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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Dec 18. 2018

전설적인 바이킹 로드브록

1. 바이킹 전설이 시작되다   

  

바이킹 시대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미 바이킹 활동은 국지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추운 북유럽 지역을 벗어나기 위해 먼 바다를 항해하며 따뜻한 지역을 찾아 헤매던 바이킹들은 유럽 북부지역 해안가를 따라 해적질을 도모하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재물을 노리고 수도원을 기습하거나 원주민들을 습격하고 정착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바이킹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는데, 8세기 후반 잉글랜드 노섬브리아 왕국의 북동쪽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린디스판(Lindisfarne) 가톨릭 수도원을 공격하면서 본격적으로 바이킹 시대가 열린다.     


이때부터 북유럽 바이킹들은 향후 3세기 동안 잉글랜드 지역을 습격하거나 아예 점령을 하고 정착을 하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바이킹들은 아이슬란드를 포함해 스코틀랜드와 인근 오크니 제도, 셔틀랜드 제도, 그리고 아일랜드 등을 침공하며 세력을 확장한다. 사실상 북유럽 출신 바이킹들은 자신들의 출신 국가에 상관없이 모두 해외로, 특히 원정 초기에는 영국 중부지방을 주로 공격하면서 해외기지 건설과 정착촌 물색을 시도한다. 이처럼 바이킹이 해외로 뻗어나가면서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게 벌써 천이백 년 전이었다.

     

바이킹이 삶에 대한 투쟁으로 전개한 해적질은 점차 규모를 더해가면서 북유럽과 인접한 영국이라는 나라를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유럽 본토는 물론 멀리 러시아 키예프 지역에서부터 서쪽의 그린란드와 빈란드로 알려진 아메리카까지 발자취를 남긴다. 이러한 과정에서 탁월한 바이킹 지도자들의 활약이 드러나게 된다.     


걸출한 바이킹 수장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바이킹 시대라는 전개과정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바이킹으로서 그들이 보여준 열정과 패기, 그리고 심지어 잔인함과 교활함까지도 바이킹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참모습을 이해함으로써 바이킹 시대의 상황과 여러 조건들을 알게 되리라 기대한다. 몇 세기에 걸쳐 진행된 바이킹 시대의 주인공들, 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런데 먼저 바이킹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를 하는데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전설적인 바이킹 전사들의 모습을 방송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알게 되는 경우 역사적 사실은 어느새 특정 의미만을 부각하기 위한 과정을 거치면서 대부분 ‘조작된 역사’로 변질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언제나 그렇듯 드라마로 제작할 경우 빈번히 극적 효과를 표현하기 위해 신빙성이 의심되는 사실을 확대 과장하기 때문에 바이킹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더더욱 역사로서의 사실성이 의심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어쩌면 초기 바이킹 역사에서 주인공이랄 수 있는 몇몇 유명 바이킹들의 전설적 이야기가 바로 그렇게 확대 재생산되어 떠돌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든다. 전설적 바이킹의 이야기 전개는 가능한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료의 제한적 특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극적으로 꾸민 드라마를 가지고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때  사실을 왜곡할 뿐 아니라 전혀 다른 사실을 주장하는 원인으로 발전할 가능성까지 있다.  

   

바이킹 침공 장면, 그림: Angus McBride


그 단적인 예가, 2013년부터 ‘History’ 채널에서 방송하고 있는 '바이킹'이라는 드라마를 들 수 있다. 이 드라마는 미셀 허스트(Michael Hirst)라는 영국 작가가 집필을 맡은 역사 TV 시리즈물인데 주로 아일랜드에서 촬영을 하면서 전설적 바이킹 라그나르 로드브록(Ragnar Lothbrok)과 그의 후손들, 그리고 당시 북유럽의 다른 나라 왕과 문화 등에 관한 내용 등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면 볼수록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아무리 드라마가 가상의 현실을 전제로 했을 거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더라도 해도 너무하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거의 허구에 불과하다. 단지 천 년 전 바이킹들의 삶을 배경으로 당시 유명한 전설적 바이킹들 이름을 빌려와 작가 마음대로 허구의 날갯짓을 펼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라도 천 년 전 유명 바이킹의 이름을 듣는 순간 실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실제 모습은 간데없고 코미디처럼 같은 이름의 전혀 다른 바이킹이 드라마속에서 그려지고 있다는 걸 명심해야만 한다.     


