

1019년 크누트 왕은 덴마크를 물려받고, 1028년에는 스웨덴과 동맹을 맺은 노르웨이를 정복한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가 장악하고 있던 지역들, 지금의 스코틀랜드 북쪽에 위치한 오크니 제도와 셔틀랜드 제도, 그리고 서부지역 맨섬(Isle of Man)까지 모두 덴마크가 지배한다. 이에 따라 크누트 왕은 북해 제국을 건설한다.      


한편, 노르웨이 바이킹들은 986년에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그리고 서기 1000년에는 북아메리카에 있는 빈란드(Vinland: 지금의 뉴펀드랜드 지역)까지 원정에 나선다.    

  

11세기 초 북유럽국가들 지배지역

 

5) 1130년 시칠리 왕국의 출발과 종말

크누트(Cnut) 제국은 1035년 크누트 왕이 죽자 자연히 소멸된다. 영국에 대한 덴마크 지배 역시 1042년 끝이 난다. 이때 정권을 장악한 웨섹스(Wessex) 가문도 1066년 에드워드 왕이 후손도 없이 죽음을 맞자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때 잉글랜드 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데,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전투에서 승리하자 잉글랜드 윌리엄 1세 왕으로 등극한다. 이 일은 다른 한편으로는 바이킹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이 전투에서 노르웨이 출신으로서 바랑기안 전사들을 지휘하던 노르웨이 왕 하랄 하르드라다가 죽음을 맞는다.     


한편, 11세기 초에 이르면 바이킹들이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그 지역 귀족들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어 주로 사라센과 비잔티움 제국 군대들과 전투를 벌인다. 점차 남부 이탈리아에서 바이킹 세력이 강성해 지자 그들은 자신을 고용한 고용주들을 굴복시키고 영지를 뺏고 자신들이 영주가 되어 가문을 세우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바이킹들은 드디어 1091년 시칠리섬을 비롯한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한다. 남부 이탈리아를 지배한 바이킹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오트빌의 탕크레드의 아들들이다. 탕크레드는 당시 노르망디 공작이 거느리던 하급 기사였지만 그의 아들 12명 중 8명이 남부 이탈리아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서 결국 남부 이탈리아를 평정한다. 

시칠리 왕국(1154)  지도

특히 로베르토 기스카르를 비롯한 몇몇은 1050년대에 이탈리아 남부의 비잔티움 제국 영토인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를 침공해 점령하고, 나중에는 시칠리 전체를 지배한다. 이 지역은 그 후 1130년에 왕이라는 칭호를 획득한 시칠리 백작 로게르(Roger) 2세가 이탈리아 남부의 바이킹이 점령한 영토를 모두 병합하여 시칠리 왕국을 세운다. 이들은 12세기 말 호엔슈타우펜 왕가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시칠리 왕국을 지배한다. 


그러나 조만간 북유럽 출신 바이킹이 지배하는 사회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1131년에 안타오크 공국을 지배하던 바이킹 수장 보헤몽드(Bohemond)의 아들 보헤몽드 2세가 사망하고, 1154년에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지배하던 윌리엄 1세의 손자 스테펜(Stephen)이, 그리고 1194년에는 시칠리 왕국을 다스리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헨리 6세까지 모두 죽는다. 따라서 명실공히 바이킹 군주의 후손을 자처하던 인물들이 모두 사라지고 바이킹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린다.     


12세기 초 바이킹 진출 지역


6)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북유럽

바이킹 시대 이후 북유럽 팽창은 정복자로 알려진 덴마크 왕 발데마르(Valdemar) 2세가 주도하는 발트 제국 창설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는 1208년부터 그의 가신이 된 노르웨이를 완전 정복한다. 또한 북부 독일에서도 영향력을 확장하고, 1214년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레데릭 2세(헨리 6세의 아들)가 발데마르의 군대를 지원함으로써 독일의 엘베(Elbe) 강 동쪽부터 덴마크에 이르는 해안지역 전부를 지배하게 된다.


1219년에는 이교도들에 대한 십자군 출병을 명분으로 에스토니아 북부 지역을 정복하고, 얼마 후 또다시 북부의 쿠어랜드(Courland: 라트비아)까지 점령한다. 이 당시 스웨덴은 서서히 핀란드를 식민지화 하기 시작한다. 이후 1세기가 지난 1397년 덴마크는 또다시 칼마르 동맹을 통해 북유럽 맹주로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조만간 칼마르 동맹은 와해되고 북유럽 맹주 자리는 스웨덴으로 넘어간다. 


치열한 군주들 간의 전투는 이처럼 새로운 북유럽 질서를 만들어 나간다. 그 후 계속해서 유럽 제국들은 종교전쟁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제국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단초를 마련하게 된다. 그야말로 바이킹 시대가 끝나기 무섭게 새로이 제국주의 시대로 진입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칼마르동맹(1397)을 통해 덴마크는 북유럽 패권을 장악한다.


바이킹 시대의 해외 원정 발자취를 정리한 지도를 보면 3세기라는 그리 길지 않은 시기에 바이킹들은 엄청난 지역을 찾아다녔다는 느낌이다. 북유럽에서 시작한 해외원정은 인근 영국을 비롯해 프랑스와 지중해 연안 국가들, 그리고 러시아와 지금의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진출을 했다.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는 스코틀드랜와 아일랜드를 거쳐 페로제도와 그린란드, 그리고 서기 1000년경 지금의 아메리카 대륙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보여준다.     

바이킹들의 활동이 단순한 항해만을 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해적처럼 때로는 정복자처럼, 그리고 심지어 지배자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면서 해외 정착지를 찾아 나섰다. 이런 바이킹들의 활동은 결국 동과 서를 연결하는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고 단순한 약탈자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새로운 문물을 중개하고 전파하는 문화의 가교 역할도 한다.  

    

특히 바이킹 업적으로 관심 있게 보아야 하는 것은, 직선적인 문화의 전달이나 파급효과 등이 아니다. 이미 그 이전 동과 서를 잇는 실크로드가 일방향적으로 문화 연결을 이루었다면 바이킹 활동은 쌍방향적이고 다방면적인 방향성을 지닌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간 특징을 보여준다. 마치 현재의 인공지능 시대가 요구하는 정보의 네트워크처럼 이미 바이킹 시대에 초보적인 형태이지만 어느 정도 문화 경제적인 네트워크화를 이루기 시작했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    

 

세계는 오늘도 진화하고 있다. 특히 새로운 정보는 물론 새로운 상품과 새로운 지식, 심지어 구태의연한 조작과 의도적인 조작된 정보 등이 수없이 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되고 수집되고 있다. 그런 네트워크의 방향성과 진정성을 어쩌면 지난 바이킹 네트워크에서 그 특징과 활성화 방안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계는 더 이상 혼자만의 고립된 세계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이킹의 족적은, 단순히 제국 시대를 건설해 나가는 정보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전혀 새로운 네트워크를 건설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변동을 야기하고 새로운 미래를 창출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음을 인지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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