예를들면, 이 드라마에서 가장 결정적 사실 왜곡은 주인공인 라그나르 로드브록에 대한 것이다. 로드브록은 실제 인물인지 가공의 인물인지 그 실체가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바이킹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전설적 로드브록에 대해 어쩌면 가상의 사실을 덧붙여 지나치게 신격화한 게 아닌가라는 의문을 조심스레 제기하기도 한다. 단적으로 그런 인물이 존재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더구나 로드브록에 관한 출처로서 원조격으로 인용하는 아이슬란드의 서사시 사가(Saga)에는 그에 대한 기록 역시 정확한 사실적 내용보다 다소 추상적 내용으로 그를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로드브록은 용과 싸움을 벌여 승리하고 바이킹 함선을 타고 전투에 나서 다양하고 신비한 경험을 한 전설적 바이킹이라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드라마에서는 마치 사실인양 아주 세세하게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그의 행보를 그리고 있어 사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높다.    


바이킹 드라마 주인공 로드브록 역 트래비스 휨멜(Travis Fimmel)

또 다른 결정적 오류는, 라그나르 로드브록과 롤로의 관계이다. 마치 “라그나르 로드브록과 롤로가 친형제”가 아닌데도 친형제인 것처럼 드라마는 그리고 있다. 심지어 라그나르 로드브록보다 롤로가 친형인양 그리고 있다. 두 사람의 서열이 뒤 바뀌어 나온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확인해 보면 오히려 롤로가 대략 6~70년 정도 후대의 인물이다. 로드브록이 9세기 중반에 죽고, 롤로는 10세기 초반에 죽는다. 또한 로드브록의 아들 이바르가 죽은 후 많은 시간이 지나 노르망디를 지배한 롤로의 손자 윌리엄 2세가 잉글랜드 왕으로 등극을 하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전제로 할 때 로드브록과 롤로와의 관계는 결코 동시대에 존재한 인물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로드브록이 롤로보다 훨씬 윗대인 게 분명하다.     


물론 로드브록의 연대기나 당시의 사실 등이 정확한지는 좀 더 확인을 해보아야 할 일이지만 윌리엄 2세의 영국 정복은 정확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의 할아버지인 롤로의 정확한 연대기를 구성하는 게 크게 어렵지 않다. 따라서 드라마는 단지 극적 효과를 노린 허구의 오락물이라는 점을 다시한번 감안하고 보아야 한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2. 로드브록과 바이킹 전설

 

바이킹이 영국 해안에 있는 린디스판(Lindisfarne) 가톨릭 수도원을 공격한다. 그들은 신성한 섬(Holy Island) 기슭에 착륙해 교회를 습격하고, 수도사를 무참히 살해한다. 그리고 그들은 보물을 약탈하고 섬을 떠난다. 서기 793년 6월 8일, 이 날은 바이킹 역사에서, 특히 영국의 역사에서 바이킹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알리기 시작한 날이다. 바이킹 시대의 개막은, 이처럼 가톨릭의 적(?)인 라그나르 로드브록(Ragnar Lothbrok) 일당이 린드스판을 습격함으로써 시작된다.(* 이곳에서 서술한 로드브록에 대한 내용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라그나르 로드브록은 초창기 바이킹 시대에 가장 눈에 띄는 바이킹이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를 정복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는데 그의 삶과 모험은 아이슬란드 신화 <라그나르 이야기>와 <라그나르의 아들 이야기> 편에서 다루고 있다.  라그나르 로드브록은 언제나 짐승 가죽으로 만든 바지를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털바지’(Hairy Breeches)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웨덴과 덴마크 왕이었던 시구르드 링(Sigurd Ring)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라그나르 자신은 언제나 북유럽 신화의 절대자 오딘(Odin)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을 한다.(*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가톨릭으로 개종을 진행하던 당시 바이킹 수장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개종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라그나르 로드브록은 영국뿐 아니라 당시 프랑크를 자주 침략했다. 그가 거둔 가장 성공적인 습격은 서기 845년 파리에서 120척의 바이킹 함대를 이끌고 5천 명이 넘는 전사들을 지휘해 파리로 쳐들어 갔을 때이다. 그들은 파리까지 진격해 당시 프랑크 왕국의 왕이자 샤를마뉴의 손자인 샤를에게 파리를 파괴하지 않는 대신 막대한 양의 돈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킹 문헌에 따르면, 라그나르 로드브록은 7천 파운드라는 엄청난 양의 은을 받아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샤를과의 약속대로 파리를 건드리지 않고 떠난다. 그러나 라그나르 로드브록은 북부 프랑크 해안을 거쳐 오는 귀향길에서 닥치는 대로 약탈과 살상을 자행하며 그에게 저항하는 상대를 모두 짓밟아버리는 잔인함을 보였다고 한다.

     

라그나르 로드브록

라그나르 로드브록은 프랑크를 정벌한 다음 또다시 서기 863년 북쪽으로 기수를 돌려 잉글랜드로 향한다. 하지만 라그나르 로드브록은 잉글랜드 중북부 지역인 에일라 2세가 다스리는 노섬브리아 왕국에서 날씨 때문에 고생을 하다 끝내 그가 탄 바이킹 함선이 좌초하고 만다. 그 결과 라그나르 로드브록은 오히려 노섬브리아의 에일라 2세와 전투를 벌이다 참패를 하고 붙잡히고 만다. 라그나르 로드브록은 노섬브리아 왕국의 군사들에게 사로잡혀 독사가 가득한 골방에서 죽음을 맞는다. 라그나르 로드브록은 그때 세 번째 부인 아슐라우그가 만들어준 보물, 어떤 무기도 꿰뚫을 수 없는 옷이 있었지만 이 옷을 그만 에일라 왕에게 빼앗기는 바람에 맨몸으로 독사가 득실거리는 골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라그나르 로드브록이 죽은 지 일 년이 지난 서기 866년, 라그나르 로드브록의 넷째 아들 이바르 로드브록은 형인 할프단(Halfdan)과 우바(Ubba)와 함께 바이킹 군단을 이끌고 복수를 하기 위해 머물고 있던 아일랜드에서 잉글랜드로 향한다. 이바르의 동생 ‘뱀눈 시구르드’(* 그의 눈에 뱀같은 무늬가 보였다고 한다.)와 올라프 더 화이트(Olaf the White)도 얼마 후 가세를 한다.   

   

드디어 아버지를 죽인 원수 노섬브리아 왕 에일라 2세를 사로잡고 그가 통치하던 노섬브리아 왕국은 물론 머시아 왕국과 동 앙글리아(Anglia) 왕국을 멸망시킨다. 결국 이바르 로드브록(Ivar the Bornless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은 아버지를 죽음에 빠뜨린 에일라 2세를 잔인하게 처형해 아버지 원수를 갚는다. 그리고 이바르는 이제부터 대부분의 잉글랜드를 손아귀에 넣고 새로운 지배자로서 위용을 발휘한다.

     

라그나르 로드브록, 그는 독사가 우글거리는 구덩이 속에서 죽음을 맞음으로써 후대의 사람들에게 강인한 바이킹 상을 심어주고 바이킹이라는 존재를 각인시킨 특별한 존재다. 더구나 바이킹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바이킹 라그나르에 관한 전설적 이야기들이 꽤나 많이 나돌고 있다. 그는 단순한 해적이 아니라 바다를 지배하던 바다의 왕이었고, 초창기 바이킹 역사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전설적 인물로 두려움이란 걸 모르는 위대한 바이킹이었다.  

   

한편, 라그나르 로드브록은 그가 살던 노르웨이 바이킹 마을에서 우연히 예전에 그와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우던 여전사 라게르다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 셋을 낳는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라그나르는 얼마 후 라게르다의 곁을 떠난다. 라그나르는 예전에 스웨덴 요틀란드 백작의 딸 토라 보가르요트(Tora Borgarhjort)를 만났던 곳으로 그녀를 찾아 떠난다.  

  

라그나르의 두 번째 아내 토라 보가르요트(Þóra Borgarhjǫrtr. Thora Town-hart)는 매우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녀는 요틀란드의 백작 헤라우드의 딸이다. 그녀는 아버지한테서 작은 용(Lindworm)을 선물로 받아서 길렀다. 그런데 이 용이 금방 무럭무럭 자라나더니 그녀를 탑에 가둬버리고 아무도 올 수 없게 입구를 막아버린다. 그녀의 아버지 헤라우드는 딸을 구해주는 사람을 딸과 결혼시켜주겠다고 약속을 내건다.


이때 마침 이 소문을 들은 라그나르 로드브록이 자신의 털바지에 타르와 모래를 잔뜩 묻히고 용을 죽이러 나선다.(* 라그나르의 성씨인 로드브록(Loðbrók)은 굳이 직역하자면 “가죽털로 만든 반바지”라는 뜻인데, 이때 로드브록이 입었던 바지를 뜻하는 말이다.) 용이 독을 아무리 내뿜어도 로드브록의 옷에 용의 독이 먹히지 않자 라그나르 로드브록은 드디어 용을 제압해 무찌른다. 그리고 토라를 구해낸다. 그 후 로드브록은 토라 보가르요트와 결혼해 에이리크와 아그나르라는 두 아들을 얻는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 둘을 낳고 얼마 후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고 만다.    

로드브록과 아슐라우그

라그나르는 또다시 슬픔에 잠겨 어디론가 떠나간다. 훗날 무용담을 정리한 뵐숭가 신화(Völsunga Saga)에 따르면, 그는 아름다운 아슐라우그(Aslaug)라는 여인을 만난다고 한다. 그녀는 로드브록의 세 번째 부인이자 노르웨이 신화에 등장하는 여왕으로서 빼어난 미모를 자랑한다. 아슐라우그는 본래 영웅인 시구르드와 발키리 브룬힐트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그러나 부모가 비극적 참사에 휘말려 죽자 그녀의 양아버지인 헤이머(Heimer)가 그녀를 몰래 키운다. 헤이머는 그녀의 안전을 걱정해 큰 하프 통에 그녀를 숨겨놓고 길렀는데, 자신은 가난한 하프 연주자로 속이고 떠돌아다니며 지낸다.  

    

그런데 헤이머의 하인들이 헤이머가 하프 통을 애지중지하는 바람에 혹시 그 안에 값진 보물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추측을 하고 결국 헤이머를 죽이고 하프 통을 열어본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거기에는 예쁘게 생긴 어린 아슐라우그가 무서움에 떨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어린 아슐라우그를 가엽게 여긴 사람들이 그녀를 크로카(Kráka)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성인이 될 때까지 양아버지처럼 대신 길렀다고 한다.(크로카는 까마귀를 뜻하는데 그녀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그런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아주 예쁜 소녀로 자란다. 하인들은 그녀에게 긴 후드를 씌우고 그녀가 남의 눈에 띠지 않도록 길렀다. 그런데 라그나르 로드브록이 그녀가 빵을 굽는 중에 드러내 보인 미모가 너무 아름다워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좀 더 성인이 될 때까지 로드브록에게 기다려 줄 것을 요청한다. 로드브록은 사람들 말을 듣지 않고 기다리지 못하고 그녀와 혼례를 치러 버린다.  

   

로드브록과 아슐라우그, 그림: August Malmström, 1880


그녀는 아들 셋을 낳는다. 그녀가 낳은 아이들 중에 이바르 더 본리스(Ivar the Bornless)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첫 번째로 태어난다. 후에 아버지 로드브록의 원수를 갚는 이바르 로드브록손(Ivar  Lothbroksson)이 바로 이 아이인데, 그녀가 너무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아서인지 이바르는 태어나면서부터 뼈가 약했다고 한다. 특히 그의 관절은 아주 약해서 그가 성인이 된 후 전장에 나갈 때 부하들이 방패 위에 그를 태우고 전투를 하러 달려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로드브록의 세 부인들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부인이 낳은 아이들은 아버지만큼 이름을 날리지 못했는지 세 번째 부인 아슐라우그가 낳은 아이들이 훗날 유명한 바이킹으로서 이름을 날린다. 특히 이바르 더 본리스는 그야말로 뼈골이 약한데도 무섭기 그지없는 미친 바이킹이라 부르는 버서커가 되어 잠시나마 잉글랜드를 실질적으로 지배한다. 그러나 안탑깝게도 이바르 더 본리스는 허약체질로 인해 잉글랜드를 평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된다.     


이바르가 죽자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쥐게 된 이바르의 동생 뱀눈 시구르드(* 미드 ‘바이킹’에서는 로드브록의 둘째 아들로 나온다.)는 아버지가 다스리던 스웨덴 남서부와 덴마크 북동부를 통치한다. 또한 시구르드는 라그나르 로드브록의 손자이자 자신의 아들을 덴마크와 잉글랜드, 그리고 노르웨이를 지배하는 크누트 대왕의 자리에 앉힌다. 뿐만 아니라 시구르드는 손자 고름(Gorm)의 장인이 죽자 그가 통치하던 유트족 왕위까지 상속받는다. 이후 마땅한 후계자가 없던 덴마크를 시구르드가 직접 통치하게 되면서 전설적인 덴마크의 시조왕이 된다.           


3. 잉글랜드의 데인로     


서기 878년 바이킹 시대 초기에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인 에딩턴(Edington) 전투가 벌어진다. 그러나 앵글로 색슨 족의 알프레드 더 그레이트(Alfred the Great) 왕은 더 이상 전쟁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덴마크 군주인 구드룸(Guthrum/ Guthrum) 왕과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끝낸다.  

    

전쟁이 발발한 지 10년 후, 구드룸(Guthrum) 왕이 통솔하던 덴마크 바이킹은 앵글로 색슨 지역의 알프레드 더 그레이트(Alfred the Great) 왕에게서 땅을 넘겨받는다. 이때부터 정식으로 데인로(Danelaw) 지역이 덴마크 바이킹의 정착지가 된다. 데인로(Danelaw) 지역은, 웨드모어(Wedmore) 조약의 일환으로 잉글랜드를 가로지르는 경계선을 런던(London)에서 머시(Mersey)까지 확정하고 그 한쪽을 데인로로 지정한다. 이로써 경계선 남쪽 지역은 영국 웨섹스 왕(The King of Wessex)이 통치를 하고 경계선 북쪽은 데인로 지역으로 바이킹 정착지로서 점령을 합법화하게 된다.

    

11세기 경 노섬브리아와 데인로, 머시아 지도


이제부터 데인로 지역의 영국인들은 9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바이킹에게 잉글랜드와 프란시아에서 전쟁을 하지 않는 대가로 데인겔드(Danegeld: 문자 그대로 'The Danish tax'를 의미)를 공물로 바친다. 그러나 '데인겔드‘(Danegeld)라는 용어는 엄격하게 말하면 20세기 이후부터 문학 작품 등에서 사용한 용어이고 그 이전 중세 시대의 문서에는 덴마크 바이킹에게 '금전’(geld, 또는 gafol)으로 지불하는 세금을 설명하는 용어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 경계선의 북쪽과 동쪽에 해당하는 지역은 스칸디나비아 바이킹들이 지배를 함으로써 ‘데인로’라는 지역을 만들게 된다. 최근에 학자들은 이 데인로 지역을 이름하여 ‘스칸디나비아 잉글랜드’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데인로는 영국 동부지방에 영국의 법이 아닌 스칸디나비아 법이 지배하게 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리하여 데인로 지역은 영국 앵글로 색슨족이 9세기 동안 자신들의 법이 아니라 북유럽 출신의 바이킹이 이곳을 합법적으로 지배함으로써 그들의 법에 따라 통치하게 된다. 이제부터 데인로 지역은 북유럽의 합법적인 식민지가 되었다는 말이다.     


결국 로드브록의 후손들은 그가 처음 잉글랜드를 침공했던 것처럼 잉글랜드에 데인로 지역을 만들어 정착을 하게 됨으로써 더 이상 침략과 약탈을 하는 바이킹으로 살지 않아도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정착민으로서 농지를 개간하고 무역거래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상거래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바이킹 시대를 회상하며 라그나르 로드브록을 추모한다. 라그나르 로드브록을 진정한 바다의 왕이자 전설적인 바이킹으로 기억하는 이유가 바로 그들을 인간적인 삶이 가능하도록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는 데에서 기인하고 있지 않을까? 언제나 그렇듯 강인하고 탁월한 지도력은 신화 같은 전설을 낳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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